"동백은 혹한을 넘기고서야 더 붉어진다던가. 지금쯤이면 고향집 마당엔 동박새 소리 낭랑하겠다. 어머니는 대문을 활짝 열어두셨을테지. 순옥이가 처음 우리 집으로 오던 그 날처럼."
동박새 / 박금아
“찍, 찌찌….”
쉴 새 없이 넘나드는 작은 새의 날갯짓에서 숲이 깨어난다. 1월의 여수 앞바다는 온통 붉은 꽃빛이다. 동백꽃 그늘에 앉으니 고향 바다가 밀려온다. 기억들이 한 장 한 장 파도로 왔다가 하얀 거품으로 사라진다. 포말 속에 작은 옷 보퉁이를 안고 대문간으로 들어오던 까망 눈망울의 소녀가 서 있다.
순옥이가 우리 집에 온 것은 열 살 때였다. 그 해 겨울 고깃배를 타고 바다에 나갔던 그 애의 부모가 큰 태풍에 실종사고를 당한 직후였다. 고아가 된 다섯 자매는 친척집으로 뿔뿔이 흩어져 갔지만 순옥이를 오라는 곳은 없었다. 한쪽 다리를 저는 장애 탓이었다. 소문을 들은 나의 어머니는 한달음에 달려가서 우리 집으로 데려왔다. 한때 아이의 아버지가 우리 배의 선장이었던 인연 때문이었다. 서열로 치면 우리 집에서는 셋째 딸이었다. 둘째, 넷째와는 한 살 차이였으니 어우렁더우렁하며 잘 지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아이에게서는 부모를 잃은 티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날쌘 몸짓은 4대가 이루는 층층의 가지를 넘나들며 식구들 가슴을 쏘옥 파고들었다. 동박새를 빼닮은 까맣고 또랑또랑한 눈은 어둠 속에서도 먼 데까지 꽃가루를 물어다 날랐다. 모두 순옥이만 찾았다. 동기간에는 새로운 놀이를 만들어서 인기를 끌었고, 어른들에게는 싹싹한 아이였다. 기억력도 좋아서 전화를 걸 때마다 “몇 번이고?” 하면 다부진 입술 사이로 숫자가 줄줄 새어 나왔다.
어장을 하는 우리 집에는 바람이 잦았다. 바람은 간신히 열매 맺어 놓은 것들을 진득하니 붙들어놓지 못했다. 그 애가 우리 집에 오던 때도 아버지의 사업이 태풍을 만났던 시기였다. 어린 나이에도 고생을 많이 해본 듯, 어지간한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았다. 발가락으로 동백 가지를 휘감아 싼 채 꼿꼿이 앉아서 동백을 지키는 동박새처럼 큰 바람이 불어도 떨어져 나갈 것 같지 않았다. 순옥은 추운 겨울날 우리 집에 날아든 동박새였다.
그런 순옥이, 어찌 그만한 바람에 날아갈 줄 상상이나 했을까. 사춘기의 바람은 회오리를 불러왔다. 바람은 더 큰 바람을 몰고 오는 모양이어서 장애는 바람을 부채질했다. 다리를 수술하기 위해 전국병원을 찾아다닌 어머니의 정성도 허사였다. 또래들의 놀림을 견디지 못하고 중학교 진학을 포기했다. 게다가 우리 자매들이 상급학교로 가면서 점점 더 외톨이가 되어갔다.
갑자기, 동백 숲이 요란하다. 새들의 울음이 격하게 섞이더니 동박새가 다급한 날갯짓을 하며 후다닥 뛰쳐나온다. 몸집이 큰 새 한 마리가 요란한 소리로 뒤를 쫓고 있다. 직박구리다. 녀석은 동박새를 매정하게 몰아붙이는 중이다. 쫓기던 새는 앉기를 포기하고 먼 데로 날아가 다른 나뭇가지에 앉았다. 저만치에서 떠나온 곳을 바라보는 새의 눈빛이 순옥이 눈처럼 슬퍼 보인다. 그렇게 한참을 바라만 보고 있더니 체념한 듯 패잔병처럼 축 처진 날갯짓을 하고는 어디론가로 가버렸다.
덧난 상처가 치유되기 어려운 것은 첫 상처가 주는 두려움의 깊이 때문인지도 모른다. 가족을 잃고 혼자 남의 집으로 왔던 일은 철들면서부터는 감당하기 힘든 상처였다. 툭하면 지난 상처에서 덧이 났다. 딱지가 앉을 시간이 없었다. 툭툭 털어버릴 다툼들도 진짜 싸움이 되었고, 친자매들을 찾아가고 말았다. 하지만 더부살이가 녹록했을까, 달포 후에 되돌아오고 또다시 집을 나가는 일을 반복했다. 우리는 덩치 큰 직박구리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가지 끝으로 내몰린 순옥은 날아갈 곳을 찾았다.
고단한 날개를 접기 위해 택한 것은 결혼이었다. 열 살이나 많았던 남편은 고깃배를 타는 사람이었다. 남편이 바다에 나가 여러 날씩 집을 비우는 사이에 순옥은 어판장 일을 하며 살림을 도왔다. 손이 야무진 순옥이 금세 소문이 났다. 남편에게는 의처증이 있었다. 칭찬이 자자해질수록 폭력에 시달렸다.
친정 길은 멀어졌다. 명절에도 순옥이 대신 모진 소문이 다녀갔다. 반대를 무릅쓴 결혼인 데도 잘 살지 못하는 것이 미안했던 모양이었다. 남편을 피해 객지를 돈다는 말이 들려왔다. 겨울에는 제주도에서 밀감 따기를 하고, 여름에는 도시에서 아파트 공사장을 따라다닌다는 말이 들려왔지만 찾을 수 없었다. 동박새는 어디로 날아가 버렸던걸까? 남이 낳은 자식 키워줘 봤자 헛일이라는 말까지 날아들어 순옥없는 집안은 바람 속이었다.
살아 있는 모두는 서로를 향한 절실함 속에서 존재하는 것 같다. 동백꽃과 동박새처럼 상대가 없는 겨울은 고통의 시간이다. 곤충이나 꽃이 없으니 동백은 가루받이를 할 수 없고, 동박새는 먹을 것 없이 긴 겨울을 보내야 하기 때문이다. 세한지우에 비유할까. 동백은 찬바람 부는 날 향기도 없이 피어나는 자신을 찾아오는 동박새를 버선발로 뛰어나가 맞는다. 어찌 동박새와 동백꽃뿐일까. 사람도 저 혼자만으로는 꽃을 피울 수 없다. 부모가, 동기간이 손잡아주고 바라보아 주어야 한다. 동박새 없는 동백나무 숲처럼 순옥이가 없는 우리집의 겨울은 황량했다.
밤이 새기를 기다린 듯, 아침 일찍 전화벨이 울렸다. 동박새 울음처럼 반가운 소리였다. 순옥이었다. 한참을 망설인 목소리에서 얼음이 박혔을 언 손이 만져졌다. 막 고향 버스터미널에 내렸다고 했다. 밤새 불어온 바람에 베란다 동백꽃이 붉은 꽃봉오리를 틔운 날이었다.
동백은 혹한을 넘기고서야 더 붉어진다던가. 지금쯤이면 고향집 마당엔 동박새 소리 낭랑하겠다. 어머니는 대문을 활짝 열어두셨을테지. 순옥이가 처음 우리 집으로 오던 그 날처럼.
⁕ 박금아 님은 수필가. 2015년 ≪매일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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