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참을 걸었다. 이제 집으로 가야겠다. 찬기가 느껴지는 바람결에 떠밀리듯 사람들은 종종걸음으로 전철역 안으로 사라진다. 낙엽은 길 위에서 나뒹굴고."
딱 붙어있어라! - 김범송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가 도심을 아름답게 그려놓았다. 차들이 쉼 없이 달리고 빌딩 모퉁이에서 담배연기가 모락모락 피어나도 은행잎은 티 없이 맑기만 하다. 아름다운 것을 보면 사람의 마음도 아름다워지는 모양이다. 길을 걷는 사람들의 표정도 밝아 보이고 아저씨가 낙엽을 쓰는 빗자루 소리도 고향집 마당 새벽 소리처럼 청정하게 들린다.
간간이 떨어지는 은행잎에 눈을 맞추며 친구를 만나러 가는 기분이 상쾌하다. 친구를 만나면 점심 먹고 창경궁을 걷자고 할까? 거기 가을 분위기가 한창 좋을 거야! 웬걸, 친구는 칠순을 넘긴 남편이 스포츠댄스 장에서 만난 여자와 바람났다고 남편 욕이 목까지 차올라 있었다. 그런 친구와 점심을 같이 먹고 찻집에서 커피까지 마셨다. 헤어질 때 나는 친구와 같이 가야 할 전철역 방향을 반대로 틀어버렸다. 2시간도 넘게 친구의 열 받치는 이야기만 듣고 일어선 것 같아 다음 역까지 혼자 걸어가고 싶었기 때문이다.
자기 속 풀려고 만나자는 거였어? 맞장구를 쳐주며 시간을 보냈던 것이 불쾌하기만 하다. 신호등 건너 은행나무가 서 있는 가로수 길로 향했다. 걸으면서 언짢은 기분을 탈탈 털어버리면 시원해질 것도 같았다. 아름다울 것이라 생각했던 가로수 길이 어수선하다. 은행잎이 사람들의 발길에 짓밟히고 찢어져 지저분해져 있다. 한여름 뙤약볕을 견디고 가뭄에 시달리며 물들었을 텐데 무심한 세상은 그의 노고를 한낱 쓰레기로 치워버릴 게 분명하다.
그러게 바람이 좀 분다고 냉큼 떨어져 나와 버림받은 것처럼 땅바닥에 납작 깔려있는 모습이라니, 저 은행잎도 은행나무에 붙어 있을 때가 좋았지 싶다. 걸을수록 왜 이리 스산해지는지 모르겠다. 괜히 걸었나 보다.
멀끔하게 생긴 젊은 남자가 앞질러 걸어간다. 옷매무새가 반듯하고 활발하게 걷는 뒤태가 당당해 보인다. 좋은 직장에 다니나 보다. 부모님이 저 모습을 보면 얼마나 대견해 할까. 저처럼 좋아 보이는 직장인도 양복 안주머니에 사직서를 넣고 다니다 수틀리면 꺼내 던져버린다는데 저 젊은이 안주머니도 그럴까? 지랄 말고 딱 붙어있어라! 그 자리에 붙어있을 때가 좋은 때이니라.
내가 직장을 다닐 적에는 직장을 쉽게 옮기는 것을 좋게 여기지 않았다. 한번 직장을 다니면 그 직장에서 정년퇴직하거나 여자는 결혼을 하게 될 경우 사직서를 내고 퇴사를 했다.
1960년대에 박정희정권이 시작되면서 부정 공무원들의 숙청작업이 감행되었다. 공무원이 첩을 두고 있으면 목 잘리기 1순위라는 말이 참말인지 소문인지, 우리 아버지가 1순위로 목이 잘렸다는 소리가 당시 어린 내 귀에도 맞는 말 같았다.
아버지는 딸만 넷을 두고 계셨으니 오로지 아들을 보겠다는 이유로 끊임없이 작은여자를 옆에 끼고 사셨다. 그런 아버지가 못마땅해도 어머니와 딸들은 알아서 복종을 해야 했고, 당신 뜻대로 밖에서 데려온 여자를 작은어머니라 불렀다.
아버지는 군청을 퇴직하시게 되자 그 길로 시골에 논을 팔아 서민금융이라는 회사를 차렸다. 공무원 생활만 하시던 양반이 사업수단이 있을 리 만무했다. 2년도 못 가 집까지 고스란히 날아가 버렸다. 나는 졸지에 가난한 집 딸이 되어 여고를 졸업하고 직장을 다니게 되었다.
한해 두해 근무하다 보니 나는 여사원 중에 고참이 되어갔고, 25세 올드미스 대열에 끼이는 나이가 되었다. 겉으로는 활발하고 당당한 척했지만 자꾸 내 모습이 초라해지는 것 같아 직장을 다니기가 싫어졌다. 아니, 아버지가 미워서라도 그만두고 싶었다. 딸이라서 쓰잘머리 없는 자식처럼 여겼던 아버지께 꼬박꼬박 월급봉투를 바쳐야 하는 것도 싫고, 어머니가 새벽같이 부엌에서 회사원들 하숙밥 짓는 것도 싫었다.
집을 떠나 직장을 다니고 싶었다. 나 정도면 사무능력이 있으니까 어디 가서 직장을 못 구할까 싶었다. 부모님께 상의도 안하고 사직서를 내버렸다. 나는 작은 회사라도 기꺼이 다닐 아량까지 품어가며 이력서를 디밀었지만 어느 곳도 받아주는 데가 없었다.
요행히 면접을 보게 되는 기회가 생겨도 사장님은 노랗게 떨어진 은행잎 중에 제일 맘에 든 은행잎 하나를 쏙 골라잡고 별 볼일 없는 것들은 그냥 쓸어버리는 것처럼 나는 하찮은 낙엽 신세가 되어 버렸다.
삶에 진리는 낙엽 같은 존재에도 그 가치를 알아주는 길이 있었던가 보다. 나를 맘에 들어 하는 남자가 타나났다. 앞뒤 없이 그 남자를 따라 들어앉고 보니 다들 싫어하는 두엄자리가 내 자리였다. 집안에 꽃을 피우려면 거름을 잘 쓰고 알맞게 삭아야 하거늘, 나는 그 자리에서 애만 쓰다가 세월만 갔던 것 같다. 애쓰고 사는 것도 인생이 물들어 가는 일이라 황혼녘에 서 있는 남편나무에 너울거리던 나뭇잎들은 다 떨어져 나가고 마지막 나뭇잎 하나만 달랑 붙어있다. 고목나무에 단풍잎 하나 붙어 있는 것도 아름답다고 사진을 찍어주며 즐거워들 한다. 외롭다느니, 이제 떨어질 때가 됐다느니, 쓸데없는 소리 말고 딱 붙어 있어라! 붙어 있을 때가 행복하느니라.
한참을 걸었다. 이제 집으로 가야겠다. 찬기가 느껴지는 바람결에 떠밀리듯 사람들은 종종걸음으로 전철역 안으로 사라진다. 낙엽은 길 위에서 나뒹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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