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수필과 비평/수필과비평 신인상 수상작

[수필과비평 2018년 4월호, 제198호 신인상 수상작] 솥 - 김서희

신아미디어 2018. 4. 3. 08:40

"그 솥이 품어낸 밥으로 새벽 일터에 나온 이들은 든든하게 배를 채웠다. 열심히 일을 해서 가족들을 건사하고 가정을 지켰다. 솥은 그들과 나에게 살아갈 힘과 온기를 전해주었다. 살아 숨 쉬는 것들만 고마운 것은 아니다. 빗속에서 찌그러지고 까맣게 그은 압력솥이 새삼스레 떠오른다. 오 년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나와 함께했던 친구였는데 고맙다는 인사도 하지 않고 이사를 했다. 그 솥도 나를 기억할까. 새 주인과 정은 들였을까. 찬 비내리는 오늘도 솥은 사람들에게 따뜻한 밥을 내주고 있을 것이다."





   솥   -   김서희


   여름날의 뜨거웠던 태양은 어디로 숨어버렸을까. 가을을 재촉하는 비가 며칠째 내리고 있다. 유리창에 떨어진 빗방울이 주르륵 미끄러져 어디론가 가버렸다. 빗속에 간간이 불어오는 바람이 지난날을 데리고 왔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함께했던 솥을 남겨두고 이사를 했다. 한 번 밥을 하면 삼십 명이 먹고도 남은 솥의 주인은 나였다. 식당을 하며 점심시간엔 백 명이 넘는 사람의 밥을 준비해야 했다. 새벽 네 시에 가게 불을 켰다. 형광등 불빛 아래서 제일 먼저 나와 눈을 마주친 것이 그 솥이었다. 큰 솥에 밥을 안치는 것이 하루를 시작하며 맨 처음 하는 일이었다.
   솥은 모든 것을 내 손에 맡기는 듯 쌀도 받아들이고 물도 받아들인다. 뜨거운 불 위에 올려놓아도 아무 말이 없다. 채소와 생선을 다듬어 씻고 칼질을 하느라 잠깐 잊고 있으면 좀 보아 달라고 작은 소리를 낸다. 못 들은 척 바삐 다른 일을 하면 큰 소리를 내 나를 다시 부른다. 잠깐 그에게 가서 알은체를 한다. 솥이 무거운 입으로 뜸을 들이고 나면 나는 불끈 들어 바닥에 내려놓고 뚜껑을 연다. 솥은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뽀얀 밥을 자랑스럽게 내놓는다. 솥에서 구수한 냄새와 하얀 나비가 몰려 나와 춤을 추듯 난다. 나는 빙긋 웃으며 주걱으로 밥을 젓는다.
   새벽어둠이 가시기 전에 손님들은 가게 빈자리를 가득 채웠다. 그리고 나와 솥의 노고를 아는지 모르는지 맛있게 밥을 먹었다. 배불리 먹은 손님들 입가에 천하를 다 얻은 듯한 미소를 볼 때 나도 포만감을 느꼈다. 새벽에 일을 나온 많은 사연들이 모인 가게 안, 밥 앞에서 행복해 하는 모습은 모두 같았다. 나는 기쁜 마음으로 비어가는 솥을 쓰다듬곤 했다.
   어느 날 솥뚜껑을 제대로 닫지 않았다. 솥은 불 위에서 소리를 지르지도 못 하고 끙끙대더니 잠시 후 주방 안이 온통 밥 탄 냄새로 가득했다. 화들짝 놀라 뚜껑을 열었지만 까맣게 탄 밥을 보며 머릿속이 하얘졌다. 내 잘못인 줄 알면서 솥을 탓하며 바닥에 내려놓고 구석으로 쭉 밀었다. 솥은 주방 구석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솥이 밥을 망친 날이면 주방은 난리가 난다. 크고 작은 냄비를 동원해 밥을 하느라 진땀을 뺐고 손님들은 부족한 밥 때문에 아우성을 해댔다.
   밥 탄 냄새가 사라질 즈음 점심시간이 훌쩍 지났다. 저녁 장사를 위해 잠시 쉴 시간인데 까맣게 탄 밥과 솥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조금 탄 것은 내 몫으로 남겨두고 많이 탄 밥을 버리며 괜히 솥에게 또다시 원망을 했다. 숯이 되어버린 바닥을 거친 수세미로 빡빡 닦았다. 살아오는 동안 새카맣게 가슴을 태운 날들이 한꺼번에 떠올랐다. 하루가 헝클어져 피곤이 몰려온 화풀이를 솥에게 했다. 솥 바닥에는 깊은 상처가 남았다.
   그래도 오랜 동무처럼, 서로에게 없어서는 안 될 친구처럼 깨끗한 물로 헹궈 제자리에 놓았다. 물기가 마르지 않은 솥은 미안한 듯 눈물처럼 물기를 주르륵 흘렸다. 그 모습을 보는 내 마음도 왠지 짠해서 한참을 바라보았다.

   많은 사람들의 배를 채워 주니 내가 죽으면 좋은 곳으로 갈 것이라는 농담도 하며 그동안 많은 밥을 퍼냈다. 손톱이 닳도록 밥을 했다. 새벽부터 새벽까지 정신없이 시간을 헤쳐왔다. 돌이켜보니 지나온 날들은 그 솥과 함께한 시간이었다. 내가 잘나서, 내가 희생해서 가족들 뒷바라지하고 아이들 키웠다고 큰소리쳤지만 그 솥이 없었다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 솥이 품어낸 밥으로 새벽 일터에 나온 이들은 든든하게 배를 채웠다. 열심히 일을 해서 가족들을 건사하고 가정을 지켰다. 솥은 그들과 나에게 살아갈 힘과 온기를 전해주었다. 살아 숨 쉬는 것들만 고마운 것은 아니다.
   빗속에서 찌그러지고 까맣게 그은 압력솥이 새삼스레 떠오른다. 오 년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나와 함께했던 친구였는데 고맙다는 인사도 하지 않고 이사를 했다. 그 솥도 나를 기억할까. 새 주인과 정은 들였을까. 찬 비내리는 오늘도 솥은 사람들에게 따뜻한 밥을 내주고 있을 것이다.


 

김서희  ---------------------------------------------
   한국방송통신대학교 국문과 재학, 전북대학교 평생교육원 수필창작반 수강.

 


당선소감


   산수유가 봄을 찾아왔을까. 봄 햇살이 산수유를 꺼내 놓았을까. 봄의 문지방을 넘은 산수유를 보며 운전하던 남편에게 물었다. 남들과 똑같은 것을 보면서도 매번 엉뚱하게 말하는 나에게 “당신 마음에서 나왔겠지.” 하며 남편이 웃었다.
   지난날 어두운 터널 속에서 써 내려간 한 줄의 글은 나를 지탱해 준 힘이었다. 글은 내 마음에 환한 등불과도 같았고 때론 내게 세상으로 나아가는 길을 만들어주곤 했다.
   처음 등단 소식을 들었을 때 숨을 쉴 수가 없을 정도로 기뻤지만 순간 화끈거리는 얼굴을 두 손으로 감쌌다. 내가 잘할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이 밀려오며 가슴이 요동쳤다. 글은 쓰면 쓸수록 어렵고 좋은 글을 쓰는 답을 아직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직 가야 할 길이 멀지만 나에게 등단의 기회를 주신 ≪수필과비평≫, 내가 글을 계속해서 쓸 수 있도록 사랑해 주신 문우님들과 선생님께 감사의 말씀을 전한다. 내 옆에서 늘 응원해준 우리 가족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