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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 계간문예 2014년 봄호, 수필] 아호雅號 이야기 - 임동옥

신아미디어 2015. 1. 15. 16:39

"아내는 “심원, 심원하더니. 괜찮은데.”하며 흡족해 하였다. 호감이 가는 모양이다. 우리는 별밤에 콩을 구워 먹으면서 지란지교芝蘭之交를 꿈꾸는 시간을 보냈다. “어이, 심원.”  “왜, 패연.” 서로 맞받으며 이야기꽃을 피웠다. 호를 부르면서 이야기를 하니 경박하지 않고 서로 믿고 존경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 같고 격조가 있어 좋았다. 심원과 패연을 에워 싼 은하수 별밤은 더욱 깊어만 갔다."

 

 

 

 

 

 

 아호雅號 이야기        /  임동옥

 

   오래전부터 전원생활을 꿈꾸었다. 아내와 나는 우리의 오래된 미래를 꿈꿀 수 있는 곳을 하나 찾았다. ‘심원면 하전리’라는 바닷가에 위치한 컨테이너 움막이다. 추석 전날 움막에서 모닥불을 피우고 콩대를 메다가 구워먹었다. 별밤에 콩 구워먹는 마음은 동심이 아닐 수 없다. 애들의 얘기를 하다가 나는 화제를 돌려 “우리도 호를 하나씩 가지면 어떨까? 여보, 당신만 부르지 말고. 옛 선비들처럼 호를 부르면 멋지지 않을까?”라고 말하였다.
   “그거 좋은 생각인데.” 아내가 맞장구를 쳤다.
   돌이켜 보면 내 아호는 여럿이다. 별명 같은 아호다. 별명은 생김새나 버릇, 성격 따위의 특징을 가지고 남들이 본명 대신에 지어 부르는 이름이고 호는 본명이나 자 외에 허물없이 부르기 위해 만들어 쓰는 이름을 말한다.
   초등학교 때 나는 ‘쌩 영감’으로 통했다. 나는 어른들이 이야기하는 틈새에 끼어 다 알아듣는 것처럼 배시시 웃고만 있으니 어른들이 불러준 이름이다. 늙은이 또는 지체 높은 양반이라는 말이 영감이다. 또 나이가 어리니 영감 앞에 ‘쌩’자를 붙여 ‘쌩 영감.’하고 불렀다. 강짜를 부리면 나가라고 할 것 같은 느낌에 그리하였는데 그 말이 그다지 싫지는 않았다. 
   대학시절 졸업여행을 갔다. 어느 친구가 떡을 한 상자 가져왔다. 여행 첫날 떡을 좀 먹었다. 그날 밤 나는 참 많이 방귀를 뀌었다. 친구들은 이구동성으로 ‘떡포’라고 불렀다. 떡을 먹더니 포를 쏜다는 의미다. 나는 “떡포가 뭐냐. 좀 부드럽게 불러라. 술을 먹고 옆으로 걸어 앞길을 막아도 ‘횡포’가 아니라 ‘횡보’이지 않더냐? 떡포가 아니라 덕보德步가 좋겠다.”고 제안을 했다. 떡을 먹고 포를 쏘아댄다는 직설적인 이름보다, 친구들이 심심하지 않게 떡을 먹고 방귀로 추임새를 넣어주는 행위자. 그러니 이제부터 “나는 덕보다.”라고 외쳤다. 풀이를 하면 덕을 행하고 베푸는 걸음걸이다.
   새로 부임한 학교에서 연구실과 컴퓨터를 주었다. 학교 메일을 사용하려면 아이디(ID)가 필요했다. 망설이다가 영문 이름 동옥 임(Dong-Ok Lim). 동에서 디(D)를, 옥에서 오(O)를 그리고 성씨 임(Lim)을 합성했다. 바로 도림(dolim)이다. 이때부터 dolim@honam.ac.kr이 내 아이디다. 도림道林은 도道가 숲을 이룬다는 의미다. 아직도 도통과는 거리가 멀지만 그 때부터 도림을 이루도록 더욱더 긍정마인드를 갖고 전공뿐만 아니라 가끔 인문학 산책도 한다. 도림은 나의 아이디요 아호가 되었다.
   하루는 아내가 가져온 안중선의 《천기누설》을 보았다. 사는 게 다 그렇듯이 ‘과거는 아쉽고, 현재는 고통이고, 미래는 잡히지 않는 게’ 인생이라고 하지 않던가? 나라고 예외는 아니다. 어느 부분에 나의 속 시원한 누설이 있는가 하여 눈여겨보았다. 생년월시에서 나에게는 물이 부족하니 아호를 물수水변이 있고 ‘ㅍ’으로 시작하는 단어가 좋겠다고 풀이되었다. 몇 번 궁리하다가 찾은 것이 ‘패연沛然’이다. 의미는 소나기다. 소나기는 마른하늘에 단비요 대지를 적시는 생명수다. 또 소나기가 지나가면 날이 쾌청하여 마음이 청량하기 그지없다. 퍼부을 땐 다 쏟아 부어도 곧바로 햇빛이 나므로 뒤끝이 없는 개운한 비가 소나기다. 짖을 때는 쏟아 부어도 뒤 꿍꿍이가 없는 내 성격과도 통한다고 본다. 그러니 내 호는 ‘패연’이다. 호가 맘에 든다, 꿈보다 해몽이 나을지라도. 패연 그럴듯하지 않은가? 멋지다고 자평한다. 혼자 소소하게 즐기다가 얼마 전 동료들과 담소하는 자리에서 ‘패연’이 나의 호라고 말하였다. 다들 어떤 의미냐며 의외라는 반응이었다. 좀처럼 듣지 못한 생경스런 단어에 그런 의미가 있어. 표정은 내 호기號旗에 부러워하는 눈치였다.  콩 굽는 냄새가 진동을 할 때 아내에게 내 호는 “영감, 덕보, 도림 그리고 패연 등 여럿이네, 선생님, 장학관도 좋지만 당신도 호가 하나 있으면 좋겠네. 여기가 심원면 하전리이니 ‘심원’이나 ‘하전’으로 하면 어쩌겠는가?” 하고 말을 하였다.
   아내는 “심원과 하전은 어떤 뜻일까?” 하고 묻기에 “심원면의 심원心元은 면의 지형이 마음심과 으뜸원이란 글자형상에서 유래하였고 뜻은 마음의 으뜸이지. 또 심원深遠은 심오하고 깊다는 뜻이고, 심원心願은 마음으로 바란다는 의미이며, 심원心園은 마음의 동산이라네. 다시 말하면 심원心元은 심오한 마음으로 바라는 마음의 동산으로 해석할 수 있지. 그리고 하전下田은 질이 좋지 않은 자갈밭이지. 그러니 당신 호를 하전도 좋지만 심원心元이 더 좋겠네.”
   아내는 “심원, 심원하더니. 괜찮은데.”하며 흡족해 하였다. 호감이 가는 모양이다. 우리는 별밤에 콩을 구워 먹으면서 지란지교芝蘭之交를 꿈꾸는 시간을 보냈다.
   “어이, 심원.”
   “왜, 패연.”
   서로 맞받으며 이야기꽃을 피웠다. 호를 부르면서 이야기를 하니 경박하지 않고 서로 믿고 존경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 같고 격조가 있어 좋았다.
   심원과 패연을 에워 싼 은하수 별밤은 더욱 깊어만 갔다.

 

 

임 동 옥  --------------------------------------------

   《수필과 비평》 등단, 수필집 : 「계룡산의 아침이슬은 약이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