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음, 비읍. 그다음은 뭐지?” 며느리가 손녀의 손을 잡고 나무젓가락으로 시옷을 만들고 있었다. 내 눈에만 시옷이 사람 人자로 보이는가 싶어 머리를 흔들며 겉옷을 벗었다."
오늘도 사랑이다 - 김다원
“당근은 빼줘.”
김밥에 당근을 넣는 순간 아들이 말했다.
“그냥 먹어.”
얼굴도 돌리지 않고 며느리는 김밥을 쌌다.
“얼마를 함께 살았는데 아직도 말해야 해?”
아들의 짜증 섞인 말에 며느리의 어깨가 한숨과 동시에 내려갔다. 빨래를 개면서 힐끗 부엌을 보았다. 냉기를 담은 아들의 눈이 김밥을 싸느라 굽은 며느리의 등에 꽂혔다. 토요일이라고 두 손 가득 장을 봐 오면서 아이들과 김밥을 싸자고 신이 났던 아들이었다. 김밥을 먹으면서도 내 마음은 밖에 나간 아들에게, 또 아무렇지도 않은 듯 아이들에게 밥을 먹이는 며느리에게 있었다.
어제 차 안에서 들었던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란 시를 슬그머니 며느리에게 들려주고 싶었다. 러시아의 국민 시인이며 러시아 문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푸시킨의 시다. 누구든 아름답고 행복한 결혼을 꿈꾼다. 가장 이상적인 남편과 또는 아내의 상을 만들어 놓고 내 남편이, 내 아내가 그렇지 못하다고 실망하고 힘들어하는 것은 아닌지. 그래서 푸시킨은 삶이 우리를 속일지라도 괴로워하거나 슬퍼하지 말라고 했는지 잠시 생각해 보았다.
푸시킨의 글을 찾아보다 <집시>라는 제목의 시를 읽었다. 문명 세계로부터 도망쳐 나온 알렉코란 남자의 이야기다. 그는 집시처럼 살고 싶었다. 관습과 제약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알렉코는 아름다운 집시 여인 젬피라를 만났다. 둘은 사랑에 빠졌고 행복을 느꼈다. 젬피라는 그에게 집시의 삶을 후회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숨이 막히는 도시에서 빼앗긴 자유, 떼거리로 모여서 서로에게 둘러싸여 신선한 새벽의 공기조차 마실 수 없다. 봄날 초원의 신선한 풀냄새도 맡지 못하는 그들은 사랑조차 부끄러워하고 이상을 박대하는 사람들이다. 바로 자신의 것인 자유를 팔고 있다.” 라고 대답했다. 2년 후 아이도 남겨놓고 젬피라는 젊은 남자와 떠났다. 화가 난 그는 그녀의 아버지를 찾아갔다. 그도 젊은 아내가 다른 남자와 떠난 상태였다. 그는 알랙코에게 여인을 달과 비교하는 이야기로 답했다.
“보게나, 머나먼 창공에서 고삐 풀린 달이 떠다니는 것을. 찬란한 광채를 마음껏 뿜어내면서 모든 자연으로 구름 사이로 슬쩍 얼굴을 내밀고 신비스럽게 되비춰 준다. 이제 그녀는 다른 이에게 가버리고 말았으나 그에게조차 오래 머무르지 않을 것이다. 누가 젊은 아낙의 뜨거운 가슴에 말해줄 것인가. 오직 한 사람만 사랑해야 한다고, 변해서는 안 된다고.”
장인의 철학적 비유를 듣고도 알랙코는 그들을 찾아가 둘을 죽였다.
푸시킨이 더 궁금해졌다. ‘푸시킨은 인간 영혼의 평온과 자유를 노래했고 그의 문학적 성향은 삶의 긍정과 고상한 정신의 지향에 있었다.’고 알려졌다. 그는 시를 통해 종종 우리에게 오는 슬픔과 우울을 담담하게 인내하라고 당부한다. 살면서 만나는 어려움을 넘어설 수 있게 하는 글을 써서 사람들을 위로했기에 그의 글이 지금까지 사랑받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아내와의 사이도 안정적이며 좋은 관계였을까? 푸시킨의 아내 사진을 찾아보았다. 사교계의 꽃으로 불렸고 황제 니콜라이 1세가 그녀를 보기 위해 파티를 열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기 때문이다. 사진 속 푸시킨의 아내는 아침 이슬 머금은 꽃 양귀비를 상상하게 했다. 아니, 녹음 우거진 산자락에서 마주한 보랏빛 아기붓꽃을 보는 듯 청순해 보였다. 그녀를 사랑한 많은 남자 중 프랑스에서 러시아로 망명온 당테스는 그녀와의 염문을 잠재우려 그녀의 언니와 결혼했는데 그 후에도 그녀와 관계를 이어간다고 생각한 푸시킨은 그에게 결투를 신청했다. 상처를 입은 푸시킨은 이틀 후 죽었다. 38세였다.
저녁 늦게 들어온 아들에게 물었다. 단순했다. 집에 들어오면 행복하단다. 아이들과 아내의 밝은 목소리를 들으면 넓은 초원을 마음껏 달리는 말처럼 신이 난다고 했다. 사랑하는 아내로부터는 자신의 습관과 취향을 인정받고 싶다고 했다. 남편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알면서 굳이 고집을 부리는 것에 화가 났단다. 다음 날 아침 차를 한 잔 두고 며느리와 식탁에 앉았다. 단순했다. 남편의 건강을 생각해서 당근을 넣었고 그냥 먹으면 안 되나 하는 마음에 한숨이 나왔단다. 어깨가 내려간 것은 자신도 모른다고 했다.
나도 가끔 남편과 다퉜다. 치약을 가운데 푹 눌러서 짠다고 싫어했다. 여행 가방에 옷가지가 가지런하지 않다고 남편은 불만을 가졌다. 퇴직 후 같이 있는 시간이 많아지면 더 다툴 것이 걱정되었다. 다행히도 그는 살아갈 궁리를 하고 있었다. 그가 먼저 제안했다. 아침만 같이 먹고 저녁에 잘 돌아오면 된단다. 매스컴에서 결혼을 졸업해 보자는 ‘졸혼’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그것도 좋겠다는 이야기도 나눴다. 서로의 자유를 존중해주려 애를 썼다. 내가 남편에 대해 그래도 만족하고 살았다는 생각을 하게 된 이유 중 하나다. 다음 날 밖에서 돌아와 문을 여는 순간 아이들 웃음 속에 아들 내외의 밝은 목소리가 같이 굴렀다.
“미음, 비읍. 그다음은 뭐지?”
며느리가 손녀의 손을 잡고 나무젓가락으로 시옷을 만들고 있었다. 내 눈에만 시옷이 사람 人자로 보이는가 싶어 머리를 흔들며 겉옷을 벗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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