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수필과 비평/수필과비평 본문

[수필과비평 2018년 06월호, 통권200호 I 세상 마주보기] 널 믿는다 - 김정화

신아미디어 2018. 7. 19. 10:20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한 시간여 차를 몰아 선생님을 찾아갔다. 자택 일층에 차린 국제결혼상담소 입구에는 88올림픽 국제심판 때 입었던 붉은 상의가 자랑스레 걸려 있었다. 옆에는 성공한 쉰여섯 쌍의 결혼식 사진이 당당했다. 그 사이로 팔순의 괴짜 선생이 세월을 딛고 나왔다. 여전히 구둣발에 징 소리가 났다. “받들어~~~총.”이라도 외쳐야 할 판이었으나 나는 그만 목이 메여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었다."







   널 믿는다    -    김정화

   새로 온 교련 선생님은 완전히 폼생폼사였다. 날을 세운 백 바지와 체크무늬 더블재킷에 행커치프까지 꽂은 옷맵시는 왁자지껄한 교실을 단번에 평정시켰다. 헌칠한 키에 이국적인 눈매는 소녀들을 설레게도 했지만, 어깨 각을 세우고 징 소리를 내듯 구둣발을 튕길 때면 저절로 군기가 잡혔다. 구릿빛 얼굴에 쓴 검은 선글라스와 하얀 지휘봉은 첫날부터 그의 트레이드마크가 되었다.
   당시 교련은 고교 필수과목이었다. 우리는 학도호국단이라는 이름으로 일주일에 한두 번씩 제식훈련을 했다. 선생님은 교련과 체육 과목을 겸하였고 학생부장까지 맡아 선도부를 지휘했다. 학생들의 흰 체육복 바지에 검정 테이프 세로줄을 붙여 멋을 내게 한 것도 선생님의 아이디어였다. 운동장 수업이 없는 날은 교실에서 이론 공부를 했는데 늘 황당한 이야기로 우리를 폭소하게 만들었다. 프로야구 연봉 순위를 줄줄이 꿰거나 무좀 치료 민간요법을 가르치고 특전사 시절 영웅담을 진지하게 들려주었다. 만약 하품을 하거나 졸기라도 하면 모래 운동장을 맨발로 뛰어야 했다.
   주특기는 불심검문이었다. 요컨대 수상한 물건은 모조리 압수하였다. 내 짝은 남자친구와 나눈 서 푼짜리 반지를 빼앗겼고, 언니 서랍장에서 몰래 가져온 딱분과 립스틱을 고스란히 내놓은 친구도 있다. 호기심 많은 사춘기 소녀들이 이것저것 숨겨와도 선생님의 매서운 눈은 피해가지 못했으며 빼앗겨도 누구 하나 항의하지 않았다. 모두 졸업식 때까지 보관한다고 했는데 나중에 물건을 찾았는지는 알지 못한다.
   선생님의 카리스마는 외모만큼 대단했다. 우리에겐 오로지 복종만을 요구하였다. 교련 연습을 시킬 때 구령 소리는 무장공비를 소탕할 만한 기세라서 전교생이 쩔쩔맸다. 그런데도 장래희망이 교련 선생님이 될 거라는 아이들이 늘어났다. 지금 생각하면 엉뚱하지만 그때는 골치 아픈 과목을 안 가르치고 학생들 앞에서 폼을 잡는 모습이 근사해 보였던 까닭이다.
   학창시절 나는 조용하고 낯가림이 심한 아이였다. 명랑하고 활달한 아이들이 부러웠다. 그런데도 장기자랑 때 노래를 시키면 짐짓 빼다가 온 힘을 다해 부르곤 했다. 열창을 할 때는 양 발가락에 힘이 들어가고 등짝이 눅눅해졌으며 갈비뼈가 탄탄하게 부풀어올랐다. 그때 내 몸속에 열정 같은 게 묻혀 있다고 생각했다. 누가 그것을 조금만 끄집어 내어주면 불씨를 잘 살릴 수 있겠노라 여겼다. 교련 선생님이 내 마음을 읽었을까. 느닷없이 나를 대대장으로 임명했다. 키가 크니 당연히 목소리도 클 거라고 짐작한 것 같았다. 놀라서 얼어붙은 내게 평소와는 달리 나직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널 믿는다.”라는 한마디를 던졌다.
   대대장이란 특명은 소심한 아이를 변화시켰다. 대대장 표시가 있는 계급장을 팔뚝에 차고 군대식 사열과 분열행진을 했는데 “우향 앞으로 갓, 좌향 앞으로 갓, 좌향 좌, 우향 우, 우로 봣, 받들어~총”을 목이 닳도록 외쳐댔다. 처음으로 복식호흡법도 배우고 소리꾼이 기를 모으듯 자를 짚고 리듬을 넣어 목을 감고 꺾었다. 일 년에 한 번 받는 교련 검열이 무사히 끝나고도 학기 동안 교련조회가 이어졌다. 그동안 나는 제법 넉살을 키우고 깡아리도 생겨 친구들과도 곧잘 친해졌다.
   그러던 중 일이 터졌다. 시내에 인기 디제이의 입담이 펼쳐지는 고고장이 유행하였는데 우리 반 희숙이가 그곳에서 열리는 디스코 경연대회에 참가한다고 했다. 희숙이는 지각과 무단결석을 도맡아놓았지만 춤 실력은 최고였다. 소풍날 최신 팝송 리듬에 맡긴 온몸의 율동을 경이롭게 보면서 열정이 몸 밖으로까지 돋은 희숙이야말로 진실로 대대장감이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모두 의기투합했다. 희숙이를 지지하는 응원 부대를 만든 것이다. 그 핑계로 나는 고고장이란 곳에 처음으로 발을 디뎠다. 그날 밤 닭장 같은 고고장에서는 대대장을 하며 살려낸 열정의 불씨가 절반쯤 전소되고 있었다.
   문제는 다음날이었다. 희숙이의 지각이 교련 선생님께 딱 걸리고 말았다. 아무리 배짱이 두둑하여도 호랑이 선생 앞에서는 움츠러드는 법. 고고장 떼출입 명단이 꿰어졌다는 소문이 교련 선생님 발소리보다 먼저 도착했다. “널 믿는다.”는 신망도 무너졌고 대대장으로서 세운 위신도 무효가 될 판이었다. 그날의 일탈자 명단이 한 옥타브 높아진 고성과 함께 차례차례 불려졌다. 우리의 밤 동지들이 죄수가 되어 허공을 젓는 지휘봉을 따라 교무실행을 하는 동안 의아하게도 내 이름만 쏙 빠져 있었다. 나는 얼굴이 화닥거려 고개를 들지 못했다. 자백할 용기도 없었다. 스무 명이나 되는 동지들이 나를 살려주었는지, 교련 선생님이 눈감아주었는지 끝내 알지 못했다. 나는 다시 모범생 자리로 되돌아갔다.
   여고를 졸업한 지 30여 년이 훌쩍 넘는다. 지난해 우연히 신문에 난 결혼상담소 광고를 보게 되었다. 낯익은 이름과 함께 광고주 사진까지 실려 있었다. 예전의 부리부리한 큰 눈은 힘이 풀렸지만 분명히 교련 선생님이었다. 결혼상담소장이라는 생뚱맞은 직업에 웃음부터 터져 나왔다. 파격적인 돈키호테 이미지는 사라지고 상대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며 설득하는 모습이 쉽게 상상되지 않았다.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한 시간여 차를 몰아 선생님을 찾아갔다. 자택 일층에 차린 국제결혼상담소 입구에는 88올림픽 국제심판 때 입었던 붉은 상의가 자랑스레 걸려 있었다. 옆에는 성공한 쉰여섯 쌍의 결혼식 사진이 당당했다. 그 사이로 팔순의 괴짜 선생이 세월을 딛고 나왔다. 여전히 구둣발에 징 소리가 났다. “받들어~~~총.”이라도 외쳐야 할 판이었으나 나는 그만 목이 메여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