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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과비평 2018년 03월호, 통권197호 I 사색의 창] 단물 빠진 껌 - 이부열

신아미디어 2018. 4. 24. 08:22

"하물며 인생살이가 이렇거늘 하찮은 껌을 미련 없이 버리는 것쯤 무슨 문제가 될까마는 공공장소 곳곳에 널브러진 껌의 쓰레기가 가슴을 아프게 한다."






   단물 빠진 껌    -    이부열

   껌을 씹을 때마다 토사구팽兎死狗烹이란 고사성어가 떠오른다. 토끼 사냥이 끝나면 사냥개를 삶아 먹는다는 중국 사마천의 ≪사기≫에 나오는 고사로, 필요가 없어지면 버린다는 뜻에 비유한 말이다. 
   껌은 삼키지 않고 씹음으로써 풍미와 식감을 즐기는 기호품이다. 6·25 전쟁 때 미군들이 던져주던 츄잉껌이 상용화 되면서 우리나라 껌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배고팠던 시절 씹어도 허기만 지던 껌에 대한 쓰라린 추억과 껌팔이의 애환이 서린 가난의 역사를 우리는 쉽게 잊을 수 없다.
   껌은 전쟁터에서 군사들의 잠을 쫓고, 긴장 완화와 무료를 달래기 위해 애용되었던 군수품이기도 했다. 2차 대전 때까지 추잉 껌이나 풍선껌은 미국에서만 생산되었고 미군들에 의해 전 세계에 전파되었다. 2차 대전 중 미군 한 명이 1년에 3천 개의 껌을 씹었다는 통계가 있는 걸 보면 미군들의 껌 애용도를 가히 짐작할 만한 것이다.
   우리는 이제 ‘껌’ 하면 롯데 재벌 신격호 회장을 떠올린다. 신 회장은 울산 출신으로 19세의 젊은 나이에 맨손으로 일본으로 건너가 세계적인 기업가로 성공한 분이다. 신문과 우유배달을 시작으로 고물상 아르바이트, 비누제조 판매 등으로 실패와 성공을 거듭하다가 껌을 만들어 판매하면서 성공의 계기를 마련한 것이다. 당시 일본의 신도시 신주쿠의 허허벌판에 종업원 10여 명으로 껌 생산 공장을 차린 것이 주식회사 롯데가 탄생한 시발이라 했다. 롯데라는 명칭은 괴테의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 나오는 여자 주인공 이름인데 신 회장이 그 많은 이름 가운데 하필 ‘롯데’를 제품 이름으로 채택했는지 궁금증을 갖게 한다. 젊었던 시절 한때 문학 소년이었다던 신 회장이 불멸의 고전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탐독하고 감동하여 선택한 이름일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소설의 영향으로 많은 유럽 청년들이 베르테르를 모방하여 자살했다고 하니 그 열풍의 강도를 짐작할 만하지만 베르테르의 효과라는 의학 용어까지 생겨 오늘에 이르고 있다. 신 회장은 롯데 그룹이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공하자 어느 날 ‘롯데’라는 이름은 내 일생일대의 최대 수확이자 최고의 선택이었다며 흡족해 했다고 전해진다.
   껌 사업을 시작으로 제과업을 육성 번창시켜 재벌기업의 신화를 창조한 롯데는 오늘날 한국 재계 5위로 91개의 계열사와 80조 원의 매출을 올리는 대기업이다.
   껌은 전 세계인들의 기호품이지만 싱가포르에서는 예외이다. 길거리와 버스, 열차 등에 무차별로 버려진 껌을 제거하기에 골치를 앓던 싱가포르 정부는 1992년에 껌의 수입과 제조, 판매를 금지시켰다. 이 나라에서는 씹던 껌을 공공장소에 버리면 미화 350달러의 벌금을 물리고, 불법으로 껌을 팔다 적발되면 미화 2000달러, 껌을 밀반입하다 걸리면 1만 달러의 벌금을 물린다고 한다. 
   껌 찌꺼기 처리문제로 골치를 앓는 나라가 날로 늘어가는 추세다. 최근 영국의 일부 지역에서는 껌에 특별소비세를 부과하여 그 돈으로 길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껌 딱지를 제거하는 청소부 인건비로 쓴다고 한다. 독일에서는 껌 찌꺼기 제거하는 데 연간 9억 유로의 비용이 들어간다며 이를 길바닥에 버리는 사람에게 벌금을 물리는 법을 만들자는 여론이 일고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20여 년 전, 껌이나 휴지, 담배꽁초를 함부로 버리거나 침을 뱉는 행위에 대해서 벌금을 부과하도록 하는 경범죄 처벌법을 제정한 바 있으나 현재 있으나마나 한 법이 되었다. 사람들이 걸어다니는 길이라면 어디를 가나 껌의 얼룩으로 더럽혀진 도로, 특히 아스팔트로 잘 포장된 인도나 교량 바닥에 뱉어낸 껌으로 모자이크된 흉한 얼룩무늬에는 행인들의 곱지 않은 눈총이 쏟아진다.
   나는 나이가 들어서도 껌을 씹는 습관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장거리 운전을 할 경우, 잠을 쫓고 무료를 달래기 위해 껌을 씹기도 하지만 식사 후에도 입 냄새를 없애기 위해 껌을 씹을 때가 있다. 단물이 빠진 껌은 계속 씹을 가치가 없어 뱉어내기 마련이지만 입에 달면 삼키고 쓰면 뱉어내는 것이 인간의 속성이다. 노화된 기계나, 유효기간이 지난 음식물도 결국엔 버려지지만 이용 가치가 없어지면 사람도 단물 빠진 껌의 신세, 토사구팽이 되기 십상이다. 
   세상이 각박해지고, 윤리도덕이나 의리가 이기주의의 무덤이 된 요즘 껌의 신세가 되고 있는 인간 군상들이 늘어나고 있다. 배가 고파 “Give me chewing gum, chocolate”을 외치며 미군들에게 매달리던 어제의 한국은 이제 미국을 단물 빠진 껌으로 취급하려는 것은 아닌지.
   하물며 인생살이가 이렇거늘 하찮은 껌을 미련 없이 버리는 것쯤 무슨 문제가 될까마는 공공장소 곳곳에 널브러진 껌의 쓰레기가 가슴을 아프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