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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과비평 2018년 01월호, 통권195호 I 지상에서 길 찾기] 여고 동창회 - 류창희

신아미디어 2018. 3. 28. 09:24

"‘친구들 2월 21일 윷놀이대회, 고모리 권○○농장 10시, 회비 3만 원, 흑돼지 잡음 연락 바람’   촌스런 문구에 괜히 콧날이 시큰하다.."





   여고 동창회  류창희

   어느 날, 여고 동창회에 초대를 받았다.
   한 시간 정도 ‘인문학 이야기’를 해달라는 것이다. 난 아직 한 번도 여고동창회라는 곳에 가본 적이 없다. 간혹, 부부 동반하여 남편 고등학교 동창회에 쫓아가 보면 회장단 이 취임식을 하거나 자랑스러운 선후배 소개를 한 다음, 동창들과 담소도 잠깐 춤과 노래, 경품행사를 한다. 여흥을 즐기고 한 아름 경품이나 들고 오는 기쁨을 마다하고, K여고에서는 축제행사에 고리타분한 ‘인문학 고전’을 택했다. 이전에는 기념행사에 가수를 부르거나 와인강좌 등을 들었다며, 소비가 아닌 지적인 문화를 누리고 싶다고 했다. 이례적이다. 동창회문화도 시대 따라 바뀌는 모양이다.
   나보다 2년 정도 선배들이다. 연배가 비슷한 소녀였던 여사님들은 과연 어떤 모습으로 이 시대를 살고 있을까. 어떤 분위기일까. 호기심이 더 컸다. 더구나 말로만 듣던 부산 최고의 명문여고가 아니던가.
   번화가 높은 ‘L호텔 42층’ 현수막에는 ‘신년하례’라고 쓴 연회장이다. 휘황찬란한 전등 빛 아래 고급스러운 차림새와 교양 있는 분위기. 나는 스스로 벅차면서 조금 주눅도 들었다. 아직 내 이름이 불리지 않았는데도 가슴이 쿵쾅거린다. 강사 프로필 소개가 끝나자 박수소리와 함께 밴드가 베토벤의 <환희의 송가>로 맞이한다. 강단으로 올라가는데 악기 소리가 어쩐지 낯설었다. 모두 나를 우러러보고 있다.
   한 시간이 어찌 지나갔는지…. 압도된 분위기 속에 횡설수설 몇 번의 까르르까르르 웃는 소리에 잠깐씩 마음은 놓였으나, 정작 하고 싶었던 말을 놓친 아쉬움도 남았다. 강연이 끝나자 밴드음악에 맞춰 박수를 받으며 집으로 왔다. 돌아오는 길, 눈앞이 물안개로 외로웠다. 역시, 나에게는 동문이나 동창회라는 이름이 어울리지 않는다. 여고뿐만 아니라, 초등학교, 중학교, 그 외에 뒤늦게 등록금을 내고 수료나 졸업을 한 학교 동창회에도 가본 적이 없다. 서울 부산의 지역거리라고 말해보지만, 학창시절 뭐 하나 제대로 잘한 것이 없었으니 당연하다. 알음알음 연락하여 ‘보고 싶다, 친구야.’라며 애절하게 나를 찾지 않는다.
   이제 나는 회비를 낼만큼 여유도 있고, 운전하여 운동장이나 강당으로 갈 수 있는 자동차도 있는데, 나의 진가를 알아주지 않으니 서운하다. 그런저런 생각을 하며 혼자 늦은 저녁을 먹고 있는데, 어찌 내 마음을 알아차렸을까? 때마침 문자 하나가 날아왔다. 내가 졸업도 하지 못하고 5학년 때 떠나온 고향, 포천 ‘정교분실’ 초등학교다.

 

   ‘친구들 2월 21일 윷놀이대회
   고모리 권○○농장 10시, 회비 3만 원
   흑돼지 잡음 연락 바람’

 

   촌스런 문구에 괜히 콧날이 시큰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