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은 살아있을 때나, 죽었을 때나 그대에게 관여치 않아, 우리의 삶이 건너온 곳으로 다시 건너가는 것일 뿐. 문학은 목숨과 바꾸어도 좋을 만한 황홀한 불꽃이었어. 짧은 인생으로의 긴 여로는 죽음을 피하지 않고 기다리는 거야. 죽어도 괜찮타, 살아도 괜찮타, 운명들이 모두 다 안끼어드는 소리는 마음을 내려놓는, 미련을 내려놓는, 깨달음의 통로야. 수필가 맹난자의 눈빛이 과거를 잊은 듯 흔들린다."
죽음의 성찰과 불교적 사생관死生觀 / 이명진
1. 기행수필의 또 다른 진술
우리의 삶은 언제나 죽음과 손잡고 있다. 우리는 늘 살아있는 생명으로 착각하고 있지만 언제나 죽음을 겪으며 살아간다. 죽음의 시선으로 바라본 우리들 삶속에서 자행되고 있는 집착과 미련, 욕심과 일상의 완고한 끈은, 삶과 죽음은 동전의 양면처럼 결별할 수 없는 사이임을 입증해 주고 있다. 하지만 수필가 맹난자는 《그들 앞에 서면 내 영혼에 불이 켜진다》의 책머리 서두 부분에서부터 몽테뉴에 빠져 들면서 자신의 삶에 천착하고 있다. 또한 풍성한 숲 그늘에서 세차게 울어대는 쓰르라미란 놈의 며칠뿐인 삶에서 우리네 인생길을 성찰한다. ‘인생은 쓰라려 쓰라려 쓰라려’ 그렇게 노래한 일본 시인 이싸[一茶]가 아니라도 수필가 맹난자의 묘지 찾아다니는 버릇은 요원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하면서도 알고 싶어 한다. 이승의 삶을 사는 모든 만물에게 생명이 있다면 죽음 또한 거스를 수 없다. 누구나 겪는 이 행위가 작가에게 특별한 기운으로 다가온 계기는 그녀가 성장해 온 환경과 무관하지 않다.
6·25 피란 중 산골 뒷방에서 본 다섯 살짜리 여동생의 시신, 미명 속에 꼼짝 않고 앉아 계시던 어머니와 그 앞에 흰 천으로 덮여 있는 작은 물체가 보였다. 주검과의 첫 대면이었다. 그로부터 10여 년 뒤 중학생이던 남동생을 잃었다. 자유당 정권의 탄압으로 일찍 옷을 벗어야 했던 아버지의 분노, 실직. 집안의 기둥이던 장남의 급사, 어머니가 정신줄을 놓기 시작하던 무더운 여름, 나는 방문을 닫아걸고 거미줄 같은 원고지 칸에 매달렸다. 고등학교 2학년 때였다. 미8군에서 주는 약을 한 주먹씩 먹으면서 미아리 공동묘지에 누운 동생의 무덤을 어머니 모르게 찾아다녔다. 허난설헌의 〈곡자哭子〉를 그 애에게 읽어주며 오누이의 정을 다지기도 했다. 아무에게도 방해 받지 않는 사자死者의 공간. 그곳에 가면 이상하게 마음이 편안했다.
- 〈그들 앞에 서면 내 영혼에 불이 켜진다〉의 책머리에 중에서
《그들 앞에 서면 내 영혼에 불이 켜진다》의 책머리에서 밝혔듯이 수필가 맹난자는 어린 시절부터 죽음을 바라보며 죽음이란 문제에 붙잡혀 살았다. 그래서 생긴 묘지를 찾아다니는 버릇이, 택지 개발로 쓸려나간 동생 무덤에 대한 보상심리가 작용한 탓이라고 술회한다. 죽음을 알고 싶어서 죽음에 관한 기록이면 무엇이든 밑줄을 긋고 가위로 오려 스크랩해 오는데 20여 년을 보낸 그녀였다. 가슴 아픈 가족사를 숨기지 못한 채, 세계 여러 나라의 작가 52명의 묘지를 기행하며, 박지원의 《열하일기》 이후 새로운 여행기로 수필 문학에 대한 장을 열었다. 그 결과 기행수필 문학이 지닌 장르의 특성을 확고히 적립하는데 한 몫을 기여하게 되었다.
수필이란 인간을 이해하는 인간학이며, 자기고백적인 문학이며, 내용과 형식에 특별히 까다로운 제한 없이 다양한 장르를 흡수 병합시키는 개방성과 잡종성을 지닌 지성과 정서가 결합된 글이다. 비 허구 산문 전체를 가리키는 용어인 수필은 순간적 감정의 소산도, 현학적 지식의 결합물도 아니다. 단지 삶의 과정을 거치며 지니게 된 가슴 속 앙금이며, 먼발치에서 바라본 자기 인생의 축도縮圖라 할 수 있다. 또한 수필은 인생의 한 단면이나 경험 등, 특정한 사건을 통해 현실과 사물에서 유발된 느낌과 견해를 진솔하게 기록한 글이기도 하다. 수필은 나름의 고유한 미적 향기를 담고 있으며, 철학적 원형을 탐색함으로써 인간 본연의 본질인 보편성을 포착하는데 의미가 있다. 참다운 의미의 변화는 발전을 전제로 하며, 새로운 시대에 좀 더 솔직하게 독자에게 다가설 수 있는 통로가 된다. 결국 수필은 주제를 통해 삶에 가치를 부여하는 일과 자연적인 미의식을 전달하여 쾌감을 부여하는 일에 앞장서는 문학이다.
그런 의미로 볼 때 기행수필이 지니고 있는 본질인 여행기는 아주 오래 전부터 존재해 온 형식이지만, 하나의 테마로 쓰여지는 작품은 전문화 시대에 수필의 격을 상승시키는 한 장르로 풀이될 수 있다. 기행 에세이에서 자칫 놓치기 쉬운 작가 나름의 사색이나 성찰이, 전문화된 지식과 현대가 요구하는 방향으로 집필되었을 때, 우리는 필자의 인품과 만나게 된다. 작가가 자기 글에 담아내는 지식과 견문과 호흡은 기행 수필이 지닌 새로운 인격의 진술이다.
‘영혼의 순례, 52명의 작가 묘지기행 1·2’에서 그들이 죽음에 이르는 최후의 모습은 어떠했으며, 작품 속에 나타난 사생관死生觀은 무엇인지 수필가 맹난자는 철학적 사고와 불교적 화두로 궁금증을 풀어나갔다. 《그들 앞에 서면 내 영혼에 불이 켜진다》에서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은 수필가 맹난자의 불교적 세계관과 철학적 통찰이다. 그녀는 종교문학의 핵심적 과제인 사생관을 동서양의 작가 묘지 기행을 통해 문학적 영토에서 단아한 문체로 엮어 나가고 있다. 수필가로서 지녀야할 핵심 과제인 세계관과 자기 성찰을 죽음과 직관되는 묘지 찾기에서 인생 전체의 통일적 이해를 구축함으로써 독자들에게 기행수필의 또 다른 확장을 느끼고 체험하게 만들었다. 다음 장에서는 생生과 사死를 포함한 작가의 문학적 열정에 주목해 볼 일이다.
2. 몽테뉴의 《에세》를 통한 무아설無我說
프랑스 철학자이며 문필가인 몽테뉴(Michel Eyqueme de Montaigne 1533-1592)는 1580년 47세에 간행한 그의 저서 《에세essais》라는 수상록으로 수필의 시조로 불린다. 수필가 맹난자는 몽테뉴를 첫 장에 올려놓으므로 ‘죽음’에 대한 성찰을 그녀 특유의 사유로 이야기 하고 있다.
수필가 맹난자는 자신도 모르게 죽음에 대해 이끌려 들어 갈 때마다 몽테뉴의 글을 읽고 공감하며 깨우쳤다. 〈죽음이란 우리의 삶이 건너온 곳으로 다시 건너가는 것일 뿐〉에서 그녀는 몽테뉴의 사생관을 인용하고 있다.
그것은 그대들의 할 탓에 따라서 좋기도 하고 나쁘기도 한 것이니까. 죽음은 그대가 살아 있을 때나 죽었을 때나 그대에게 관여하지 않는다. 살아 있을 때에는 그대들 생존해 있으므로, 죽었을 때에는 그대들 벌써 이 세상에 없으므로. 아무도 그 마지막 때가 되기 전에는 죽지 않는다. 그대가 남겨 놓고 가는 시간은 그대가 출생하기 전의 시간과 마찬가지로 본래 그대의 것이 아니었다. 그 둘 다 그대의 것이 아니다.
-〈죽음이란 우리의 삶이 건너온 곳으로 다시 건너가는 것일 뿐〉몽테뉴 중에서
생과 사는 우리들에게 전혀 관여치 않고 있다. 그것은 이미 우리의 몫이 아니기 때문에 인생 그 자체로서 좋을 일도 나쁠 일도 없다는 사실이다. 결국 장자莊子의 시구에 작가의 생각은 멈춰 버린다. 삶도 죽음도 없다는 세계, 인생으로서 생(生)하고 늙[老]고, 병[病]들고, 죽[死]는 과정을 거치지 않는 사람은 없다. 아무리 의학이 발달했다고 해도 인간의 불사영생不死永生은 실현될 수 없을 터다. 자연물 또한 무상함을 벗어날 수 없다. 거대한 천체로부터 작은 티끌에 이르기까지 이 세계안의 모든 존재는 생(生)하고, 머물[住]고, 달라[異]지고, 없어[滅]지고 만다. 이러한 불교적 사생관으로 16세기를 살다간 몽테뉴를 장자로 연결 짓고 있는 작가의 세계관은 시나브로 노자의 자연설과 이어진다.
‘자연 안에 고통이 있으면 치유가 있고, 죽음이 있으면 새로운 탄생이 있다. 모든 일상은 돌고 돌며 끝없이 원을 그리며 이어진다. 몽테뉴는 삶이 고통의 연속임을 경험했고, 세상이 대립과 갈등과 투쟁의 장임을 보았다. 하지만 그는 절망하거나 탄식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자연은 돌고 도는 수레바퀴와 같고, 고통 뒤에는 평안과 기쁨이 찾아올 차례임을 알기 때문이었다.’ 수필가 맹난자의 몽테뉴를 바라보는 시선은 언제나 따뜻하고 애틋하다. 늘 가슴속에 남다른 비애를 안고 살아온 그녀는 죽음과 친해질 때,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자신의 가족사를 토대로 고백하고 있다. 병도 고통도 근심도 번뇌도 모두 덜어 내리면 완전한 자유에 머물 수 있다. 작가는 죽음이란 결국 자연에 순응하고 따르는 일임을 독자들에게 자각 시켜 준다.
몽테뉴의 삶의 지혜는 결국 ‘즐기자, 떳떳하게 즐기자.’로 요약된다. 그는 스스로 쾌락주의자임을 자랑스레 선포한다. 처음에는 금욕주의적인 스토아 철학에 경도되었으나 눈앞의 현실을 외면하고 육체를 경멸하며 이성과 의지로써 인간 본성을 극복하는 데에 행복이 있다고 주장하는 거기에서도 벗어나게 된다. 죽음을 염두에 두고 대비하라는 금욕주의의 가르침과는 정반대로 몽테뉴는 죽음과 고통 따위는 자연에 맡기고 쓸데없는 걱정은 하지 않는 편이 낫다는 자연회귀를 택한다.
-〈죽음이란 우리의 삶이 건너온 곳으로 다시 건너가는 것일 뿐〉몽테뉴 중에서
불교에서 말하는 ‘나’는 상일성常一性을 가져야 한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나’의 심신은 시시각각으로 변해가지만 ‘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이 ‘나’이다. ‘나’는 육체적, 정신적 현상의 배후에 있는 본체요, 생명의 본질과 같은 이치다. 내가 지녀야 할 또 하나의 성질은 주재성主宰性이다. ‘남’은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없지만 내 자신은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있고, 남의 소유는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없지만 ‘나’의 소유는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에게는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주재성이 있어야 한다. 이렇듯 불교의 무아설無我說은 ‘나’의 절대적인 부정에 있지 않고, 참다운 ‘나’를 찾게 하기 위한 기초 작업인 셈이다. ‘나’ 아닌 것을 ‘나’로 착각하고 있다면, 참다운 ‘나’는 그러한 착각의 부정을 통해서만 나타날 터다. 그러기에 중년의 몽테뉴가 ‘나는 무엇을 아는가?’를 좌우명으로 삼으며 회의론에 기울었다가 말년에는 자신의 체험과 독서생활을 바탕으로 천성에 따라 자연을 즐기는 에피큐리언이 된 사실은 불교의 무아설과 무관하지 않음을 수필가 맹난자는 이미 간파했다.
나는 무엇을 아는가? (Que Sais je?)
이 물음은 그의 영원한 화두로서 모든 것을 시험하고 검증한다는 회의주의에 기울게 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책 제목을 ‘실험’ 또는 ‘시험’을 의미하는 《에세(essais)》라고 붙인 것만 봐도 그의 의도를 짐작할 수 있다. 몽테뉴는 ‘피롱파’라 불리는 철학자들과 만난다. 그들은 어떤 종류의 확실성도 인정하지 않으며 단정적으로 결론짓기를 거부하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회의주의자들이었다. 몽테뉴는 회의에 대해 “곧고 굽힘이 없는 판단의 자세”라고 정의하며 “모든 사물을 받아들이되 집착하지도 동의하지도 않는다.”고 하였다.
-〈죽음이란 우리의 삶이 건너온 곳으로 다시 건너가는 것일 뿐〉몽테뉴 중에서
모든 얽매임과 집착에서 놓여나는 자유로움은 무아설의 목적인 참다운 ‘나’를 찾는 일과 연결된다. 참다운 ‘나’란 도대체 어떤 것인가? 어떠한 욕망도, 두려움도, 의심도 없는 경지에 도달해 해탈을 얻어낸 성자처럼 자유인이 되어버린 사실은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마지막 지성소至聖所이기 때문이라고 그녀는 인식한다. 그러기에 《에세》의 주요 테마가 죽음과 고통에 관한 성찰로 이루어 질 수밖에 도리가 없다.
1580년에 출판된 《에세》 제1권과 제2권은 총 94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여기에 실린 글들은 여러 가지 일화에 짤막한 결론을 덧붙인 형식으로 장의 길이가 짧고 비교적 비개인적이다. 가장 흥미로운 사실은 당시 몽테뉴를 사로잡고 있던 모순과 야망, 고통과 죽음의 문제들을 드러낸 부분이다. 그때까지 라 보에티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한 몽테뉴는 인생을 고난에 에워싸인 고통으로 간주했다. 하지만 고난에 저항하기 위해 이성과 의지를 동원하기로 결심하고 인간의 지식을 공격했지만, 자아에 대한 인식까지 공격하지는 않았다. 1578~80년의 《에세》에서는 낙천적 견해가 주조를 이루고 있다. 그러한 실천은 1578년 여름에 신장결석의 통증을 느끼기 시작하면서 이루어졌다. 아버지의 지병이기도 했던 병이 언젠가 자신에게도 나타날지 모른다고 두려워했다. 그는 그 두려움에 비하면 고통은 아무것도 아니며 어느 정도 다스릴 수 있다는 이유를 깨달음으로써, 초연한 경지에 이르렀다.
몽테뉴는 예측하지 않은 순식간에 찾아오는 죽음을 바랐다. 심지어 그것을 ‘이상적인 죽음’으로 생각했으며 멋진 죽음이란 ‘사람들에 둘러싸여 임종을 맞는 것이 아니라 혼자 죽어가는 것’이며 자신이 꿈꾸는 죽음은 ‘내 집을 나가 내 식구들과 멀리 떨어져서 침대위에서 보다는 차라리 말위에서 죽고 싶다’고 했으나 그렇게 되지는 않았다. 그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 가족들에게 둘러싸여 1592년 9월 13일 자신의 2층 침실에서 후두염으로 사망했다. 죽기 며칠 전부터 몽테뉴는 설염을 앓아 말을 할 수 없었다. 자신의 사후 처리에 대해서는 마음대로 처리하라고 했다.
- 〈죽음이란 우리의 삶이 건너온 곳으로 다시 건너가는 것일 뿐〉 몽테뉴 중에서
몽테뉴는 인간이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때 행복해질 수 있다고 믿었다. 인간 이상의 존재가 되려고 애쓰는 일은 위험한 유혹이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일이야말로 자기개선의 전제 조건이라 믿었다. 몽테뉴의 궁극목표는 진리와 조화였다. 몽테뉴는 질병을 통해 고통을 쾌락과 서로 의존하는 관계로 받아들이고 고통과 쾌락을 조화시키는 법을 배웠다. “신이 우리에게 생명을 주고 기뻐하셨듯이 나는 삶을 사랑하고 삶을 즐긴다”고 그는 말한다. 《에세》의 마지막 부분은 삶에 대한 고마움을 노래한 찬가였다. 그러기에 ‘에세이’를 선물한 최초의 에세이스트인 몽테뉴 선생에게 던지는 수필가 맹난자의 질문과 충정어린 묵념은 정중할 수밖에 없다.
‘죽음은 살아 있을 때나, 죽었을 때나 그대에게 관여치 않는다니… 왜냐하면 둘 다 그대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3. 모성 결핍이 빚어낸 고통의 의미
〈목숨과 바꾸어도 좋을 만한 ‘그 황홀한 불꽃’〉은 일본의 근대 소설가인 아쿠타가와 류노스케[芥川 龍之介](あくたがわ りゅうのすけ 1892년 3월 1일-1927년 7월 23일)의 슬프고도 처절한 삶과 죽음을 추적해 보는 작품이다. 젊은 나이에 요절한 천재 작가란 호칭이 따라 붙고 있는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그를 수필가 맹난자는 자신 안에 내재되어 있는 슬픔을 치유하는 동병상련의 동반자로 술회하고 있다. 그를 더듬어 갈수록 그녀는 자신의 가족사와 닮은 비애에 가슴 아파 한다.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는 1892년 3월 1일 도쿄 교바시[京橋]의 이리후네 정[入船町]에서 니바라 도시조[新原敏三]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용의 해, 용의 달, 용의 날, 용시[辰年辰月辰日辰時]에 태어났다고 하여 류노스케라는 이름이 지어졌다. 생후 7개월 경, 어머니가 정신이상을 일으켜 외삼촌인 아쿠타가와 도쇼[芥川道章]의 양자로 가게 되었다. 어머니의 광기가 유전될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은 평생 그를 괴롭혔고 결국 그를 자살로 몰고 가는 하나의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목숨과 바꾸어도 좋을 만한 ‘그 황홀한 불꽃’〉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중에서
〈목숨과 바꾸어도 좋을 만한 ‘그 황홀한 불꽃’〉이란 작품에서 우리는 자살을 선택한 천재 작가의 고통과 만난다. 삶의 회의로 허덕이는 젊은 작가의 내면에는 어쩔 수 없이 웅크리고 있는 가족사와 되돌리고 싶지 않은 어린 시절의 기억들이 거머리처럼 붙어 다닌다. 아쿠타가와의 삶은 일본의 관습인 액년에 태어난 아이라 훗날 다가 올 큰 불행을 막기 위해 교회 앞에 버려지면서부터 시작된다. 하지만 운명의 신은 사람보다 영특했는지 모른다. 그의 부모들의 연극 같은 계략에 신은 넘어가지 않은 듯, 아쿠타가와의 생애는 작가로서 성공적이었지만 평범한 삶은 늘 거부당했다. 그의 운명은 소용돌이치는 너울처럼 두려움으로 점철되었다.
그의 어머니는 왜 광인이 되었을까? 어머니 후쿠가 죽은 나이는 43세였다. 딸 둘을 낳은 뒤 막내로 아들을 낳았지만 그가 태어나기 전 해에 큰딸을 잃고 만다. 바라던 아들이건만 액년에 태어난 자식을 ‘버린 자식’으로 만들어 거리에다 내다 버린 슬픔. (핏덩이를 내놓기엔 여간 쌀쌀한 날씨가 아니었다.) 그런 후쿠의 불안 위에 석 달쯤 지나서 그녀가 제일 의지하며 좋아하던 오빠가 갑자기 죽었다. 오빠 도오토쿠가 죽은 지는 다섯 달, 아쿠타가와가 생후 7개월이 되던 때 갑자기 정신착란 증세를 일으킨 것이다. 그 이면에는 새롭게 떠오르는 사업가로서의 남편은 방탕한 생활을 하며 아쿠타가와와 같은 나이의 서자가 있다는 것이 전해졌다. 이 모든 것이 마음의 병이 되어 몸 상태가 좋지 않은 산후와 겹쳐 그런 상태에 이른 것으로 보인다.
-〈목숨과 바꾸어도 좋을 만한 ‘그 황홀한 불꽃’〉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중에서
아쿠타가와는 자신이 규정한 운명의 조건인 ‘유전, 환경, 우연’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그는 자라면서 미치광이의 자식이란 자각에 괴로워했다. 작가로서 발광發狂이 찾아오면 정상적으로 사고할 수 없음을 모파상과 고골과 조나단 스위프트와 친구 우노 고지를 통해 확인한다. 그가 자신에게 발광이 찾아오기 전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수필가 맹난자는 술회한다. 아쿠타가와의 어머니가 10년을 산송장으로 살아왔던 공포 속에는 수필가 맹난자의 숨겨져 있던 기억 속 어머니 모습 또한 닮은꼴을 하고 있다. 아쿠타가와의 ‘단지 발광이냐 자살이냐?’의 자학 안으로 그의 나이를 두 배 이상 살고 있는 그녀의 암울한 가족사가 겹치며 묘지 기행에 대한 집착을 견고하게 했다.
여자의 생애 중 자녀의 참척과 남편의 외도만한 상처가 또 어디 있으랴. 어린 두 아들의 참척, 게다가 어머니는 6. 25 피란 중 다섯 살짜리 딸 하나를 거적에 싸서 내다버려야 했다. 분방한 아버지의 외도를 안으로 삭이며 감정을 드러내지 않던 어머니가 어느 날인가부터 이상해지기 시작했던 내 어린 날을 떠올리게 했다. 내 여동생과 동갑의 이복동생은 쌍둥이로 입적되어 취학통지서를 받을 수 있었다. 그의 생모처럼 내 어머니도 좀처럼 말씀이 없는 분이었다. 나는 천재적인 작가로서의 아쿠타가와를 물론 좋아하지만 내 무의식은 광인의 어머니를 둔 그의 고통에 동참된 것이 아니었나 싶기도 했다.
-〈목숨과 바꾸어도 좋을 만한 ‘그 황홀한 불꽃’〉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중에서
7월 24일은 아쿠타가와가 죽은 날이기도 하지만 수필가 맹난자의 어머니 기일이기도 하다. 그래서일까. 그녀는 아쿠타가와에게 더욱 연민의 정을 느낀다. 빈집에서 혼자 운명하셨던 어머니의 사인을 의사는 심장마비라 진단 내렸지만, 그녀는 자살이 아닐까 의심한다. 그녀의 마음 깊숙이 스며있는 죽음의 그림자들은 자살로 생을 끝낸 수많은 작가들의 고통을 되새기게 하며 그들의 문학과 죽음을 이해하게 만든다.
피란 중에 내다 버린 여동생, 뇌염으로 죽은 남동생, 어머니의 죽음뿐 아니라 그녀가 좋아하는 작가들 대부분은 여름에 죽었다. 그들의 죽음을 통해 그녀는 슬픔을 치유하면서 인생을 쓰다듬는 버릇을 키워 왔다. 아쿠타가와를 이해하는 순간, 그동안 발설하지 못했던 아픔을 털어 놓으며 그녀 자신도 수필 문학의 정점에 꽃을 피웠다.
아쿠타가와의 작품은 대부분이 단편 소설이다. 작품 속 주인공의 직업은 작가로서 아쿠타가와 자신과 흡사하다. 그의 작품 근저에는 친부와 양부인 두 명의 아버지와 생모, 양모, 계모, 이모인 네 명의 어머니 사이에서 인간에 대한 회의가 짙게 깔려 있다. 하지만 그의 끊임없는 인간 불신에 대한 탐구가 문학 혼으로 황홀하게 불타오르는 계기가 되었으니 인생은 아이러니가 분명하다.
‘마르고 가녀린 옆얼굴’이라는 구절에서 나도 내 어머니의 얼굴이 떠올랐다. 이북(통천)에 친정을 둔 어머니는 외톨이로서 언제나 홀로였고 담배로 가슴에 시린 한을 풀어내던 옆모습이 후쿠와 겹쳐졌다. 동병상련이랄까. 이 대목에서는 나도 어쩔 수 없이 감상적으로 되고 만다. 어머니도 후쿠처럼 50을 못다 채우고 황망히 이승을 떠나셨다.
-〈목숨과 바꾸어도 좋을 만한 ‘그 황홀한 불꽃’〉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중에서
아쿠타가와와 수필가 맹난자의 어머니 모습은 늘 처절하다. 그들의 어머니는 여자의 일생 중, 한 가지 쯤 비껴가도 괜찮은 사연을 절절이 감내하며 살다간 분들이다. 그래서인지 그들 어머니의 모습은 작가라면 글로 표현해야 될 숙명 같은 예술혼을 남겨 주었다. 수필이 지닌 묘미가 자기 고백성에 있다고 볼 때, 감춰 두었던 아픔을 들춰내 놓는 일이 쉽지 않을 터이다. 그래도 용기를 낸 그녀에게 경도되어 맹난자란 이름 앞에 굳이 ‘수필가’란 호칭을 붙이고 싶어졌다.
수필은 인생의 한 단면이나 특정한 사건을 통해 현실과 사물에서 유발된 느낌과 견해를 기록한 글이기에 수필가 맹난자의 면면을 들여다보는데 좀 더 진솔해 질 수 있다. 그녀의 사색에 근간은 불교 철학이다. 간결하면서도 시적인 문체와 삶과 죽음을 주제로 한 작품의 저변에는 언제나 불교적 사생관이 자리한다.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목숨과 바꾸어도 좋을 만한 ‘그 황홀한 불꽃’〉에서도 비껴 갈 수 없는 주제가 문학과 죽음과 고통이다. 아쿠타카와 류노스께는 자신의 삶을 ‘패배’로 규정짓고 자살로 마감했지만, 그의 예술지상주의적인 탐미정신은 삶보다 항상 우선 순위였다.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영원하다고 믿는다면 괴로움이 생긴다. 우리가 현재 가지고 있는 모두가 곧 사라진다고 깨닫는다면 욕망과 그 욕망이 빚어내는 고통은 더 이상 우리를 괴롭히지 못할 터다. 하물며 사람의 육신이야 죽음을 맞이하게 되면 한 줌 흙으로 돌아가지 않겠는가.
오스카 와일드가 선언한대로 아쿠타가와는 ‘예술을 위한 예술’을 지향하며 미美의 이면에 숨겨진 악마적인 것을 파헤치려고 했다. 그는 세기말 풍조에 이렇게 동조하면서 예술로써 인간 불신의 사바고裟婆苦를 극복하고자 애썼다. 아쿠타가와는 인생의 지루함을 깊숙이 꿰뚫고, 보잘것없는 일상사를 초극해 나가는데 예술의 효용성이랄까, 거기에 가치를 두고 인생의 지루함을 예술로써 극복하고자 하였다. 작가의 ‘진짜 인생의 증명’은 쓴다는 행위 속에서만 존재하고 나머지 일상생활은 모두 인생의 번뇌에 지나지 않는다며, 창조 행위에만 절대 가치를 부여했던 사람이었다.
-〈목숨과 바꾸어도 좋을 만한 ‘그 황홀한 불꽃’〉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중에서
오직 글을 쓰는 일만이 유일한 삶의 이유였던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그의 준비된 자살은 가족도 버리고 자신도 버릴 만큼 눈물겨웠다. ‘아무것도 바라는 것이 없었다’라는 그의 말은 어머니로부터 사랑 받아 보지 못한 아들의 마지막 고통의 의미이며 번뇌를 벗어버리는 자연인의 외침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그가 남긴 작품들은 황홀하게 불타오르며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의 참회 메시지로 우리 곁에서 회자되고 있다.
4. 깨달음의 통로로서 문학과 죽음
‘생각하고 궁리하다 알게 된 것’이란 듯의 ‘깨달음bodhi’이라는 말은 인간이 스스로의 노력으로 마침내 진리를 발견한다는 불교적 의미를 담고 있다. 부처님께서 가르친 깨달음이란 탐진치에서 벗어남을 말한다. 탐욕, 분노, 어리석음이란 인간의 모든 번뇌의 원인이 되는 일들을 압축하여 표현하는 술어라 할 수 있다. 탐욕은 내 것, 남의 것에 집착하는 성향에서 빚어지는 모두를 포함한다. 분노는 내가 존재하고 살아있음을 방해하는 모든 의식작용들을 포함한다. 어리석음이란 바른 법에 무지한 채, 자아의 집착이 일으키는 모든 사물들에 얽매여 살아가는 인간의 허망한 인식 모두를 말한다. 이들이 탐욕과 분노를 일으키게 하는 근본원인의 바탕이 된다. 어리석음의 벽이 너무나 두터워 인간은 자아라는 족쇄에 갇혀 살 수밖에 없다. 이것이 바로 괴로움이다. 인간의 속성에서 어리석음 따로, 탐욕 따로, 분노 따로 떼어놓고 보는 일은 불가능하다. 그런 의미로 만날 수 있는 서정주와 유진 오닐은 수필가 맹난자에게 아주 특별하다.
〈괜찮타… 운명들이 모두 다 안끼어드는 소리〉는 미당 서정주 선생의 죽음을 탐구하는 작품이다. 미당 선생은 85세를 일기로 영면에 드시는 동안 ‘친일과 신군부와의 타협’이란 질책과 폄하가 끊임없이 따라 다닌 탓에 노후가 적막하기 그지없었다. 수필가 맹난자는 살아생전 친분을 교류 했던 미당 선생이었기에 그의 죽음이 더욱 애절하다. 1939년에 쓰여진 〈자화상〉이란 시를 만나면서 그녀는 미당 선생은 어떤 변명도 사과도 대립심마저도 모두 놓아버렸음을 깨닫는다. 그 순간 미당 선생의 문학 혼은 ‘나는 괜찮다’는 자성의 깨달음으로 들려온다.
미당 선생은 마침 영어로 된 성서를 읽고 계셨는데 P 시인을 향해 “불교와 똑같아요.” 이 두 가지가 모두 평등하다는 말씀을 하시더라는 것이다. 《법화경》의 궁자窮子의 비유와 《성경》의 100마리 중 집을 나가 잃어버린 그 한 마리에 대한 비유가 똑같더라는 취지였다고 한다.
나는 요즘 대가들의 노후에서 대가大家다운 커다란 하나의 융합을 발견하는 기쁨을 맛본다. 미당 선생은 불교로 들어가서 성경을 이해하며 나오고 일본의 작가 엔도 슈샤쿠는 기독교로 들어가서 불교를 수용하며 나오는 모습에서 원융 무애한 두 작가의 범세계관을 엿볼 수 있어 크나큰 정신의 광휘에 취하게 한다.
-〈괜찮타… 운명들이 모두 다 안끼어드는 소리〉미당 서정주 중에서
위의 글에서 암시하듯, 수필가 맹난자는 대가들의 노후에서 마음을 비우고 내려놓는 하심下心의 방법을 터득한다. 사람들은 경전이나 성서의 해석에 있어서도 그 글이나 말 뒤에 들어 있는 뜻을 망각하고 하나의 비유에 지나지 않는 표면적인 언어에 더 집착한다. 종교는 인간이 보다 지혜롭고 자비스럽게 살기 위해 사람이 만들어 놓은 하나의 ‘길’이며 ‘진리’이다. 자연히 수필가 맹난자는 미당 선생의 삶을 통해 집착하는 마음을 놓아 버리라는 방하착放下着의 이치를 곱씹는다.
우리는 처음 이 세상에 왔을 때나 마지막 이 세상을 떠날 때나 빈손으로 왔다 빈손으로 떠나야 함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우리들 삶은 태어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본래 빈손을 채우며 사느라 급급했다. 부와 명예와 권력과 지식과 이성을 붙잡으려 아등바등 살다 떠난다. 무한히 매달리고 붙잡으려는 삶 속에서는 괴로움이 버티고 있다. 결국 방하착이란 모든 집착을 내려놓고 내 안의 ‘참나’를 찾으라는 말이다. 그랬을 때 우리가 맞닥뜨려야 하는 죽음을 환영할 수 있지 않겠는가.
어느 누구도 감히 따르기 어려운 선생의 폭넓은 시 세계. 시공을 초월한 빠른 시적 변모. 창작의 새로운 변장술 시도. 모국어를 가장 아름답게 빛낸 ‘부족 방언의 마술사.’ 다섯 차례의 노벨 문학상 후보자. 어떠한 지칭으로도 선생의 전부를 표현할 수 있겠는가?
-〈괜찮타… 운명들이 모두 다 안끼어드는 소리〉 미당 서정주 중에서
그랬다. 미당 선생의 〈자화상〉이 어떤 비난에도 불구하고 우리들 가슴에 와 꽂히는 이유는 그의 문학에 대한 열정만큼 스스로 ‘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질마재 품안으로 돌아가 깨달음을 얻은 채 한 줌 흙으로 돌아간 사실이다.
〈짧은 인생으로의 긴 여로〉는 유진 오닐(Eugene O’Nell 1888-1953)의 불운한 삶과 죽음을 그의 자전적 연극 《밤으로의 긴 여로》를 중심으로 수필가 맹난자가 잃어버렸던 과거로의 여행을 탐색한 작품이다.
살아서 삶의 행적이 중요한 것이지 들에 내다 버린들 한갓 헌옷에 지나지 않는 시신 따위가 무엇을 알겠는가 싶다. 그러나 내게 영혼의 깊이를 더해 준 작가 시인들의 무덤은 내게는 성지나 다름없다고 생각했다. 그들이 남긴 불꽃같은 정신을 찾는 내게 그들이 묻혀 있는 유택은 또 하나의 생명을 창조하는 진흙이나 다름없었다.
-〈짧은 인생으로의 긴 여로〉 유진 오닐 중에서
수필가 맹난자는 작가들의 죽음과 유택을 쫓아다니며 깨닫는다. 자신들의 삶보다 문학을 더 중시하고 예술혼에 불을 지피기 위해 글 쓰는 일에 완벽을 추구했던 천재 작가들의 행보는 그래서 더욱 아름다웠다. 그들의 살아서 삶은 지치고 힘들었겠지만 수필가 맹난자에게 영혼의 깊이와 살아있음에 감사할 줄 아는 마음의 정도를 깨닫게 해 준 작가 시인들의 무덤은 그녀에게 성지로 남을 수밖에 없다.
어둠에 잠겨 버리는 몬테크리스토 커티지 앞에 서서 나는 40년 전, 그날의 무대 《밤으로의 긴 여로》를 회상했다. 이 작품을 쓰는 동안 저녁때면 울어서 눈이 빨개진 채, 서재에서 나왔다는 그의 모습을 상상하면서 삼선교에서부터 종로4가까지 히로뽕을 사기 위해 울면서 걸었던 내 어린 시절이 떠올라 목구멍까지 울음이 차올랐다. 가운의 몰락과 동생의 죽음으로 어머니는 다급하게 약을 찾았고, 그 와중에서 나는 한 주먹씩 먹어야 했던 파스와 나이드라지드. 오닐의 고통에 무심히 지나칠 수 없었던 내 아픔을 이제야 털어놓는다.
-〈짧은 인생으로의 긴 여로〉 유진 오닐 중에서
위의 글은 유진 오닐의 죽음과 묘지기행을 다룬 〈짧은 인생으로의 긴 여로〉에 나오는 결미 부분이다. 오닐은 호텔 방에서 태어나 호텔방에서 죽음을 맞이한 불운한 천재였다. 오닐의 고통은 《밤으로의 긴 여로》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그의 가족사와 가족관계를 중심으로 쓰여진 작품은 공연장에서 대 성공을 거두며 노벨 문학상과 퓰리처상까지 수상하는 영광을 안겨 준다. 하지만 천재들의 삶은 평탄하지 않음을 우린 앞의 작가들에게서 충분히 느껴왔다. 그 검은 불운의 그림자를 오닐도 피해 갈 수 없었다. 문학에 대한 열정이 극도에 달하는 정점에서 그는 불치의 병마와 투쟁하게 된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의 작품 생활은 유지하기 힘들어 진다.
수필가 맹난자는 오닐의 죽음을 더듬으면서 마치 그녀 집안의 가족사가 겹쳐져 연극을 끝까지 보기 어려웠다고 고백한다. 《밤으로의 긴 여로》를 쓰는 동안 저녁때면 울어서 눈이 빨개졌다는 오닐의 아픔과 어머니를 위해 히로뽕을 사려고 울면서 삼선교를 걸었다는 그녀의 통한이 아스라이 날아와 살아 있는 이유에 대해 감사한 마음이 들도록 만든다.
죽음은 살아있을 때나, 죽었을 때나 그대에게 관여치 않아, 우리의 삶이 건너온 곳으로 다시 건너가는 것일 뿐. 문학은 목숨과 바꾸어도 좋을 만한 황홀한 불꽃이었어. 짧은 인생으로의 긴 여로는 죽음을 피하지 않고 기다리는 거야. 죽어도 괜찮타, 살아도 괜찮타, 운명들이 모두 다 안끼어드는 소리는 마음을 내려놓는, 미련을 내려놓는, 깨달음의 통로야.
수필가 맹난자의 눈빛이 과거를 잊은 듯 흔들린다.
이명진 ------------------------------------------------
《해동문학》 수필부분 신인상, 《수필과 비평》 평론부분 신인상, 동국대학교 문화예술 대학원 석사, 수필집 《창밖의 지붕》,《탈출기》, 《물색없는 사랑》, 평론집 《수필로 말하기》. 공저 《맑고 아름다운 향기》 외 다수, 논문집 《법정 수필 연구》 등, 경기도 문학상, 성남 문학상, 제4회 풀꽃 수필 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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