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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과비평 2018년 03월호, 통권197호 I 세상마주보기] 일기, 사유의 뜰을 일구다 - 김순자

신아미디어 2018. 5. 10. 08:31

"내 생애 가장 힘들었던 시기, 처진 어깨를 감싸주고 아픔을 치유해주고 ‘영혼과의 대화’에 오작교 역할을 충실히 해낸 일기장! 척박하기만 했던 내 사유의 뜰을 비옥하게 일구어 준 일기장에게 새삼 감사의 인사를 건네고 싶다."






   일기, 사유의 뜰을 일구다    -    김순자

   허접스러운 세간살이가 장기 투숙하고 있는 모서리 방에 모처럼 청소바람이 불었다. 오랜 세월 빈방을 지키며 긴 잠에 빠져 있던 종이 상자들이 눈에 들어왔다. 어떤 물건들이 들어 있을까? 그중 하나를 열어 보았다. 누렇게 빛바랜 옛날 상장이며 졸업장, 졸업앨범들의 행색이 꾀죄죄했다. 다른 상자에는 직장생활 할 때의 흔적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표창장이며 임명장, 우표 수집 책 그리고 연도별로 차곡차곡 묶어놓은 월급봉투도 얌전히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감회가 새로웠다. 마지막 상자에는 36년 전에 쓴 일기장이 묵언 수행하는 수도승처럼 입을 굳게 닫고 있었다. 너무 오래되어 주인 얼굴 기억이나 할까. 묵은 먼지로 분칠한 일기장은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첫 장을 열었다. ‘영혼과의 대화’라 적혀 있었다. 빛바랜 일기장 속에서 36년 전 새파란 시절의 또 다른 나와 조우하는 순간이었다.
   ‘천국에 계신 아빠에게’라는 제목으로 매일 매일 편지글을 써 내려갔다.
   감당하지 못할 무게의 누름돌이 가슴을 옥죄고 있는데도 그 슬픔을 풀어낼 마땅한 시공간을 갖지 못했다. 눈앞에는 가족의 생계가 먼저 고개를 쳐들고 다가와 있었다. 둥지 속 제비 새끼들처럼 엄마 곁을 떠날 줄 모르는 아이들 눈치보느라 울고 싶을 때 맘 놓고 울지 못했다. 그때 순간순간 목울대로 치솟는 목울음을 삼키지 않고, 쏟아낼 수 있는 유일한 상대가 일기장이었다.
   하늘이 순식간에 무너져 내린 날! 컴퓨터의 하드웨어, 소프트웨어 모든 기능이 불시에 멈춰버린 것처럼, 내 육체와 정신을 주관하는 사령탑, 나의 뇌도 백지상태로 텅 빈 것일까,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멍한 상태로 일주일이 지나고, 이대로 있다가는 제정신을 잃을 수도 있겠다는 섬뜩한 생각이 드는 순간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스스로 돌파구를 찾아야 했다. 누군가에게 말을 걸어 이 슬픔 덩어리를 토해내지 않고는 못 배길 것 같았다. 나 아닌 세상 모두는 아무 일 없다는 듯 평온해 보이는 밤이 찾아왔다. 적막과 공허만이 가득한 공간, 내 옆에 있어야 할 그이 대신 노트 한 권이 놓여 있었다. 하얀 백지는 무슨 색깔이든 다 받아줄 것 같았다. 서러운 눈물도 깊은 한숨도 못다 한 이야기들도 모두 흡수해서 천국에 있는 그이에게 그대로 전해줄 것만 같았다.
   세월이 약이라 했던가! 밤마다 일기와 대화하며 차츰 슬픔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냉혹한 현실을 직시하게 되었다. 운명은 왜 나에게만 이런 혹독한 벌을 내린 걸까, 하늘을 원망하기도 했다. 하지만 슬픔이나 원망이라는 감정은 내 안에서 스스로 일으킨 파도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람이 잦아들면 그 물결 또한 잔잔해지지 않을까. 스스로 치유해야 하는 아픔이라는 걸 수긍하기 시작했다.
   진한 슬픔의 바다에 빠져보지 못한 인생은 고통의 산물인 진주의 가치를 이해하지 못하리라. 눈물이 고이지 않은 눈으로는 무지개를 볼 수 없듯이….
   일기장에 펼쳐진 사유의 공간에서 삶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조금씩 터득해 갔다. 살 속을 파고드는 한여름의 따가운 햇볕도, 세찬 비바람의 매질도 견뎌내야 탐스런 과육으로 열매가 여물어 가듯, 인생길에도 예고되지 않은 시련과 고통이 굽이굽이 복병처럼 숨어 있다는 것을…. 우리네 인생길은 원래 파도와 함께 가야 할 고통의 바다, 고해라 하지 않던가! 그래도 살다보면 더러는 행복도 기쁨도 희망도 선물처럼 주어지니 덤이 얹어진 셈. 희로애락의 무늬가 씨줄 날줄로 곱게 직조되어 멋진 필목으로 완성되는 과정이 우리의 삶이라 생각하면, 굴곡진 삶의 무늬가 민무늬 천보다 훨씬 더 탄탄하고 무게 있어 보이지 않을까.
   아이들 아빠가 먼 길 떠나시기 몇 달 전 일이었다. 17년이라는 긴 세월을 몸 담아온 작장인데 갑자기 그만두라 했다. 뜬금없는 제안에 조금은 당혹스러웠지만 가장의 말에 순종하기로 했다. 이제, 일 그만하고 아이들이나 돌보며 편히 지내라는 그이의 진심을 고맙게 받아들였다. 그러나 운명이 이리 바뀔 줄  상상이나 했을까. 당장 살아갈 길이 막막했다. 고등학교 졸업 후 이듬해 공무원시험에 합격해 줄곧 공직에서만 있다 보니 바깥세상에는 어두웠다.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절망에 빠져 있을 때, 다행히도 전 직장 상사께서 복직의 기회를 주셨다. 퇴직한 지 일 년 만에 다시 공직에 몸을 담게 되었고 덕분에 세 자녀의 교육비도 전액 지원받을 수 있었다. 직장과 집을 오가며 정신없이 살다보니 슬픔에 젖어볼 여유도, 외로움을 느낄 겨를도 없이 보낸 젊은 시절이었다.
   삶이 고달파져서일까, 천국으로 부친 편지가 공중분해 되어 주인을 찾아가지 못한 탓일까, 5년 동안 지속되다가 끝내는 대화의 끈을 놓아버렸다.
   ‘영혼과의 대화’는 일방통행식 외로운 독백이었다. 화답 없는 메아리처럼, 허공에 흩어지는 구름조각처럼. 하지만 일기장 속에 토해낸 진솔한 언어들은 후일 글쓰기 공부의 밑거름이 되지 않았나 생각된다.
   일기장 두께만큼 세월도 쌓이고, 흘러간 시간만큼 슬픔도 사위어 갔다. 스치는 바람결에 눈물 자국도 지워져 갔으리. 유일하게 나의 버팀목이 되어준 아이들도 성장하여 부모가 되었으니 세월은 유수 같고 인생은 무상이라는 말이 절절히 느껴지는 요즘이다. 
   내 생애 가장 힘들었던 시기, 처진 어깨를 감싸주고 아픔을 치유해주고 ‘영혼과의 대화’에 오작교 역할을 충실히 해낸 일기장!
   척박하기만 했던 내 사유의 뜰을 비옥하게 일구어 준 일기장에게 새삼 감사의 인사를 건네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