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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과비평 2018년 08월호, 통권202호 I 세상마주보기] 별을 찾아서 - 차하린

신아미디어 2018. 10. 22. 14:16

땅별에서 3박 4일 동안 우주의 별을 기다리고 있다. 아직도 비가 오락가락거려서 만나지 못했다. 하지만 내 마음에는 수많은 별이 뜨고 졌다. 밤낮으로 비가 별처럼 쏟아지는 이곳 유명산자연휴양림에는 세상의 시간이 멈추고 자연의 시간만 흐른다. 별을 기다리는 동안 물을 거슬러 회귀한 연어처럼 유년의 시간으로 되돌아왔다. 비가 내린다. 유년의 초록비가 별이 되어 내린다."







   별을 찾아서    -    차하린


   비가 올 거라는 예보를 듣고도 길을 나섰다. 장마철이지만 빗나가는 게 예사여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더군다나 햇살이 쨍쨍한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었다. 
   가는 도중에 비구름이 몰려들었다. 구름 낀 남한강변을 따라오다 내밀한 산굽이를 돌고 돌아 선어치 고개를 지났다. 점심때쯤 예약해 둔 오토캠핑장에 도착했다. 캠핑장은 녹음이 우거진 산속에 숨어있었다. 짐을 내리는데 매지구름이 뒤덮은 하늘에서 빗방울이 후드득 떨어진다. 서둘러 텐트부터 치는데 실수가 다반사다. 우여곡절 끝에 완성하고 한숨을 돌리니 빗줄기가 굵어진다.
   남편이 퇴직하자마자 내가 우겨서 텐트를 샀다. 한겨울날 대형마트에 펼쳐진 큼직한 텐트가 취침공간에다 리빙공간까지 있어서 마음에 들었다. 이것만 있으면 자연을 벗삼아 한뎃잠을 자면서 색다른 경험을 해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여름이 오기를 기다렸다가 오토캠핑을 감행했다. 지난봄 프라하 근교에서 보았던 수많은 별들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프라하는 세계에서 모인 여행객들로 넘쳤다. 그들 사이에 끼여서 낮에는 천문시계가 있는 구시가지와 프라하성을 구경했다. 저녁에는 카를교 근처에서 프라하성에 불이 켜지기를 기다렸다. 땅거미가 지자 환한 불빛이 프라하성을 대낮처럼 밝혔다. 볼타바강 위로 반영된 고성의 야경은 일렁이는 불꽃 같았다. 넋을 잃고 바라보다가 숙소로 가는 버스를 탔다. 버스는 프라하를 벗어나서 들판과 산속을 한참 달려 작은 시골마을 스브르스크(srbsko)에 도착했다. 상현달도 사라진 깜깜한 밤이었다. 불빛이라고는 희미한 호텔 간판이 전부였다. 무심코 밤하늘을 보니 하얀 이팝꽃같이 무리를 지은 싸라기별이 셀 수 없이 많았다. 다이아몬드 가루를 뿌려 놓은 것처럼 반짝거렸다. 도시의 불빛과 공해가 없는 청정지역이라 그런지 크고 작은 별들이 맨눈으로도 또렷하게 보였다.  
   도시에 살면서부터 별하고 멀어졌다. 별이 보고 싶어서 밤하늘을 올려다보면 밝은 불빛에 가려져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나이가 드니 눈이 아프도록 별자리를 찾았던 어린 시절이 그립다. 그때는 보석처럼 반짝이는 별나라에 누가 살고 있는지 궁금했다. 별이 살고 있는 우주의 끝이 어디인지도 알고 싶었다. 별자리가 가진 전설 같은 이야기를 들으면서 꿈을 키웠던 밤도 수없이 많았다. 별을 헤아리면서 까만 밤하늘을 뚫어져라 보고 있으면 내 몸이 별처럼 둥둥 떠서 우주 속으로 빨려들어 가는 것만 같았다. 그렇게 별을 본 지가 하도 오래되어서 이제는 별자리도 거의 잊어버렸다. 사람도 왕래가 뜸하면 서로 잊기 마련인데 혼자서 정을 주었던 별이었으니 오죽할까.
   이번 오토캠핑도 별이 잘 보이는 그믐날에 맞추어서 왔다. 은하수와 견우별 직녀별도 찾아보고 북극성을 중심으로 시시각각 변하는 별의 궤적을 따라가면서 밤을 새우고 싶었다. 그런 내 마음도 모르고 야박스레 장맛비가 퍼붓는다. 이러다가 초롱초롱한 별 보기는 고사하고 고생을 사서 하는 게 아닌가 싶다.
   리빙공간에 앉아 비긋기를 기다렸다. 한 무리 말떼가 지나간 것처럼 흙먼지를 날리던 격렬한 비가 바람까지 몰고 왔다. 산등성이를 넘어온 바람비는 무성한 나뭇가지를 휘저으며 쏜살같이 산 아래로 달아났다. 풀벌레 소리 매미 소리 새소리도 사라졌다. 굵은 빗소리만 숲속으로 흩어졌다. 
   날이 어두워졌다. 어둠 속으로 가로등이 달처럼 떴다. 가로등 불빛을 받은 빗방울들이 투명한 수정별이 되어 떨어졌다. 산 고개를 넘나들던 먹구름이 밤이 깊어질수록 거센 비를 몰고 왔다. 급기야 번개가 치더니 멀리서 하늘을 쩍쩍 가르는 천둥소리가 산짐승처럼 으르렁거리며 가까워졌다. 연달아 이어지는 맹렬한 우렛소리를 한데서 들으니 심장이 요동을 쳤다. 얼른 텐트 속으로 숨어들었다. 자리에 누우니 얼굴 위로 억수 같은 빗소리가 쏟아졌다. 나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얇은 텐트 막을 사이에 두고 비와 맞섰다. 사정없이 퍼붓는 비는 텐트 위에 수많은 파편을 만들었다. 온 천지가 빗소리에 갇혔다. 빗소리를 듣다보니 견우와 직녀가 칠석날 흘리는 쇄루우灑淚雨처럼 한여름 장맛비도 별들이 흘린 눈물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주 질서에 따라 모범생처럼 규칙적으로 움직이던 별도 가끔 울고 싶을 때가 있을 것이다. 일 년 동안 속울음을 참고 참았다가 한꺼번에 토해내는 의식을 치르는 것인지 모르겠다. 번개가 요술봉 같은 빛으로 별자리 모양을 만들면 그 별자리에 해당하는 별들이 순서대로 울고 있는 것 같다. 떼창으로 터진 울음소리가 천둥이 되고 서러운 눈물은 비가 되어서 온 세상을 적시는 중인가 보다. 빗소리가 거칠어질수록 상상은 끝없이 펼쳐졌다. 
   잠 자기는 글렀다. 이왕 잠은 놓쳤으니 빗소리에 집중했다. 소란스러운 빗소리가 별똥별이 만들어내는 오케스트라로 들렸다. 간간이 부는 바람은 현악기가 되고 빗소리는 타악기가 되었다. 양철지붕 위에 떨어지는 구슬처럼 경박스럽게 굴다가 다급한 다듬이 소리가 되었다가 양동이로 물을 철철 퍼부어대는 우렁찬 함성으로 변했다. 왁자지껄한 빗소리 리듬이 차츰 귀에 익숙해지니 캐스터네츠 연주처럼 작아졌다. 나중에는 브람스의 자장가로 희미하게 들리는가 싶더니 눈을 떠보니 아침이다.
   빗줄기가 밤보다 많이 수그러들었다. 밤새 천둥과 번개로 북새통 같았는데 밖을 보니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고요하다. 비에 젖은 나무들이 더 싱싱해 보인다. 진한 나무 냄새가 바람결에 퍼진다. 가슴이 뭉클해질 정도로 상큼하다. 
   비에 젖는 숲을 바라본다. 물푸레나무 함박나무 졸참나무 신갈나무 물박달나무 생강나무 쪽동백나무 낙엽송 신나무에 그믐치가 내린다. 잎사귀마다 부딪히는 빗소리가 제각각이다. 푸른 나뭇잎에 매달린 빗방울들이 초록빛 별이 되어 사방으로 흩어진다.
   땅별에서 3박 4일 동안 우주의 별을 기다리고 있다. 아직도 비가 오락가락거려서 만나지 못했다. 하지만 내 마음에는 수많은 별이 뜨고 졌다. 밤낮으로 비가 별처럼 쏟아지는 이곳 유명산자연휴양림에는 세상의 시간이 멈추고 자연의 시간만 흐른다. 별을 기다리는 동안 물을 거슬러 회귀한 연어처럼 유년의 시간으로 되돌아왔다.
   비가 내린다. 유년의 초록비가 별이 되어 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