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꼴등을 하면 안 된다는 외손자의 당부와 연장자라는 꼬리표가 귀에 뱅뱅 돈다. 에라! 모르겠다. 설마 죽기야 하겠나. 코치의 지시를 따라 끝까지 뛰었다. 현기증이 일고 눈앞이 캄캄하다. 몸 여기저기서 땀샘이 팡팡 솟아오른다. 삭신이 쑤신다. 집에 닿기 무섭게 파스 두 통으로 온몸에 도배를 했다. “연장자 파이팅!”"
연장자年長者 - 신서영
널찍한 냄비에 무를 큼직하게 썰어서 바닥에 깔았다. 그 위에 알맞게 곰삭은 김치를 올리고 사이사이로 토막 친 고등어를 넣고 물을 자작하게 부었다. 센 불에서 끓이다가 불을 줄여 뭉근하게 졸여야 생선 맛이 김치에 푹 배일 것이다. 향긋한 취나물과 쌉싸래한 머위 순은 살짝 데쳐서 막장에 갖은 양념을 해서 조물조물 무쳐놓는다. 백미로 모처럼 밥을 짓는 밥솥도 신이 난 듯 추가 힘차게 돌아간다.
지난 일주일은 고통의 연속이었다. 목욕탕 헬스장에서 하는 다이어트대회에 덜컥 신청했다. 나의 의사와 관계없이 순전히 딸이 저지른 소행이다. 근년에 들어 나이 탓인지 조금 무리를 하면 몸살이 오고 어깨와 허리가 결리기도 했다. 이웃에 사는 사위가 종종 침을 가지고 왕진을 온다. 그때마다 쫄랑쫄랑 따라온 딸은 운동 부족에 뚱뚱해서 오는 병이라고 잔소리를 해댄다. 지난날 대가족의 맏며느리에 대소사는 많고 저희 남매를 키우며 골병든 것은 안중에도 없다. 사위와 외손자 앞에서 어미의 자존심을 팍팍 꺾는다.
딸의 마음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이 핑계 저 핑계 대며 운동은 하지 않고 몸 아픈 타령만 했으니 말이다. 이참에 단체로 하는 운동이라 참가하면 억지로라도 따라 할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 한 달이라고 하지 않았나. 아무리 힘들어도 할 수 있을 것이라 다짐을 한다.
몸에 착 달라붙는 빨간 유니폼을 입은 코치는 육체미 선수 같다. 온몸이 울퉁불퉁 근육 덩어리다. 다부지고 엄격해 시작하기도 전에 주눅이 든다. 1등과 2등은 상금이 꽤 많다. 몸무게와 상관없이 오직 출석점수와 체지방 감량에 따라 순위가 결정된다고 한다. 특별상도 있는데 그것은 열심히 운동을 하는 사람에게 주어진다. 체지방은 단백질 위주의 무염식사와 강한 운동으로만 빠진다. 스무 명의 선수들 기세가 치열하다.
긴 머리카락을 낭창하게 묶은 이십 대 초반의 자매 아가씨와 삼십 대 중반의 새댁, 머리띠를 단단히 끼고 있는 사십 대 여인은 지난번 대회 때 아침과 오후, 저녁 반에서 전체 일등을 해 거금을 손에 쥐었다는 기록도 가지고 있다. 나보다 더 뚱뚱한 오십 대도 있지만, 대부분은 분기마다 하는 대회에 참여했던 선수들이다. 그러나 나는 불행하게도 이들 중에서 제일 연장자다. 더구나 이러한 대회에 참가하는 것도 처음이라 모든 게 서툴고 운동명칭도 몰라 어리둥절하다.
코치는 얼굴이 곱상하고 계집애처럼 생겼다. 그러나 운동을 시작하면 해병대 특수교관으로 무섭게 돌변한다. 스트레칭이 아니라 완전 단체기합이다. 죗값이라곤 많이 먹고 살찐 것뿐인데 너무 가혹한 벌이다. 어찌 보면 먹고 싶어 먹은 것도 아니다. 음식을 만들다 보면 간도 보아야 하고 가족들이 남긴 잔반도 아까워서 먹어야 할 때도 잦았다. 그런 나에게 비만의 올가미를 덧씌워 이런 곳에 넣은 딸이 생각할수록 괘씸하다. 숨이 턱에 걸리고 한 발짝도 움직일 수가 없다. 눈치가 보여 신음을 속으로 삼키는데 뒤쪽에서도 헉헉거리며 앓는 소리가 터진다. 제대로 따라 하지도 못하면서 앞줄에 서서 힘이 더 들었다. 수업이 끝나자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고 온몸이 물에 빠진 듯 축축하다. 정신이 혼미하다. 그런데 모두 또 러닝머신에 매달린다. 독해야 살을 깎아 태우는 것 같다.
다음 날 아침은 잠자리에서 도저히 일어날 수가 없었다. 온몸의 근육과 살집이 갑자기 위기감으로 똘똘 뭉쳤다. 흔들의자에 앉아 책을 읽거나 소파에 편한 자세로 기대있으면, 몸속의 근육들도 마냥 푹 퍼져 있다가 날벼락을 당했다. 특히 앉고 계단 내려가는 것이 힘이 들어 바지에 볼일을 본 것처럼 걸음이 엉거주춤하다. 근육 이완제를 먹고 몸을 살살 구슬려 본다. 구석구석 제 터전을 잡고 있던 지방이 쉽게 물러날 리가 없다. 몸은 날마다 파김치가 된다. 이 나이에 가끔 등산을 하면 되지 무슨 살을 빼겠다고 이 고생이야, 당장에라도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목젖까지 차오른다. 그런데 연장자라는 꼬리표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한다. 내가 먹은 나잇값이 가슴을 짓누르는 무거운 짐이 될 줄이야 미처 생각지도 못했다. 그러는 사이에 일주일은 지나고 몸이 조금 가벼워진 느낌이 든다. 몸무게를 재어보니 1.5킬로가 빠졌다.
주말 아침 식탁은 푸짐했다. 일주일 혹독하게 무염식사로 관리했으니 한 끼라도 제대로 먹어야 기운을 차릴 것이다. 도다리쑥국과 머위 순, 초벌 부추와 봄나물은 때가 지나면 먹을 수가 없지 않은가. 김치찌개 역시 온몸의 미각을 곤두서게 한다. 지난겨울 김장을 하면서 해남배추의 배 값을 더 내고 봉화 고랭지 배추로 담갔다. 그 김치 맛은 아삭하고 감칠맛이 특별했다.
뭉근하게 익은 김치찌개를 쭉 찢어서 하얀 밥 위에 척 걸쳐서 먹는다. 행복은 바로 이런 맛이 아닌가. 체지방이고 뭐고 이 순간 아무런 생각이 없다. 몸이 먼저 봄을 느끼는지 봄나물을 볼이 미어지도록 먹고 있는데 딸이 파스 두 통을 들고 느닷없이 나타났다. 밥상을 흘깃 보더니 ‘오늘이 사또 생일’이냐며 비비 말을 꼰다. “그래! 내 생일이다. 다 먹고 살자고 하는데 먹어야 살지.” 마음에도 없는 대꾸를 하고 말았다. 딸은 어이가 없는 듯 휑하니 나가버렸다. 밥 한 공기를 후딱 비우고 또 먹었다. 저녁에는 삶은 달걀과 야채를 먹어야 하는데 나도 모르게 김치찌개에 손이 먼저 간다. 김치에는 분명 마약 같은 중독성이 강한 뭔가가 들어있는 모양이다. 다음 날 몸무게를 달다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2킬로나 확 불어있었다. 이럴 수가! 저울에 문제가 있는 것 같다. 다시 무게를 재도 눈금은 그대로였다. 저울은 진실하고 솔직했다.
코치는 주말에 쉬었다고 힘든 것만 골라서 한다. 스쿼트와 런지에 이어서 버피 10개에 제자리 빨리 뛰기 100개다. 궁둥이에 커다란 쇳덩이가 붙은 듯하다. 코치가 눈치를 챘는지 힘들면 따라 하지 않아도 된다고 한다. 꼴등을 하면 안 된다는 외손자의 당부와 연장자라는 꼬리표가 귀에 뱅뱅 돈다. 에라! 모르겠다. 설마 죽기야 하겠나. 코치의 지시를 따라 끝까지 뛰었다. 현기증이 일고 눈앞이 캄캄하다. 몸 여기저기서 땀샘이 팡팡 솟아오른다. 삭신이 쑤신다. 집에 닿기 무섭게 파스 두 통으로 온몸에 도배를 했다.
“연장자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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