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몸으로 감지되는 유형의 봄이 짧기에 무형의 봄을 만드는 사람들. 우리 인생 겨울임을 이미 알고 받아들이고 있는 사람들. 그래서 그들의 예술도 사랑도 그들이 마시는 술도 참으로 뜨거운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때론 인생이 미적지근하다고 느껴질 때 나도 동토에 갇혀 제대로 앓다가 나왔으면 좋겠다. 나의 겨울의 의미는 무엇이며 어떤 자세로 견디며 어떤 봄을 기다려야하는지 알아내고 싶다. 마침내 겨울의 집에서 걸어 나올 때는 고통의 상흔이 남아 있으나 더 깊어지고 성숙된 모습이면 좋겠다. 나의 봄과 당신의 봄이 서로 만나 웃음으로 반겨주는 그런 얼굴들이 넘쳐나는 거리를 상상한다."
동토冬土 / 이양주
지나치는 이 대부분이 무관심 무표정이다. 상쾌한 아침을 열기 위해 공원을 찾은 사람들조차 굳은 얼굴을 하고 있다. 다가오는 이에게 눈길을 전해 보건만 그냥 스쳐간다. 경직된 그들의 표정에 나마저도 굳어진다.
유럽의 다른 지역을 여행할 때 마주치던 사람들의 밝고 우호적인 태도와는 사뭇 대조적인 얼굴이다. 낯선 이국인에게도 기꺼이 미소를 건네고 손을 흔들어주던 유럽인들의 모습은 내게 신선한 경험이었다. 처음엔 익숙하지 않아 쉽게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어색한 표정에 답례도 못한 채 지나치기를 여러 차례. 왠지 빚지는 느낌 들어 설익은 미소로 답변하곤 했는데 이젠 은근히 그들과의 교감이 여행의 즐거움 중 하나가 되었다. 그런데 러시아는 달랐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만난 가이드도 첫 인상은 그들처럼 무뚝뚝하였는데, 함께 하는 시간이 점점 길어지면서 그의 깊고 따뜻한 인간적인 면모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나는 그들의 표정에 분명히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겨울 때문이었다. 러시아를 지배해 왔던 정치적인 기류가 오랫동안 그들의 핏속에 남아 흐르는 것도 있지만, 9월부터 4월까지 계속되는 유난히 긴 겨울 탓이다. 이곳은 일 년 내내 눈이 내린다고 말하기도 한다. 내가 간 유월 초에도 버스 창밖에 하얗게 휘날리는 것이 마치 눈발 같아 의아했는데 알고 보니 포플러 나무의 꽃가루였다. 거리엔 마스크를 낀 사람들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알레르기며 기관지 천식을 유발한다는 꽃가루는 그들에겐 봄을 방해하는 또 하나의 겨울 같은 거였다.
겨울은 아무 것도 책임져 주지 않는데 그 때문에 얼굴이 굳을 수도 있다니······.
불가항력적인 겨울 앞에선 견딜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꼼짝 못하고 지내야만 하는 상황에서 고통도 고독마저도 갇혀 버린 느낌이 들지 않았을까. 빠져나올 수 없기에 파고들 수밖에 없는 삶이었을 것이다. 자신만의 견딤의 자세를 선택해야만 했을 것이다. 나라면 어떤 자세 어떤 표정이었을까. 나는 그들을 알아내고 이해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북유럽 여정 중에 내가 가장 기대했던 것 중 하나는 발레의 본 고장 러시아에서 직접 예술의 향기를 맛보는 것이었다. 마침 무대 앞자리 출연자들을 피부로 느낄 수 있는 곳에 좌석을 배정 받았다. 막이 오르기를 기다리는데 가슴이 설렌다. 공기가 바뀔 것이다. 연주자들에 의해 새로워진 공기가 내 속으로 들어와 나를 바꿔 주기를 바라며 호흡을 고른다. 서서히 막이 오르며 빛이 새어나온다. 바로 눈앞에서 오케스트라와 함께 아름다운 선율이 펼쳐졌다. 진지한 그들의 눈빛과 숨결이 느껴진다. 예술을, 삶을 해석하고 표현하기 위해 열중하는 그들의 몸짓이 감동적으로 다가온다. 어둠 속에서 작은 점 하나로 시작된 춤은 서서히 주변을 넓히며 환하게 밝혀나갔다. 발끝으로 마치 지각을 두드리며 봄을 찾아내려는 듯한 발레리나의 몸짓은 막 비상하는 새의 가벼운 깃털이었다. 꽃이 되고 새가 되는 사람들. 무용수들이 무대 위에 수십 송이의 꽃으로 활짝 피어나고 새의 몸짓으로 하늘을 향해 가볍게 날아올랐다. 봄이 온 것이다. 이미 이곳에선 아름다운 봄의 향연이 시작되고 있었던 거다. 겨울에게 점령당하면서도 마침내 피워낸 봄이라는 이름의 춤이었다. 어떤 이는 문학을, 또 누군가는 음악과 미술이라는 그들만의 봄을 피워냈으리라.
공연이 끝나고 나니 시계 바늘이 밤 열 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로비로 걸어 나오는 사람들의 표정이 행복감으로 들떠 있었다. 유럽의 할머니들은 나이가 들면 조금씩 돈을 모았다가 친한 친구들끼리 버스를 대절하여 수개월에 걸쳐 여행 다니는 것을 이생에 마지막으로 누리는 큰 행복으로 여긴다고 한다. 그곳에서도 일행끼리 서로의 손을 잡고 “원더풀”을 외치며 행복한 표정으로 서성대고 있는 할머니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 중에 멋지게 정장을 차려입은 아들에게 자신을 의지한 채 겨우 몸을 움직이는 할머니 한 분이 특히 눈에 띄었다. 삶의 화려한 색깔들이 다 빠져 나간 듯한 백발과 창백한 얼굴에 잔잔한 미소를 띤 그녀의 등 뒤로 백야의 햇살이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나는 그만 내 눈이 찔려버렸다. 때론 인생이 너무나 힘들고 지치고 길게 느껴져 그만 멈추고 싶었을 때는 없었을까. 인생의 봄날은 몇 번이나 맞았을까. 그녀는 행복이 밀려온 이 순간을 조금이라도 더 연장하고 싶을 것이다. ‘백야’ 지는 해를, 짧은 봄을 그 순간만이라도 더 잡고 싶은 심경이 아닐까. 감동의 여운을 놓치기 아까워 한참을 지내다 밖으로 나오니 그제야 해가 지고 있었다. 백야의 황혼은 붉고도 슬픈 빛을 띠고 있었다.
가이드에게 이곳의 예술은 지독한 겨울의 추위와 고독의 산물인 것 같아 가슴 떨린다고 하였더니, 러시아를 제대로 느끼려면 겨울에 와야 한다고 한다. 건축학을 전공하고 러시아의 건축을 더 깊이 공부하기 위해 상트페테르부르크 국립대학에서 고대 러시아어를 전공했다는 그. 열이 많은 체질이라 그런지 차가운 러시아의 기온이 자신에게 잘 맞는다고 한다. 고국이 그리워 찾아가면 처음 일주일 정도는 행복한 흥분에 빠지는데, 시간이 점차 흐르면 복잡하고 무언가에 끄달리는 느낌이 들어 다시 이곳이 그리워지더란다. 외롭고 고독하지만 오롯이 자신으로 있을 수 있는 느낌이 들어 그는 여기가 더 편하고 익숙하단다.
한가한 겨울이면 좋아하는 음악이며, 연극, 발레 공연들을 자주 접한다고 한다. 공연을 보고 돌아오는 늦은 밤, 전차 전깃줄에 대롱대롱 매달려 외롭게 흔들리고 있는 작은 등불 아래, 인적 끊긴 어둑하고 적막한 거리를 혼자 휘적휘적 걷는 기분이란 뭐라고 표현할 수 없는 묘한 맛이라고. 꼭 와서 느껴보란다.
몸으로 감지되는 유형의 봄이 짧기에 무형의 봄을 만드는 사람들. 우리 인생 겨울임을 이미 알고 받아들이고 있는 사람들. 그래서 그들의 예술도 사랑도 그들이 마시는 술도 참으로 뜨거운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때론 인생이 미적지근하다고 느껴질 때 나도 동토에 갇혀 제대로 앓다가 나왔으면 좋겠다. 나의 겨울의 의미는 무엇이며 어떤 자세로 견디며 어떤 봄을 기다려야하는지 알아내고 싶다. 마침내 겨울의 집에서 걸어 나올 때는 고통의 상흔이 남아 있으나 더 깊어지고 성숙된 모습이면 좋겠다. 나의 봄과 당신의 봄이 서로 만나 웃음으로 반겨주는 그런 얼굴들이 넘쳐나는 거리를 상상한다.
이양주 ---------------------------------------------
《수필과 비평》 등단(2012), ‘2014 젊은 수필’로 선정, 계룡수필 문학회 회원, 제8호 인간문화재 이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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