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쓴맛을 온전히 품어야 했을 불쌍한 언니. 삶의 모퉁이에서 만난 멀고도 낯선 땅, 외롭고 쓸쓸한 바다 밑바닥에서 숨소리를 죽이고 납작 엎드려 가자미 신세로 지냈으리라. 외롭고 서러움이 밀려올 때마다 먼 친정 쪽 하늘을 쳐다보며 눈가가 젖었을 ‘울순이’를 떠올리면 속이 다 아리다."
월순언니 - 김잠복
월순 언니가 열두 해 만에 고국을 찾았다. 물설고 말 선 미국 땅에서 지구를 반이나 돌아 먼 친정 나들이에 나선 것이다.
마중을 나간 공항마당은 막 어둑발이 치기 시작했다. 하루 일을 다 한 해는 서산마루에 걸터앉아 오렌지색 물감을 흥건하게 풀어놓고 하산을 서둘렀다.
얼마쯤 기다렸을까. 저만치서 명쾌한 스타카토로 걸어 나오는 언니와 시선을 마주치고 다가가 가슴으로 혈육의 정을 끌어당겼다. 그간의 안부를 묻고 나란히 공항을 나서는 언니와 내 뒤를 서둘러 나온 초저녁별이 한참이나 따라왔다.
칠 남매 중 둘째 딸인 언니는 달빛 고운 날 태어난 순둥이라며 ‘월月 순順’이라 불렀다. 딸아이의 앞날이 달처럼 환하게 피어나기를 바라는 부모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래서일까. 언니는 말씨나 몸가짐이 단아하고 부모님 말씀을 거역하는 법이 없는 순한 딸이었다. 천성적으로 섬세함은 타고났던지 손끝이 야물어서 하는 일마다 칭찬이 자자했다. 하지만 또래들이 하는 소꿉놀이나 술래잡기, 땅따먹기 놀이 때는 동작이 굼떠서 매번 궁지에 몰렸다. 그럴 때마다 손발을 동동 구르며 눈물을 훔치던 언니를 두고 친구들은 ‘울순이!’라며 놀렸다. 그 시절 한창 유행하던 대중가요 <왈순아지매>는 자연스럽게 언니의 또 다른 별명이었다.
언니는 ‘울순이’나 ‘왈순아지매’라는 별명을 질색하며 귀를 막았다. 그럴수록 아이들은 악착같이 별명을 불렀다. 골목에서 마주칠 때는 턱밑까지 입을 갖다 대고 ‘왈순아지매!’를 외쳐 줄행랑을 치는 바람에 손등으로 쓱 눈물을 훔치던 언니가 불쌍했다.
요술 손은 집 안을 윤이 나도록 쓸고 닦았다. 뜨개질이며 부엌살림은 어지간한 어른을 능가했다. 동네 여자들이 모여 부업으로 하는 뜨개질은 워낙 민첩하고 바지런해서 수당으로 받아 모은 돈이 제법이었다. 십자수를 새겨 넣은 베갯잇과 횃댓보는 보는 이마다 감탄할 정도여서 이웃 잔칫집 혼수품에 쓰기도 했다.
그런 언니가 자랑스러웠다. 간혹 학교에서 받은 바느질 숙제는 언니가 대신해 주는 바람에 정작 으스대는 쪽은 나였다. 훗날 내 결혼 혼수품은 태반이 언니 솜씨였다. 이제사 고백인데 그 덕에 시댁 식구들로부터 나는 솜씨 좋은 며느리로 각인되는 행운을 한참이나 누렸다.
결혼생활 또한 충분히 행복해 보였다. 형부와 중매로 만난 인연은 남매를 낳아 키우며 장미꽃 향기를 폴폴 날렸다. 그런 딸자식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엄마 곁에서 나는 효도란 부모를 잘 섬기는 일 말고 탈 없이 내 가족을 잘 건사하는 것임을 알았다.
하지만 그런 날은 오래가지 않았다. 어느 날 조심스럽게 ‘미국 이민’을 알리더니 일사천리로 일 처리를 했다. 시부모님이 이미 가 계신 미국행은 마른 잔디에 불길 번지듯 금방이었다. 친정 식구들은 그저 지켜볼 달리 재간이 없었다.
언니는 미국 하늘 아래 밥솥을 옮겨 걸었다. 그런 딸이 이제부터 ‘행복 끝 불행 시작’이라며 엄마는 마른입을 다셨다. 밤잠을 설치며 고생길에 든 언니 생각에 가슴을 쓸어내렸다. 언니가 미국으로 떠난 이후로 희미한 달빛은 친정집 하늘을 맥없이 지나쳤다. 온 식구가 혈육이 주는 생이별, 그 일이 얼마나 우울한 건지를 두고두고 경험했다.
언니의 미국 생활은 상상 그 이상이었다. 손짓, 몸짓을 다해 벙어리 아닌 벙어리로 천하고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화장실과 호텔 청소, 식당 허드렛일을 닥치는 대로 하며 이민 생활이 주는 쓴맛을 고스란히 접수했다. 언어 소통이 안 되는 바람에 몇 달치 임금을 떼여야 했던 적이 있었다니 그간의 고충은 짐작만 할 뿐이다.
세상의 쓴맛을 온전히 품어야 했을 불쌍한 언니. 삶의 모퉁이에서 만난 멀고도 낯선 땅, 외롭고 쓸쓸한 바다 밑바닥에서 숨소리를 죽이고 납작 엎드려 가자미 신세로 지냈으리라. 외롭고 서러움이 밀려올 때마다 먼 친정 쪽 하늘을 쳐다보며 눈가가 젖었을 ‘울순이’를 떠올리면 속이 다 아리다.
시간은 그냥 흐르지 않는다고 했던가. 마침내 미국 생활이 뿌리를 잘 내린 성싶다. 몇 해 전 미국시민권을 얻었고 그 이듬해에는 내 집 마련까지 했다니 더없이 다행이다. 아침이면 형부와 나란히 직장을 향해 대문을 나설 때가 제일 행복하단다. 앞마당에 채소를 심어 커가는 모습을 보며 고국에 대한 그리움을 대신한단다. 언니의 앞날은 원하는 일이 두루마리 화장지처럼 술술 풀리기를 축원한다.
이제 언니는 더 이상 ‘울순이’가 아니다. 세상 누구보다 씩씩하고 당찬 미국 시민으로 살게 될 것이다. 위로는 가장귀를 키워 바람을 쓰다듬고 밑으로는 땅속 깊숙이 뿌리를 내려 튼실한 나무로 존재할 것이다.
세상은 결코 그 무엇을 쉽게 주는 법이 없는가 보다. “하는 일이 쉽게 이루어지기를 바라지 마라.”라고 ≪보왕삼매론≫이 가르치듯 원하는 것을 너무 쉽게 얻으면 그 뜻이 가벼워서 오만해지기 쉬울 게다. ‘사람은 부지런하고 검소하게 살 일’이라고 하는 언니의 충고는 그냥 흘리는 말이 아니었다.
언니가 머무는 친정집 마당 위로 겨울 햇살이 빗살무늬로 내려앉았다. 그럴수록 언니 손은 잠시도 놀리기를 거부했다. 온 집안을 쓸고 닦는 바람에 묵은 먼지가 줄행랑을 쳤다. 어깨가 삐딱하던 장롱, 찌든 때를 덕지덕지 걸친 집안 살림이 새것처럼 말쑥해졌다. 구순의 엄마를 안팎으로 씻기고 새 옷으로 갈아입혔다. 창고며 뒤란 선반 정리를 제대로 하는 바람에 쥐나 고양이가 먹이가 궁하다고 아우성들이다.
오랜만에 칠 남매가 친정집에 모였다. 마당에 멍석을 깔고 빙 둘러앉아 이야기꽃을 피웠다. ‘왈순아지매’, ‘울순이’를 번갈아 부르지만, 이제 언니는 되레 맞짱을 뜬다. 중천으로 기운 달이 빙긋이 월순언니를 응원했다.
밤이 깊어 잠자리를 청했다. 달빛은 칠 남매가 누운 문간방을 골고루 비추었다. 피곤했던지 금방 꿈나라에 든 월순 언니 얼굴이 달빛을 받아 환하다. 구름에 가려 희미하던 달, 제 몸을 안으로 숨겨 움츠리는 하현달 말고, 하늘 한가운데서 보란 듯이 환한 보름달로 뜬 월순 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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