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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 계간문예 2014년 봄호, 이 계절의 시] 관계의 우물 - 박수빈

신아미디어 2015. 1. 28. 12:35

"살핀 다섯 편의 시들은 욕망과 자유의 상관성을 언급하고 있다. 이 둘과 연동되어 양립 불가능성을 주장했던 프로이트가 생각난다. 그는 일찍이 인간이 욕망에 대해 얼마나 수동적이고 자유롭지 못한지 증명했다. 개체를 보존하고 성관계를 통해 생식하며 결국 죽음을 향하는 유기체의 본능으로 욕망을 이해했다. 이렇게 인간의 욕망은 생명의 필연 법칙으로부터 파생된 것이므로, 욕망 속에서 인간은 결코 자유로울 수 없고 이를 억제하거나 그로부터 벗어나는 순간에 자유를 획득한다고 하였다."

 

 

 

 

 

 

 관계의 우물       박수빈

 

   그리스인들은 예로부터 도서관을 ‘영혼의 의학’이라고 부른다. 책이 상처 입은 영혼을 정화한다고 믿고 잠언이나 시를 가까이 해왔다. 그래서 그런지 시를 읽다가 화자의 아픈 목소리를 자주 듣게 된다. 화자는 비유적으로 돌려 말하므로 일반 논리의 관점에서 두서가 없거나 어려울 수 있지만, 시가 보여주는 상상의 통로를 따라 다양한 ‘문학적 경험’을 하게 되면 삶의 의미가 깊어진다.
   상상력과 재구성을 동원하여 시인은 구태의연한 표상으로부터 갈등하는 세계를 보여준다. 참신한 표현과 심미적인 방안으로 열린 지평을 획득할 때 독자는 공감한다. 답답한 일을 토로하며 억압된 감정이 해소되는 ‘카타르시스’ 효과가 있는 것이다.
   돌이켜보면 사람은 많은 끈으로 연결되어 산다. 혈연, 지연, 학연 여러 인맥에서 소통의 부재를 호소하는 사람들이 많다. 정작 ‘일’보다 ‘인간관계’ 때문에 힘들다고 한다. 상대방이 나를 오해했을까, 혹시 배신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사람들로부터 자신을 고립시킨다. ‘관계’는 사람이 살면서 겪는 수많은 욕망과 갈등 중 빼놓을 수 없는 키워드이자 극복했을 때에는 성공과 행복으로 이끄는 요소다. 상처 때문에 사람들과 거리가 생기면 외롭다. 원하거나 그렇지 않거나 인간은 서로 연결되어 있고 상처를 주는 것도 인간이지만 상처를 치유하는 것도 인간이라는 사실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일상은 욕망의 실현을 갈급하고 예술은 인간관계에서 생기는 억압을 해체시키며 위안의 기능을 한다. 이 상호작용은 우물과 같아서 비춰진 대상의 깊이와 둘레의 파장이 따른다. 그렇다면 이 자리에서 시의 여러 역할 중에서 고백을 통한 치유를 짚어보는 것도 의미가 있겠다.
   지난 계절에 발표된 시들을 두루 살펴볼 때 어두운 정서의 대변이 다수이었다. “비극은 드라마적 형식을 취하고 연민과 공포를 환기시키는 사건에 의하여 카타르시스를 행한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을 상기해 본다. 먼저, 이 시대의 권태를 이끌고 살아가는 자화상을 만나 보자.

 

   오후 세 시가 지나간다 슬리퍼를 질질 끌고 지나치게 바싹 구워진 식빵 귀퉁이를 건드리며 불어터진 라면의 면발을 기웃거리며, 오후 세 시를 냉장고에 넣고 싶어 초파리가 날아와 시큼한 시간 속을 들여다 볼 때 누군가 몰약같은 졸음을 흔들어 깨울 때 오후 세 시는 지나간다 주파수가 맞지 않는 라디오에 앉아 창밖 나무에 이는 바람에 숨어 현관의 잠금장치를 들여다보며 너의 부재를 나의 부재를 확인할 때 택배 아저씨가 투덜거리며 소화전의 보관함을 열 때 세 시는 누구에게도 배달되지 않는 시간 기억되지 않는 시간 증발하는 시간 지루한 대본처럼 어떻게 연출해도 아귀가 맞지 않는, 내 손에 붙들려 냉장고 안에서 잠든 미라처럼 피 한 방울 없는

— 김지요, 〈냉장고를 여세요〉(‘계간문예’ 2013년 겨울호)

 

   화자는 지금 무료한 오후 세 시를 보내고 있다. “질질” 끄는 “슬리퍼”, “지나치게 바싹 구워진 식빵 귀퉁이”, “불어터진 라면의 면발” 등의 적절한 비유가 이를 대변한다. 그래서 화자는 지루한 시간을 냉장고에 넣고 싶어 한다. 이는 “너의 부재를 나의 부재를 확인”하는 심정이라 독자는 안으로 갇힌 존재의 심연을 마주하게 된다. “어떻게 연출해도 아귀가 맞지 않” 으니 여러 관계가 어긋나 있다.
   “현관의 잠금장치를 들여다보며 너의 부재를 나의 부재를 확인”하는 부분에서는 내면의 억압이나 결핍에 따른 절연과 부재가 발견된다. 정신분석학적으로 억압은 불안에 대한 기본적인 방어기제로 작용한다. 일상의 우리는 의식이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나 욕망을 무의식에 눌러 버린다. 무의식에 있던 트라우마는 육체에 가해지는 상처에서 정신으로 파급된다.
   어떤 사건을 충격적으로 겪은 주체의 무의식에는 억압이 생기고 잠복기를 거쳐 신경증으로 발전하며 여러 증세가 나타난다. 의식적으로 기억하고 싶지 않은 과거의 사건을 반복적으로 경험하게 하는 노이로제는 현실을 지배하면서 깨진 유리 조각처럼 작용한다. 이 파편들이 자아를 찌르는 것을 막기 위해 억압이라는 방어기제로 차단시킨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화자의 자신감 결여는 대상을 냉장고에 꾹꾹 넣어버리듯 억압되다가 권태로 전이되어 쌓이며 자아를 우울하게 하고 있다.
   현대사회는 냉장고의 칸막이처럼 다양한 문화적 층위와 계층 간의 갈등요인이 복잡하게 얽혀서 영위된다. 때문에 인간의 심리 역시 이리저리 얽힐 수밖에 없다. 이어지는 다음의 시는 관계의 상대성이 주목된다. 대상의 단순한 표면이 아닌 이면 혹은 내면을 관찰하며 문학적 가치를 지켜낸다.

 

나무는 아직 죽어 있었다
검은 피뢰침 같은 가지들

 

저 나무에서 너는 오래전 불탄 칠지도와 능에서 출토된 녹슨 철제 검의 외관을 떠올린 적이 있다


죽은 나무는 그사이 악에 가까워졌다

가지 끝이 날이 섰다 나뭇결은 비틀어졌다

 

저 나무를 네가 아는 죽은 것들과 함부로 비교해보는 잘못을 저질러서는 안 된다

 

몇 해 전 누군가 죽은 나무 굵은 가지에 불을 질렀다
그 밤, 나무는 스스로 불을 껐다

 

한쪽 표정이 일그러져 검게 눌어붙어 있다 저 나무에게도 눈먼 경객의 독경이 필요하다

 

상여집이 없어졌다 성황당이 사라졌다
죽은 나무는, 살아 있다

— 조용미, 〈죽은 나무 ; 밭치리〉 (‘문학사상’ 2013년 11월호)

 

   “칠지도”는 일곱 개의 가지가 달린 칼이다. 칼 양면에 새겨있기를 4세기 후반 백제 근초고왕 때 백제 왕실에서 제작하여 왜倭 왕실에 주었다고 한다. 시인은 “죽은 나무”를 보면서 “칠지도”의 모습을 떠올린다. “죽은 나무”는 “검은 피뢰침 같은 가지들”을 몸에 붙이고 있는 것 같고 “능에서 출토된 녹슨 철제 검”을 닮았다. “네”가 무엇을 떠올리든 저기에는 죽은 나무가 있다.
   “나무는 아직 죽어 있었다”로 시작해서 “죽은 나무는, 살아 있다”는 모순어법으로 끝나는 부분을 유심히 짚어볼 필요가 있겠다. 일반의 논리로 본다면 “죽은 나무”는 그냥 “죽은 나무”이므로 죽었다. 그러나 “죽은 나무”라는 기표는 인간이 정해놓은 말이다. 빗대어서 표현했을 뿐, 나무는 아직 죽지 않았다. “죽은 나무는 그사이 악에 가까워” 져 죽을 힘을 다해 살아내고 있다. “몇 해 전 누군가 죽은 나무 굵은 가지에 불을 질렀”을 때 “그 밤, 나무는 스스로 불을 껐다”는 것 역시 나무 입장에서 보면 존재의 증명이 된다. 이윽고 화자는 감히 “저 나무를 네가 아는 죽은 것들과 함부로 비교”하지 말라고 외친다. 너의 관념으로 죽은 나무를 매도하는 것을 질타하는 의미가 담겨있다.
   불에 그슬려 “한쪽 표정이 일그러져 검게 눌어붙어 있”는 나무에게서 화자는 “눈먼 경객의 독경”을 읊는다. 겉만 보고 판단하는 인간의 눈에 나무는 죽어 있다. 그러나 이면을 보거나 나무의 눈으로 보면 나무는 살아 있다. “상여집이 없어”지고 “성황당이 사라”져도 나무는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런 상황에 일반의 논리로 죽었느니 살았느니 시비를 가리는 것은 “누군가 죽은 나무 굵은 가지에 불을” 지른 행동만큼이나 어리석다. 시적 논리로 봤을 때 표면이 죽었다고 다 죽은 것이 아니므로 관점을 바꾸고 감각을 동원하여 이성의 바깥에서 살피면 이처럼 경이로운 시적인 세계를 접하게 된다.

 

   마주 앉은 네가 보였다 안 보였다 하는 동안 너와 나의 등 뒤로 세상도 잠시 보였다 안 보였다 한다. 내가 살던 집이 보였다 안 보였다 하고, 꽃들이 피었다 졌다 한다. 그렇게 계절이 몇 번을 왔다 가는 동안 시소를 탄다. 이 세계는 내릴 수 없는 세계. 그러는 동안 저녁이 오고, 밤이 오고 우리는 날마다 조금씩 자란다. 자라서 우리는 날마다 삶으로부터 외로워진다. 멀어진 채 잠든다. 잠들며 새로운 별을 떠올린다. 균형은 움직일 때만 존재하는 질서 어디서나 시소의 세계는 시작된다. 어제의 시소는 녹슬고 오늘의 시소는 이미 낡았다. 꽃피는 집들은 이제 없다. 우리는 허공에서 춤춘다. 이 세계는 이제 안전하지 않다. 안전하지 않아서 또 우리는 즐겁다.

 — 이승희, 〈시소의 세계에서 우리는〉(‘인간과 문학’ 2013년 겨울호)

 

   앞서 언급했듯이 시적인 논리는 일반 언술의 논리와 다르다. 시적 허용이라고 불리는 비논리적인 면도 어찌 보면 철저한 논리적 사유를 바탕으로 표출되어야 한다. 겉으로는 이성의 영역을 빗나간 것 같아도 내적인 구조와 질서를 들여다보면 체계적인 논리를 갖추고 있다. 시의 비논리적인 부분은 인과관계가 파괴되고 비약적일 때 낯설고 새로워지는 효과로 나타난다. 즉 대상에 대한 관습적인 자동화를 깨는 장치이다. 독자는 원인과 결과에 따른 타당한 관계성에 길들어져 있기 때문에 관계가 예상 밖으로 어긋났을 때 새로운 충격을 받게 된다.
   마주 보는 “너”와 “나”는 상호텍스트인 동반의 관계이자 반면교사이다. 진행되면서 비인과성이 돌올한 대목은 “자라서 우리는 날마다 삶으로부터 외로워진다”거나 “멀어진 채 잠든다”로 상호 관계성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이 시에 마치 상대성이론에서 공간에 시간을 추가시켰던 것처럼 시소라는 공간성에다 시소를 타는 동안의 시간성을 삽입해 보면 흥미로워진다. 시소가 남고 시소를 타던 사람과의 관계가 멀어지는 현상에는 많은 시간이 흘러간 것이 파악된다. 이 시는 시간성을 전면에 드러내지 않았지만 압축된 현상을 동시적으로 보여주면서 앞에서부터 진술로 이어지는 인과관계를 느낄 수 있다. 점점 익숙하지 않은 풍경으로 유도하면서 ‘낯설게 하기’의 효과를 발휘하고 있다. 이처럼 비인과성은 습관적으로 자동화된 인식의 틀을 깨고 생경한 역할을 한다.
   시의 후반부에는 흐르는 인생이 그러하듯 “어제의 시소는 녹슬고 오늘의 시소는 이미 낡아 간다”. “우리는 허공에서 춤춘다.” 거나 “안전하지 않아서 또 우리는 즐겁다.”고 되어 있는데 알다시피 두 표현 사이에 관련성이 없어 보인다. “안전하지 않” 은데 어찌해서 “즐겁다”는 말인지 이해가 어렵다. 종속절의 서술어미가 어긋난 상황을 진술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고려할 점은 비인과성이 문법적으로 타당 하느냐 그렇지 않느냐는 데에 있지 않다. 비인과적인 현상을 통해 세계를 새롭게 인식하고, 그 속에 감추어진 진실을 그리려는 의도와 인간의 불안한 내면 심상이 토로 되는 점이 더 중요하다.
   이어지는 다음의 시는 자기 외부보다 각별히 요구되는 내면성을 언급한다.

 

   심란은 내란입니다 당신의 언어는 내란이 피운 꽃이겠지요 늦은 밥상을 받듯 허기를 달래며 꽃잎을 따먹다가 자정의 고갯마루를 넘었을 때 어둠의 흰 꼬리가 아홉 개인 것을 언뜻 보았습니다 내란 속 천년을 산 여우 말입니다. 피 뚝뚝 떨어지는 생간(생각)을 야심한 시각에 혼자 씹어먹는 모습이 보입니다 그대로 당신의 눈매가 그윽한 것은 슬픔이 녹아있기 때문이지요 나는 그 슬픔에 취해서 몽롱하고 불경스러운 반란을 꿈꿉니다 어쩌면 오늘밤은 눈보라 속에서 폐쇄된 국경을 넘어가는 꼬리 아홉 개 달린 여우의 발자국이 붉은 꽃잎처럼 피었다 지는 것을 볼 것만 같습니다

— 고미경, 〈버지니아 울프를 읽는 밤〉(‘시와 문화’ 2013년 겨울호)

 

   욕망의 관점으로 위의 시를 봤을 때 “심란”한 이유는 “내란이 피운 꽃” 때문이다. “폐쇄된 국경을 넘어가”는 것은 영역 내지 경계가 확장되는 것으로 파악된다. 자기 내부를 진지하게 들여다보는 데 방점을 찍어 감상한다.
   버지니아 울프를 떠올리면 먼저 페미니스트로서의 입장이 부각되지만 여기서는 여성 문학의 옹호를 위한 의식이라기보다 더 포괄적이다. 내면성을 고찰하는 면모가 남녀의 성별과 차별의 언급을 넘어서고 있어서 그렇다. 이 시는 세상을 사는 각오와 자세가 치열하고 엄정하다. “피 뚝뚝 떨어지는 생간(생각)을 야심한 시각에 혼자 씹어먹는 모습”이 이를 대변한다.
   유심히 읽을수록 버지니아 울프의 저서 제목처럼『자기만의 방』이 느껴진다. 우선 “오늘 밤은 눈보라 속에서 폐쇄된 국경을 넘어가는 꼬리 아홉 개 달린 여우의 발자국이 붉은 꽃잎처럼 피었다 지는” 부분. 까만 밤의 하얀 눈보라 속 붉은 꽃잎의 선명하게 대비되는 색채이미지들만큼 진정성이 있고 “불경스러운 반란을 꿈” 꾸는 부분은 자유에의 열망과 관계가 있다.
   인생사에서 욕망과 자유. 이 둘을 누리면 만사형통일 것 같다. 욕망을 따라 자유를 누리는 삶은 얼마나 달콤할지. 그런데 욕망을 다 이루기는 쉽지 않거니와 자유로 가는 길도 멀기만 한 게 현실이다.
   이어지는 시는 욕망의 우물에 ‘나’ 자신을 투영해 액체적 특성을 가진 주체가 되고 싶어 한다. 막상 그렇게 되었을 때 어떻게 될지 염두하며 읽어 본다. 

 

담배를 조금 피우는 나라에서
조금 많이 피우는 나라로 옮겨간다면
더 오래 살기도 할까

 

조금 조금 그러다가 형태를 잃어버리는

 

음료수를 하루에 백 잔 만들게 되면
액체가 되어가는 기분에 대해 더 잘 말하게 될까

 

좌석버스를 타고 이 도시에서
다른 도시로 갈 때 팔은 길어지고

 

뒤에서 더 잘 안아주는 사람이 되는 걸까 그러다가 뒤에서만 안을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건 아닐까

 

차를 타고 가다가 꿈을 꾸게 되었는데 꿈속에서 나는 포도를 껍질째 먹고 있었다 조금 후에 만난 너도 꿈을 꾸었는데 내가 포도 알만 쏙 빼서 삼키고 있더라고 했다

 

사람에서 시작해 사람이 되어가는
태양 아래서 이렇게 태양 아래서

 

한 덩어리의 잠이 한 덩어리의 포도가 되는 과정을 어떻게 알고 있는지 나는 모르고

 

약을 팔다가 음악을 팔게 되면 더 예민한 귀를 가지게 될까 자다가 꿈을 파는 사람이 되는 것 또한

 

꿈 속에서 마시던 음료수를 깨어나서도 마시고 몽유병자의 이상한 눈빛을 갖게 되는 눈빛에서 눈빛으로 조용히 옮아가는
왼쪽 가슴의 통증이 오른쪽 가슴으로 전이된 다음날부터

 

한 번 겪은 문장을 옮겨 적는 일과 거름종이가 떨어지면 셔츠를 잘라 커피를 내려 마셨던 것처럼 한 번은 더 해보는 문장 앞에서 울어버리는

— 임승유, 〈이런 노동〉(‘현대시’ 2013년 12월호)

 

   예시의 통사적 구조는 가정법 내지 조건문의 형식을 띠면서 이럴까 저럴까 어떤 망설임을 표현한다. 문장이 끝맺지 못하고 중단될 것 같다가 계속 이어지는 특성이 액체가 되어가는 과정 즉 본연의 형태를 잃어가는 과정과 연관이 있다. 고체화된 주체는 고정관념으로 굳어진 의식으로 받아들일 수 있겠다. 그러므로 융통성이 있고 유동하는 ‘나’의 변화를 반영할 수 없다. 그러기에 “조금조금 그러다가 형태를 잃어버리는”이라는 구절로 액체성을 띄면서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새로운 주체로 산다는 것의 의미를 사유한다. 액체가 되면서 내가 바라보는 세계와 ‘나’를 만들어낸 세계에 대해 심사숙고한다. 그런데 문제는 타자에 둘러싸여 있는 주체가 어쩔 수 없이 나약하고 먹먹하다는 점이다.
   타자와 구분되지 않은 채 움직이고 흘러가는 주체는 타자로 인한 불안을 동반하고 이는 주체의 어떤 궁핍을 드러낸다. “뒤에서 더 잘 안아주는 사람이 되는 걸까 그러다가 뒤에서만 안을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건 아닐까”라는 갈등의 형상화 부분에서 감지할 수 있다. 타자와 ‘나’ 사이의 오해는 타자를 ‘뒤에서’ 포용하게 한다. 사실 우리는 살면서 타자와의 관계에서 수많은 오해로 점철되어 있지만 이러한 관계를 조절하며 주체를 구축해 나간다.
   시의 구절처럼 우리는 포도가 되어가듯 “사람에서 시작해” 진정한 의미의 “사람이 되어가는” 중이다. 주체로써 액체성은 인간에게 본질적인 것이며 그런 의미에서 한평생이 노동의 과정인 셈이다. “눈빛에서 눈빛으로 조용히 옮아가는” 일이나 “왼쪽 가슴의 통증이 오른쪽 가슴으로 전이”되는 일은 감정이 액체처럼 유동하는 것이다. 이렇게 이 시는 타자를 포용하기 위해 메타적인 방법으로 액체화의 노동을 이행하고 있다. “액체가 되어가는 기분”은 많은 눈물을 동반하며 어우러질 것 같다.
   위에서 살핀 다섯 편의 시들은 욕망과 자유의 상관성을 언급하고 있다. 이 둘과 연동되어 양립 불가능성을 주장했던 프로이트가 생각난다. 그는 일찍이 인간이 욕망에 대해 얼마나 수동적이고 자유롭지 못한지 증명했다. 개체를 보존하고 성관계를 통해 생식하며 결국 죽음을 향하는 유기체의 본능으로 욕망을 이해했다. 이렇게 인간의 욕망은 생명의 필연 법칙으로부터 파생된 것이므로, 욕망 속에서 인간은 결코 자유로울 수 없고 이를 억제하거나 그로부터 벗어나는 순간에 자유를 획득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위의 시들은 들뢰즈와 가타리의 견해인 <앙띠 오이디푸스>의 세계를 보여주기도 한다. 그들이 언급한 ‘욕망하는 기계들’처럼 인간 역시 기계의 일부로 욕망의 기계적인 생산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것을 반영하고 있다. 모순되게도 인간은 욕망을 초월한 의지를 통해서가 아니라 기계적 욕망 속에서 오히려 자유롭다. 배치에 따라 얼마든지 다른 욕망하는 기계로 변신해서 탈영토화, 탈코드화가 가능하다. 인간은 의지와 결단이 아니라 ‘욕망하는 기계’로 활발히 작동하는 만큼 자유를 누린다고 주장하였으니 욕망과 자유의 어울림 혹은 어긋남은 끊임없이 제기되는 질문이다.

 

 

박 수 빈  -----------------------------------------------

   광주 출생. 아주대 국문과 대학원 박사과정 졸업. 2004년 시집 《달콤한 독》으로 작품활동. ‘열린시학’ 평론 등단. 시집 《청동울음》, 평론집 《스프링 시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