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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과비평 2018년 05월호, 통권199호 I 세상 마주보기] 지리산 - 노춘희

신아미디어 2018. 6. 24. 09:15

"바람을 뚫고 천왕봉에 올랐다. 나만이 느끼는 희열에 크게 소리쳤다. 그 소리는 바람에 실려가 어느 계곡에 묻혀버렸지만, 너무 감격스러워 눈물이 났다. 내가 해발 이천 미터 가까이 솟아 있어서 하늘과 더 가까워졌다는 것. 내가 뭔가를 해냈다는 듯 뿌듯했다."







   지리산    -    노춘희

   시끌벅적한 소리에 깜짝 놀라 부지런히 걷던 걸음을 멈추고 소리 나는 쪽으로 쳐다보았다. 거긴 수많은 사람들이 바위에 조롱조롱 매달려 있는 것처럼 보였다. 천왕봉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 얼마나 더 가야 정상이 나올지 몰라 그냥 앞만 보고 뚜벅뚜벅 걷고 있었는데, 천왕봉에 먼저 오른 누군가의 기쁨에 찬 함성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우리 일행은 지리산 천왕봉을 오르기 위해 어제 법계사에서 하룻밤 묵었다. 4시에 일어나서 어두운 새벽에 플래시를 비추면서 낯선 돌길을 나섰다.
   이제 지리산 천왕봉을 올라 벅찬 기쁨을 만끽하려 한다. 가슴이 두근거린다. 얼마나 오르고 싶었던 지리산인가. 벼르고 벼르던 지리산 등산. 어쩌면 이렇게 큰 명산을 내 생애 마지막 등정이라 생각하며 한 발짝씩 오르고 또 오른다. 무척 힘이 들었다. 이처럼 멋진 산을 오르는데 지리산이라는 이름값도 있는데, 이 정도의 고행은 해야 할 것 같다고 자위하면서.
   나의 삶도 등산을 하는 것과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나도 산에 오르는 것처럼 힘겹게 살아오지 않았던가.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듯이 좋은 날만 있었던 건 아니었다. 서로 뜻이 달라 갈등도 많았지. 갈등을 못된 생각으로 해소하려는 마음도 먹은 적이 있었다. 응어리졌던 갈등들은 이제 지리산 계곡 깊숙이 묻어두고 가야겠다.
   천왕봉 오르는 길은 여러 갈래지만 내가 오르는 돌산을 걷다 보면 어느 순간 계단을 오르기도 하고, 편안한 능선일 때는 폭신한 흙길이어서 숨을 고를 수 있다. 아이들이 제 길을 찾아 모두 짝을 이루어 새 둥지를 틀어 떠났고, 지금은 능선을 걷는 것처럼 폭신하다.
   천왕봉에 올라 멋진 일출을 바라볼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하며 오른다. 이제 먼동이 터오는 동녘 하늘은 어느 때보다 하늘이 맑고 초롱초롱한 별들이 금방이라도 쏟아질 듯 반짝였다. 이렇게 많은 별을 가까이에서 본 적이 없었다. 손을 뻗으면 금방 별 하나를 똑 딸 것 같다.
   멋진 일출의 장관을 볼 수 있을 것 같은 설레는 마음 가슴 가득 안고 길을 재촉했다. 정상은 어떻게 생겼을까? 한라산 백록담이나 설악산 대청봉처럼 펀펀하고 널찍할까? 아마 지리산이라는 특성으로 보아 가장 높은 봉우리여서 뾰죽할지도 모르겠다고 온갖 상상을 다 해 본다. 동해 바다에서의 일출은 본 적 있지만 높은 산에서의 일출은 처음이라 어떤 모습으로 나를 맞아줄까? 정성스런 태양이 내 눈앞에 붉게 타오르면, 나는 어떤 소원을 빌까? 우리가족 모두 건강했으면 좋겠다고 빌까? 아니 아니 우리 이웃 모두가 행복하게 해달라고 빌어야겠다. 잔뜩 부푼 기대를 하면서 걷다 보니 이제 플래시는 꺼도 될 정도로 밝아졌다. 올라온 길을 뒤돌아보니 어떻게 올라왔는지 아득하다.
   그 아래로 셀 수 없는 능선과 계곡이 마치 어머니의 열두 폭 치마 주름처럼 펼쳐져있다. 넉넉한 어머니의 치마 주름에 숨겨놓은 사랑처럼, 아름다운 능선에 가려진 신비스런 계곡 구석구석에는 이제 곧 겨울이 오겠지. 눈을 이불처럼 덮은 설산 깊숙한 곳에 만물을 생장시키려는 봄을 준비하고 있을 것이다.
   지리산은 작은 풀꽃에서부터 다양한 수종이 어우러져 숲을 이룬다. 반달가슴곰을 비롯하여 크고 작은 동물과 곤충 등 셀 수 없는 생명을 키워내는 명산이다. 커다란 기암과 작은 돌멩이, 길가에 풀 한 포기, 바람 한 점까지 어느 것 하나도 거부하지 않고 모두 안아 키우는 어머니 같은 산이다.
   명산을 오르며 어머니를 생각했다. 어머니는 지리산만큼이나 큰 사랑을 베풀어 주었다. 아버지 안 계신 오남매를 사랑한다는 말은 치마폭 주름에 감싸놓고 오직 ‘아비 없는 후레자식’이란 소리 듣지 않도록 엄하게만 키웠다. 이렇게 내가 어머니의 나이가 되고 보니 사랑한다는 말은 하지 않아도 마음 속 깊이 간직한 사랑을 온몸으로 가르쳤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나는 오늘 나를 돌아본다. 나는 내 자식들을 열두 폭으로 감쌀 수 있는 넉넉한 치마폭을 지니고 있는지, 그 주름 사이에 깊은 사랑을 간직해 놓았는지.
   이마에 흥건한 땀방울을 씻으며 한참을 오르는데 이게 웬일인가. 지리산의 날씨는 변덕스럽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런데 갑자기 바람을 동반한 검은 구름이 하늘을 덮더니 빗방울을 후두둑 뿌린다. 시월 하순이라 우의도 준비되지 않은 우리는 걱정스러웠지만 방법이 없다. 비가 오면 비를 맞고 눈이 오면 눈을 맞을 수밖에 없다.
   바로 그때, 나는 난생처음 본 신기한 장면에 내 눈을 의심하였다. 산을 등지고 한동안 정신을 놓고 바라보았다. 왼쪽에서 바람을 타고 오는 구름뭉치들이 바로 내가 서 있는 내 눈앞으로 늦가을 태풍을 타고 날아와 오른 쪽에 있는 산의 능선을 넘지 않고 계곡으로, 마치 블랙홀로 빨려들어가는 듯했다. 이 광경을 한동안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바람에 떠밀려 나도 저 블랙홀로 빠져들 것 같았다. 머리가 쭈뼛거리며 두려웠다. 갑자기 어지럼증을 느꼈다. 나도 모르게 저 블랙홀로 빨려 들어가는 듯했다. 혹시 내 마음 주머니 깊이 묻어 둔 가시는 없었는지. 가족, 친구, 주변인 등, 누군가 나의 가시에 찔린 상처가 있었다면 어쩌지? 내 머리 속은 복잡했다. 나도 모르게 두 손을 모았다. 잠시 꿈을 꾼 듯, 감았던 눈을 떴을 때는 먹구름은 지나가고 엷은 구름에 작은 빗방울을 살짝 뿌리며 흩어지고 있었다. 참으로 변화무쌍하고 신령스러운 산이라고 생각하며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길을 재촉했다.
   바람을 뚫고 천왕봉에 올랐다. 나만이 느끼는 희열에 크게 소리쳤다. 그 소리는 바람에 실려가 어느 계곡에 묻혀버렸지만, 너무 감격스러워 눈물이 났다. 내가 해발 이천 미터 가까이 솟아 있어서 하늘과 더 가까워졌다는 것. 내가 뭔가를 해냈다는 듯 뿌듯했다.
   천왕봉은 백록담이나 대청봉처럼 널찍하지 않아서 많은 사람들이 오래 머물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 태풍이 너무 거세게 불어서 천왕봉天王峯 팻말에 매달리 듯 인증 사진을 찍고 내려올 수밖에 없었다. 멋진 일출을 기대 하였지만, 황홀한 일출을 볼 수 없어 무척 아쉬웠다. 그러나 나는 천왕봉을 올랐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내려오는 길은 마치 어미닭이 병아리를 품듯이, 태풍을 지리산이 막아서 품어 주었다. 태풍이 언제 불었느냐는 듯, 말간 하늘은 후다닥 지나가는 빗물에 세수한 것처럼 밝고 따스한 가을 햇살이 환하게 웃으며 길 안내를 맡았다. 올라갈 때 보지 못했던 계단 밑에 핀 노란 꽃 한 송이가 조심해서 가라고 배시시 웃으며 인사하듯 소슬바람에 나부끼고 있다.
   천왕봉에서는 여전히 많은 사람들의 감격스런 외침을 뒤로하고 내려오는 발걸음이 가볍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