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를 보니 마음에만 담아두고 몇 해 동안 찾아뵙지 못한 선생님이 생각난다. 올해도 벌써 가을이 다 지나갔다. 해가 갈수록 마음만 바빠진다."
오해 - 김순경
그림자 하나가 휙 지나갔다. 누군가 교실 뒷문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사라졌다. 교실 안을 살피다가 고개를 들자 숨어버린 것이다. 나는 모른 체하고 강의를 계속했다. 잠이 와서 세수하러 나갔나 싶어 자리를 둘러봤지만 빈자리는 없었다.
조금 일찍 수업을 끝냈다. 흰 와이셔츠에 검은 양복을 입은 청년이 복도에 서 있었다. 큰 키에 잘생긴 청년이 나를 보자 공손하게 인사를 했다. 선뜻 기억이 나지 않아 얼굴을 자세히 보려고 가까이 다가갔다. 졸업생이라면서 자신을 소개했지만 생각이 잘 나지 않았다. 찾아온 제자니까 우선 반갑게 수인사를 하고 내 연구실로 가자고 했다. 발길을 돌리는 순간 아하! 생각이 났다. 그 청년은 오래전 내가 학과장을 할 때 문제 학생으로 낙인찍혀 졸업을 못 할 뻔했던 학생이었다.
회사생활을 하다 학교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다. 초임 교수답게 열정만 앞세우고 좌충우돌할 때였다.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고 학생들을 이해하기보다는 다그치고 밀어붙였다. 목표 달성을 위해 원칙만 앞세우는 회사 간부처럼 학생들을 대했다. 조금이라도 더 많은 것을 가르치고 싶은 마음에 쉬는 시간도 없이 강의를 계속할 때가 많았다. 수업시간이 되기도 전에 교실에 들어가 책상부터 정리정돈시켰고 책이 없는 학생은 바로 내보냈다.
내 과목은 전공필수에 3학점이라 모두가 긴장하는 수업이었다. 출석은 회사의 출근처럼 철저하게 관리했다. 지각은 수업 분위기를 흐리기 때문에 결석보다 더 엄격하게 처리했다. 복도에서 뛰어오는 소리가 들려도 기다리지 않고 출석을 불렀다. 나중에 없던 일로 해주는 한이 있어도 수업 시작 전과 후에 반드시 출석을 챙겼다. 자기 이름을 불러주고 눈을 마주치면 대부분 자세를 가다듬었다.
그날도 수업 시간보다 일찍 교실에 들어가 출석을 점검하다 중단했다. 갑자기 교실 분위기가 싸해졌다. 월요일 첫 시간부터 엎드려 자는 학생 때문이었다. 옆 사람을 시켜 깨웠다. 겨우 일어났지만 정신을 못 차리고 멍하니 앉아 있었다. 순간 일요일에 친구들과 놀면서 과음을 했거나 밤샘을 하지 않았을까 하는 선입관이 들었다. 수업이 끝날 때까지도 약에 취한 사람처럼 앉아 있었다. 수업하는 내내 신경이 쓰였지만 그날은 그렇게 넘어갔다.
그다음 주에도 똑같이 자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이미 깊은 잠에 빠진 것 같았다. 복장도 일반 학생들과는 뭔가 달랐다. 까만 정장 바지에 소매가 긴 하얀 와이셔츠 차림이었다. 헝클어진 머리는 물에 젖은 것처럼 착 달라붙어 있었고 옆자리에는 검은색 정장 윗도리가 놓여 있었다. 도대체 뭐하는 녀석이지, 하면서 강의를 시작했다. 강의가 시작되면 또 쓰러져 잤다. 몇 번을 야단쳤지만 소용이 없었다. 가까이 가보니 술과 담배 냄새가 물씬 났다. 그냥 두면 안 될 것 같았다. 제대로 혼을 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내 수업시간에 이렇게 대놓고 자는 학생은 처음이었다. 학점을 포기했거나 뭔가 나사가 풀린 학생이 아니면 그렇게 할 리가 없었다. 무슨 사정이 있는지 궁금했다. 쉬는 시간에 반 총대를 조용히 불러 왜 그러는지 물었더니 이름만 알 뿐 신상에 대해 아는 게 없다고 했다. 늘 혼자 다녀 친한 친구도 없었다.
다른 교수들도 말이 많았다. 그 반에 가면 자는 학생 때문에 강의 집중이 되지 않는다고 하소연하는 사람도 있었다. 아무래도 친구들과 어울려 밤새 게임을 하거나 술을 마시고 오는 것 같다고 귀띔을 해주었다. 아무리 타일러도 도무지 개선이 안 된다면서 야단이었다. 어떤 교수는 절대 학점을 주지 않을 거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학과 차원에서 벌을 주거나 조처를 해야 한다는 교수도 있었다.
수업이 끝나고 연구실로 불렀다. 수업시간에 왜 자는지 몇 번을 물어도 고개를 숙인 채 말이 없었다. 슬그머니 화가 났다. 큰소리가 목구멍까지 올라왔을 때였다. 회사 다닐 때 노조 대의원과 대화를 했던 일이 생각났다. 먼저 화를 내면 진다는 것을 체험한 적이 있어 꾹 참았다. 한참 정적이 흘렀다. 학생은 들릴 듯 말 듯 낮은 목소리로 죄송하다는 말만 반복했다. 어떻게 타이르고 조치를 해야 할지 명쾌한 해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섣불리 나서지 않고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내가 대학 다닐 때 깐깐하기로 소문난 노교수님의 말씀이 생각났다. 퇴직하실 무렵이었다. 평생 교직에 계시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이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직장 다니느라 제 날짜에 시험을 치지 못한 학생에게 F 학점을 주었던 일이라고 하셨다. 철야를 하고 찾아와 기회를 달라고 애원했지만 원칙대로 처리했다고 하셨다. 결국, 그 학생은 필수과목 학점누락으로 대학 중퇴자가 되었고 제때 승진도 못 했다고 했다. 융통성 없는 원칙이 평생 후회로 남더라고 하셨다. 그 말이 자꾸 떠올랐다.
나도 학창시절에 방황하던 때가 있었다. 제대로 진로를 정하지 못하고 힘들어할 때 잘 이끌어준 선생님이 계셨다. 가끔 친구들과 함께 찾아뵙다가 요즘은 좀 뜸하지만 학생들과 면담을 할 때마다 보이지 않게 신경써 주던 그분이 생각났다.
드디어 입을 열었다. 그 학생은 밤에 아르바이트한다고 했다. 아쉬운 것 없이 잘 지내다 외환위기로 회사가 무너지자 부모는 이혼했고 친척 집에 얹혀살면서 자신과 동생의 학비를 번다고 했다. 하는 일은 나이트클럽 웨이터였다. 초저녁부터 새벽까지 술 시중을 들고 바로 학교로 와 교실에서 자고 있었던 것이다. 그 말을 듣고 나니 술과 담배 냄새의 수수께끼도 풀렸다. 어떻게 해서라도 졸업장은 꼭 받고 싶다고 했다. 할 말을 다 한 학생의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다. 나도 이야기를 듣는 내내 천장만 쳐다봤다.
그 때 졸업한 학생이 중견 기업의 관리자가 되어 내 앞에 나타난 것이다. 동생도 학업을 정상적으로 마쳤고 집안도 잘 정리되어 이제는 부러울 것이 없다고 한다. 졸업식 때 고맙다는 말을 전하지 못해 찾아왔다고 한다. 까맣게 잊고 있던 제자가 이렇게 찾아온 것이다.
제자를 보니 마음에만 담아두고 몇 해 동안 찾아뵙지 못한 선생님이 생각난다. 올해도 벌써 가을이 다 지나갔다. 해가 갈수록 마음만 바빠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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