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아, 시험에 합격하여 미래에 효도한다는 생각은 하지 않아도 된다. 미래는 너희들의 세계다. 너희 부부는 손녀손자로 하여금 우리 부부에게 더할 나위 없는 행복을 주고 있다. 그것으로 족하다. 아빠 엄마는 보통사람이다."
보통 사람의 행복 - 최동명
300명 이상의 단원들로 구성된 성가대가 열창한다. 세계에서 가장 웅대한 <할렐루야>를 금년 크리스마스 선물이라고 지인이 동영상을 보내주었다. 지휘자의 스마트한 몸놀림이 멋들어져 보인다. 성가대원들은 축복받은 삶을 살고 있는지 모두들 잘생긴 용모에 희열과 감동이 넘쳐나는 목소리로 장내를 압도하고 있었다.
하지만 내게는 일사불란하고 장엄한 분위기가 누구를 열렬히 환영하는 모습이 연상되어 선뜻 마음에 와 닿지 않는다. 그보다는 크리스마스를 축하한다고 큰며느리가 사다 꽂아놓은 국화송이의 향기와 기품에 더 만족을 느낀다. 크리스마스 전날 밤에 우리가 많이 들었던 성가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은 200년 전 오스트리아의 작은 마을의 성당에서 처음 불렀다고 한다. 한밤중 눈 덮인 작은 마을의 아름다운 풍경을 상상하고 행복해하니 나는 어쩔 수 없는 보통사람인가 보다.
기쁜 날일수록 더 생각나는 막내동생이 있다. 학창시절 우울증으로 의과대학을 중퇴하고 혼자 외롭게 살아가고 있다. 장애아를 둔 부모의 소망은 죽을 때 그 장애아와 함께 죽는 것이라는 말이 있다. 아버지가 돌아가실 무렵 어머니는 막내 앞으로 재산을 주라는 유언을 쓰라고 아버지를 다그치셨다. 하지만 아버지는 눈 오는 겨울밤에 무심히 우리 곁을 떠나셨다. 그 후 어머니는 아들을 불러 막내에게 전답을 주라고 했지만 아들딸 세명이 유류분의 1/n을 주장하며 거부하였다. 메르스 사태가 한창일 때 어머니는 대학병원 중환자실에서도 막내 문제를 걱정하셨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시골 전답은 아직까지 상속이 이루어지지 않고 동네 사람에게 임대하고 있다.
아내는 추석이 다가올 무렵 삼촌 아파트 대청소를 해주자고 제안했다, 추석 전날 우리 내외와 아들 둘이 가서 동생의 방을 청소했다. 혼자 사는 방이라 지저분했지만 열심히 청소한 결과 모든 살림살이 도구들이 새것처럼 반짝반짝 빛이 났다. 추석날은 막내 동생과 우리 가족이 함께 여수에 가서 하루를 즐기다 왔다. 동생은 흐뭇해하였지만 동생의 외로움이 아픔으로 느껴졌다.
이번 크리스마스 때 집안의 작은 평화를 회복하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혼자 사는 동생의 입장에서 쓴 시와 배우자와 자식도 없는 동생의 외로운 심정을 글로 써서 카톡으로 형제들에게 보냈다. 내가 쓴 글이었지만 내가 먼저 울었다. 하루가 채 지나지 않아 모두들 1/n 상속을 포기하고 막내동생한테 재산을 몰아준다는 글이 올라왔다. 저승에서 어머니가 활짝 웃고 계신 느낌이 들었다. 이 또한 글쓰기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았던 보통사람의 작은 결실이고 행복이었다.
12월 29일은 공립중등교사 임용필기시험 합격자 발표날이다. 아들이 내 방에 들어오며 낙방 소식을 알렸다. 기대가 어긋나 몸이 후줄근해진 느낌이었다. 아빠를 따라 들어온 세 살배기 손녀가 인조 꽃 뭉치를 양손에 들고 소리를 지르며 춤을 춘다. 손녀가 떠드는 소리 외에 한동안 모두들 말이 없다. 또다시 시간강사와 방과 후 수업을 해야 하는 아들이 안쓰럽다.
아들은 군에서 장교로 있으면서 대학 4학년에 재학 중인 며느리와 결혼하고 제대 후 3번째 도전했으나 또 낙방이다. 내가 일반병으로 군 생활을 하면서 느꼈던 비인격적이고 모멸적인 군 생활 경험을 되새기며 아들 둘을 학사장교로 보냈다. 미래의 인생은 긴 세월이니 장교정신으로 살아가라는 뜻이 담겨 있었다.
아들 내외와 손녀손자는 장호원 사부인이 불러서 모두 가고 나와 아내만 덩그러니 남았다. 아들 가족이 떠난 이튿날 아침은 너무 적막했다. 잠이 깬 손녀가 할머니 방으로 쪼르르 달려와 할머니와 도란도란 이야기하다가 마음에 안 들면 고함을 지르는 소리가 없다. 얼마 후 손자가 할머니 품에 안겨 오면서 “하빠, 대웅이표 엔돌핀 왔어요”아침 인사를 하는 모습도 보이지 않는다. 나는 젊었을 때 애들이 일어나기 전에 출근하고 밤 열 시가 넘어 퇴근하느라 애들 자라는 모습을 기억할 수 없다. 정말 소중하고 중요한 것은 눈에 잘 보이지 않는다고 했던가. 할아버지가 되어서야 여유와 사랑으로 손녀손자의 재롱을 보니 애를 키우는 행복이 비로소 느껴진다.
이제 곧 봄이 오면 우리 집에도 사람 벚꽃이 돌아다닌다. 뽀얗고 늘씬한 벚꽃이 작은 벚꽃 가지를 잡고서 걸어가면 그 뒤를 새로 생긴 조그만 벚꽃이 엉금엉금 따라다닐 것이다.
미세먼지가 없는 따스한 봄날 우리 가족 모두가 비어있는 시골집에 놀러 가고 싶다. 화단에는 여러 종류의 꽃들이 있다. 흐드러지게 핀 노란 개나리 가지를 입에 물고 봄빛처럼 화사하게 웃는 손녀손자들의 사진을 찍고 싶다. 그 순간이 영원하도록
아들아, 시험에 합격하여 미래에 효도한다는 생각은 하지 않아도 된다. 미래는 너희들의 세계다. 너희 부부는 손녀손자로 하여금 우리 부부에게 더할 나위 없는 행복을 주고 있다. 그것으로 족하다. 아빠 엄마는 보통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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