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튿날 문경새재 ‘과거길’을 걸었다. 수많은 사람들의 애환이 서려있는 길을 걷노라니 우리의 우정도 한층 깊어갔다. 빙 돌아 흐르는 도래샘처럼 우리도 인생 반바퀴를 돌아 만났다. 앞으로 서로 격려하면서 자신들이 원하는 인생길을 즐거운 마음으로 걸어가길 마음으로 빌어보았다."
도래샘의 꿈 - 이경순
점촌역에 내리자 명미가 환하게 웃으며 우리를 맞이했다. 밤하늘의 둥근달도 멀리서 온 우리를 반기는 둣 밝게 빛났다.
40여 년 전 여고친구 다섯 명이 모여 ‘도래샘’이란 독서모임을 만들었다. 매달 모여서 토론을 하고 가끔은 교외 나들이도 하면서 20대 초반을 공유하였다. 도래샘이라 새긴 금반지를 손가락에 낄 때는 모임이 영원할 줄 알았는데 결혼을 하면서 점점 멀어지고 말았다.
아내로, 며느리로, 엄마로 살아가느라 마음의 여유가 없었던지 손자를 볼 나이가 되어서야 도래샘 친구들 모두에게 연락이 닿았다.
얼마 전 부산 친구로부터 ‘도래샘 독서기록장’을 찾았다는 전화를 받았다. 우리들은 아주 귀한 보물을 찾은 것처럼 기뻐했다. 친구들은 즉석에서 명미가 사는 점촌에서 모두 만나자는 약속을 하였다. 한 친구는 직장에 휴가를 내고, 다른 친구들도 일정을 조정했다.
각자 사는 곳에서 탑승한 점촌행 열차 객실에서 도래샘 친구를 드디어 만났다.
“반갑다, 친구야!”
“니는 하나도 안 변했네, 옛날 그대로다야!”
우리는 추억상자를 열고 여고시절로 돌아갔다. 우리들에겐 가정형편상 인문고로 갈 수 없었던 비슷한 아픔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기죽어 있는 제자들에게 한 학기 내내 꿈을 갖고 공부하라셨던 윤리선생님 생각도 났다. 여고동창들의 수다로 웃음꽃이 피는 사이 기차는 점촌역에 도착했다.
우리는 당초 계획대로 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펜션으로 가겠다며 손사래를 쳤지만, 명미는 저녁을 준비해 놓았다며 기어코 집으로 안내를 했다.
솜씨 좋은 시어머님께 전수받은 점촌식 식단으로 맛있는 저녁을 먹었다. 식사 후 친구는 안방에다 짐을 풀도록 했다. 그녀의 남편은 편하게 지내라며 작은방으로 들어갔다.
자리에 앉자 부산 친구가 가방에서 오래된 독서노트를 꺼냈다. 궁금함이 가득한 눈길들이 초록색 표지의 노트로 향했다. 노트의 첫 페이지에는 ‘청춘의 꿈’이라는 제목으로 시작되었다. 꿈을 위해 최선을 다하자고 다짐하는 내용이었다. 이어지는 글들을 읽으며 진지하게 사색한 흔적들이 오히려 낯설게 여겨졌다. 우리도 이런 시절이 있었다니!
이어서 친구들의 살아온 이야기가 펼쳐졌다. 기능직에서 늦은 나이에 행정직이 되기까지 앞만 보고 달린 세월, 신혼 때부터 시댁과의 갈등으로 힘들어 하다가 결국은 헤어질 수밖에 없었던 사연, 시부모 봉양하느라 몸도 마음도 힘들었던 시간 등. 그때 좀 더 현명했더라면 하는 후회와 아쉬움을 토로하기도 했다. 삶의 희로애락을 풀어내느라 겨울밤은 깊어갔다.
꿈을 이루기엔 우리에게 주어진 현실이 녹록지 않았기 때문일까? 그녀들도 나처럼 선생님이 되고 싶어 했는데 ‘청춘의 꿈’을 이룬 친구는 없었다. 꿈을 이루지 못해 아쉬운 마음이 드는 것은, 현실만이 아니라 꿈에 대한 열정을 쉽게 놓아버렸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독서노트를 보면서 잊고 살았던 우리의 꿈 하나를 다시 찾은 듯했다.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살고 싶은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사서 자격증을 가지고 있는 친구는 정년을 하면 도서관에서 봉사하는 일을, 합창단에서 활동하는 친구는 노래봉사를, 성당에 다니는 친구도 봉사하며 살고 싶다고 하였다. 한 친구는 마음을 비우고 아름답게 살고 싶다고 했다. 나도 학교상담사로 정년을 하면 상담봉사를 하려고 한다. 친구란 오랜 세월이 흘러도 비슷하게 닮아가나 보다.
이튿날 문경새재 ‘과거길’을 걸었다. 수많은 사람들의 애환이 서려있는 길을 걷노라니 우리의 우정도 한층 깊어갔다. 빙 돌아 흐르는 도래샘처럼 우리도 인생 반바퀴를 돌아 만났다. 앞으로 서로 격려하면서 자신들이 원하는 인생길을 즐거운 마음으로 걸어가길 마음으로 빌어보았다.
추억을 사진 속에 담고, 문경새재에서 점심을 먹었다. 분홍빛 오미자 동동주는 마시지 않고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고운 빛에 취하는 듯했다. 우리의 꿈이 이루어져 오미자 빛깔처럼 곱게 물든 노년이 되길 바라며 점촌역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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