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수필과 비평/수필과비평 신인상 수상작

[수필과비평 2018년 4월호, 제198호 신인상 수상작] 은비녀 - 이미경

신아미디어 2018. 4. 3. 08:53

"이런저런 우리 할머니 추억에 잠겨 있어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도 몰랐다. 버스는 연반이라는 작은 시골마을까지 왔다. 앞좌석 할머니는 지팡이를 짚으면서 아주 천천히 버스에서 내렸다. 모내기를 막 끝낸 연둣빛 논이 할머니를 맞이해 주었다. 논둑길을 따라 할머니의 은비녀는 내 시야에서 점점 멀어져 갔다. 우리 할머니의 은비녀는 어디에 있는지 궁금하다. 할머니 몸의 일부와도 같았던 은비녀를 챙겨놓지 못한 것이 아쉽기만 하다. 단정하게 쪽 찐 할머니의 모습을 가만히 그려본다."





   은비녀   -   이미경


   천 원짜리 군내 마을버스는 출발을 기다리고 있다. 장날이 아닌 일요일이라 그런지 승객은 우리 부부와 여중생 한 명, 그리고 머리가 하얀 할아버지 한 분 이렇게 네 명이 전부다.
   운전기사가 “곧 출발합니다. 차비 주세요.”라며 차비를 걷으러 다닌다. 이때, 흰 머리에 꼬부랑 할머니가 지팡이를 짚고 차에 올랐다. 차비를 하려고 미리 꺼내놓은 천 원짜리 지폐 한 장을 손에 꼭 쥐고 내 앞좌석에 힘들게 앉았다.
   그때, 내 눈을 반짝하게 하는 것이 있었다. 할머니 머리에 꽂혀 있는 은비녀다. 곱게 빗어서 쪽 찐 낭자머리에 꽂혀 있다. 은비녀는 돌아가신 우리 할머니를 뵌 듯 내 가슴을 뛰게 했다. 하마터면 “할머니!” 하고 부를 뻔했다. 머리숱이 많지 않아 똬리는 조그마했지만, 반듯하게 끼워져 있다. 우리 할머니의 뒷모습과 똑같다.
   할머니는 볼품없고 낡은 동그란 거울 앞에 앉기를 좋아했다. 동백기름을 머리에 바르고 참빗으로 곱게 빗었다. 그런 다음 똬리를 만들고 흡족한 표정으로 은색 비녀를 꽂았다.
   은비녀는 할머니의 유일한 장식품이었다. 그리고 수십 년 동안 할머니의 머리를 장식했으니 몸의 일부와도 같았다.
   우리 할머니는 너무 순하다고 이름이 정순애다. 이름처럼 순하기도 하고 맵시도 고왔다. 할머니의 큰 목소리를 들어 본 적이 없다. 여름이면 손수 만든 하얀 모시 저고리를 풀 먹여 다려서 입었다. 할머니는 하늘나라 가실 때도 순하고 고왔다. 아파서 며칠 누워 있다가 자식들은 물론, 손자손녀들까지 임종을 보게 하였다. 마지막 모습은 모든 것을 놓아버린 듯 편히 주무시는 것 같았다.
   그때 내 나이 스무 살, 첫 월급으로 할머니께 살구꽃 무늬가 있는 봄 내의를 사드렸다. 빨간색 겨울 내의만 입다가 봄에 입는 내의는 처음이어서 인지, 할머니는 장롱 안에 넣어 두고 아끼느라 입지 않았다. 돌아가시기 며칠 전 아파서 누워 계신 중에도 처음으로 입혀 달라 하였다. 임종하던 날, 할머니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막내가 사준 것 오줌 묻을 수 있으니 벗겨서 내 관에 넣어 주라!”
   그리고 마지막 소변을 보기 위해 몸을 일으켜 요강에 앉혀 달라 하였다.

   할머니에 대한 추억은 참으로 많다. 초등학교 일학년 때, 내 오른팔이 부러져서 깁스를 했다. 나는 이 일을 핑계 삼아 온갖 응석을 다 부렸다.
   “할머니, 맛난 것 없어요?” 하면서 특히 반찬 투정을 많이 했다. 할머니는 십여 리 떨어진 읍내 시장에서 갈치를 사왔다. 소금을 뿌린 후 볏짚으로 엮어 처마 밑에 매달아 놓았다. 쳐다보기만 해도 군침이 나왔다. 그중 한 토막을 꺼내 숯불에 노릇노릇하게 구웠다. 젓가락으로 갈치의 살만 발라 밥숟갈 위에 올리고 “많이 묵어야 빨리 뼈가 붙제!” 하면서 먹여주었다.
   내가 야단맞을 일이 있어 아버지로부터 회초리를 맞는 밤에는 “애비야, 그만해라.” 하고 나의 구세주가 되어 주었다. 할머니도 나와 같이 아파했을 것이다. 추운 겨울에 썰매를 타다 꽁꽁 얼어버린 손과 발을 따뜻한 아랫목 이불 속으로 넣어주었다. 아랫목의 따뜻함과 할머니의 깊은 정은 내 마음까지도 녹여주었다. 아직까지도 할머니의 온기가 내 안에 살아있다.
   할머니는 내가 하얀 고무신을 닦아 놓으면 좋아했다. 할머니의 이런 모습이 좋아서 거의 매일 고무신을 닦아 놓았다. 특히 장날이 되면 더 깨끗하게 닦았다. 장에 가신 할머니는 머리에 보따리를 이고 돌아왔다. 보따리 안에는 멸치, 미역, 고등어 등 맛난 것이 많았다. 그중에서도 ‘십리과자’ 일명 ‘오다마’는 고무신 닦은 것의 충분한 보상이 되었다. 나는 달콤한 사탕을 입 안에서 이리저리 굴리며 십 리를 가듯 오랫동안 먹었다.
   이렇듯 정겹고 따뜻한 할머니는 안타깝게도 이가 거의 다 빠지고 한두개만 남아 있었다. 그래서 좋아하는 옥수수를 먹지 못해 말린 옥수수로 튀밥을 만들어 간식으로 먹었다. 나는 어린 탓에 할머니의 이런 사정을 헤아리지 못했고, 삶은 옥수수를 밤마다 많이 먹었다. 옆에 앉아 바라보던 할머니의 마음이 어땠을까? 부럽기도 하고 얄밉기도 했을 것 같다. 어른이 된 지금에서야 노점상에서 파는 옥수수 튀밥을 보면 할머니에게 미안하기만 하다.
   이런저런 우리 할머니 추억에 잠겨 있어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도 몰랐다. 버스는 연반이라는 작은 시골마을까지 왔다. 앞좌석 할머니는 지팡이를 짚으면서 아주 천천히 버스에서 내렸다. 모내기를 막 끝낸 연둣빛 논이 할머니를 맞이해 주었다. 논둑길을 따라 할머니의 은비녀는 내 시야에서 점점 멀어져 갔다.
   우리 할머니의 은비녀는 어디에 있는지 궁금하다. 할머니 몸의 일부와도 같았던 은비녀를 챙겨놓지 못한 것이 아쉽기만 하다. 단정하게 쪽 찐 할머니의 모습을 가만히 그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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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경  ---------------------------------------------
   전남 영암 출생, 전 한국은행 근무.

 


당선소감


   3월이다. 봄을 시작하는 달이지만, 겨울의 시샘으로 몹시 힘들어한다. 계절의 변화에 민감한 나도 몸과 마음이 힘들었다.
   봄을 앓고 있을 때 나의 글이 당선되었다는 전화를 받았다. 가슴이 쿵쾅거리며 하늘을 날아오를 것 같았다. 당선의 기쁨과 설렘도 잠시, 앞으로 좋은 수필을 써야 한다는 두려움이 나를 흔들었다.
   이제 나는 문학에 입문한 새내기다. 오랫동안 먼빛으로 바라본 문학 앞에 한걸음 성큼 다가선 느낌이다. 내 앞에 펼쳐진 문학의 뜰을 잘 가꾸어나가고 싶다.
   글쓰기 반에 들어와서 몇 번인가 ‘내가 무슨 글을 쓴다고!’ 하는 마음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이럴 때마다 지도 선생님의 칭찬과 격려로 다시 일어나 앞으로 걸어갔다.
   이끌어주신 선생님께 먼저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같이 가자며 손을 잡아준 소울문학회 문우님들께도 감사드립니다. 끝으로 부족한 작품을 선정해 주신 심사위원님들과 수필과비평사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