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보자들의 명함을 하나하나 읽어보며 행간의 의미를 읽는다. 대한민국 기초단체에서 추진한 사업들이 예산만 허비한 일이 비일비재한 것을 보면서 기초단체장도 잘 뽑아야 하고, 기초의회 의원도 잘 뽑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 명함의 ‘함銜’을 파자破字해 본다. 이름에 재갈[金]을 물고 다니[行]라는 뜻이다. 입만 나불거리지 않는 후보를 뽑을 일이다. 게다가 문도 번거롭고, 예도 번거롭게 하지 않을 후보를 뽑았으면 좋겠다는 것은 나만의 욕심은 아닐 게다."
명함 - 신원철
지방의회 선거를 두어 달 앞둔 시기에는 어느 모임에 나가든 정치지망생들의 명함을 받아오기 마련이다. 어느 한 모임에서는 무려 열댓 장의 명함을 받아왔다. 도지사, 시장, 도의원, 시의원을 뽑는 선거이다 보니 명함을 건네주는 사람이 많다. 지난 지방의회 선거에서 잘 알아보지도 않고 투표한 기억이 있어 이번에는 명함 하나하나를 꼼꼼히 살펴보았다. 사람들은 시장에 관해서는 관심이 있으나, 시군의원 후보는 잘 알려고도 하지 않고 관심도 적은 듯하다. 나 역시도 그랬다.
이제 갓 정치를 시작하는 젊은 후보도 있지만, 나이 많은 후보도 있다. 퇴직한 지도 한참 지난 나의 연배도 시의원 선거에 뛰어든 사람이 있다. 한편으로 그의 열정이 부럽기도 하지만, 앞으로 달포 동안 얼마나 많은 발품을 팔아야 할까 생각하면 안쓰럽기도 하다. 그러나 일단 선출만 되면 시가 주관하는 지역행사에 참석할 때마다 시의원님을 위한 자리를 마련할 것이고, 관내 어느 맛집이라도 가면 주인장께서 다녀간 표시로 벽에 게시할 사인을 부탁한다며 붓과 종이를 내밀기도 할 것이니 2주 정도의 선거운동으로 인한 피곤함쯤이야 충분히 감당할 만하다는 생각도 든다.
빡빡하게 박힌 경력이나 감투를 보면 누구를 눈 감고 찍어도 다 잘할 법하다. 회장, 부회장은 물론이고, 사무국장, 위원, 위원장이 많고, 이사도 얼마나 많은지 선거철이나 되어서야 수많은 단체가 내 주변에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아, 내가 산 인생은 너무나 초라하구나!” 하는 탄식이 절로 나온다. 그리고 어떤 사람의 명함은 뒷면 전체가 수상 내용으로 가득 찼다. 하긴 이런 명함은 선거철에만 쓰기 위해 특별히 제작된 것이기도 하지만, 요즘 명함은 자기 홍보를 위해 사업하는 사람도 화려하고 눈에 잘 띄도록 제작한다.
나는 마흔 중반이 되도록 명함을 가져본 적이 없다. 그도 그럴 것이 학교에서 아이들만 가르치는 서생에게 그것이 없이도 전혀 불편함을 느끼지 않았기 때문이다. 명함은 사업이나 정치하는 사람들의 전유물로만 생각했기 때문에 나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물건으로 여겼다. 그래서 한때는 내가 명함을 만들 일은 없을 것이라고까지 생각했었다. 정말 어쩌다 처음 만난 사람으로부터 명함을 받기만 하고 주지 않아도 전혀 어색함을 느끼지 않았다.
내가 처음 명함을 만든 것은 교육전문직으로 전직하고 나서였다. 엄밀한 의미로 내가 만든 것이 아니고 받은 것이다. 처음 출근했을 때 내 책상에 명함 한 갑이 놓여 있었다. 난 그 명함의 낯섦을 기억한다. 순백색 종이에 한문으로 기관명, 직위, 이름, 직장과 집의 전화번호가 세로쓰기로 적혀 있었다. 게다가 활판인쇄였다. 하얀 종이, 검은색 잉크, 한문, 세로쓰기, 그리고 활판인쇄가 내게 전해주는 의미는 막연하나마 문文도 번거롭고 예禮도 번거로울 것 같다는 것이었다. 나의 첫 명함에서 이런 인상을 받았기 때문인지 그것을 그리 많이 사용한 것 같지 않다. 아니 가만히 생각하면 다른 직종에 종사하는 사람들과 만나야 할 위치에 있지 않았다는 것이 더 합당한 이유인지 모르겠다.
퇴직하고 나서 명함 없이 산 지도 몇 년이 지났다. 아무리 퇴직 후 사회생활을 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이러저러한 이유로 새로운 사람을 만나게 마련이다. 단지 그 빈도수만 현저히 줄어들었을 뿐이다. 그러고 보면 나를 만난 사람 중에는 “명함을 가진 것이 있으면 한 장 주시지요.”라고 한 적이 몇 번 있었다. 굳이 상대방이 나의 명함을 받고자 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명함을 내게 줬는데 내가 주질 않았기 때문에 그런 일이 발생한 것이다.
얼마 전에 명함을 하나 만들까도 생각했었다. 단돈 만 원이면 예쁘게 만들어준다는 가게를 보았기 때문이기도 했고, 귀농, 귀촌자를 위해 시에서 운영하는 농업시민대학에서 한 강사님이 자기 농장 홍보를 위해서 멋진 명함을 만들라는 권고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연유로 난 아내에게 명함을 하나 만들까 하고 물어봤다가 핀잔만 받았다. 아내의 핀잔 때문이 아니라 이름과 전화번호만 달랑 쓴 명함이 어딘가 구색을 갖춘 것 같지 않다는 생각에서 결국 포기하였다. 그렇다고 전직을 쓸 수도, 현재 무직이라고 쓰기도 마뜩잖은 일이다. 난 농장 이름도 짓고 그 밑에 내 이름을 넣은 명함을 내년쯤에 만들 계획이다. 이때는 굳이 농부라고 직업을 밝힐 필요가 없을 것 같다.
후보자들의 명함을 하나하나 읽어보며 행간의 의미를 읽는다. 대한민국 기초단체에서 추진한 사업들이 예산만 허비한 일이 비일비재한 것을 보면서 기초단체장도 잘 뽑아야 하고, 기초의회 의원도 잘 뽑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 명함의 ‘함銜’을 파자破字해 본다. 이름에 재갈[金]을 물고 다니[行]라는 뜻이다. 입만 나불거리지 않는 후보를 뽑을 일이다. 게다가 문도 번거롭고, 예도 번거롭게 하지 않을 후보를 뽑았으면 좋겠다는 것은 나만의 욕심은 아닐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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