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지심도에 와서 붉은 빛 감도는 선명한 동백꽃만을 보려 했다. 아름다운 풍광만 동경했다. 마음에 담기보다는 눈에 먼저 담으려 했다.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는 것을 거두어 키운다는 것을 미처 깨닫지 못했다. 비로소 마음의 위안을 얻는다. 출렁, 숲에 가득 찬 동백향이 큰 파도처럼 숲 속을 한바탕 뒤집고 지나간다. 꽃 진 자리에 붉은 생명 꿈틀댄다."
꽃 진 자리 / 이동이
울창하게 뻗은 후박나무와 동백나무의 짙은 녹음이 싱그럽다. 숲길로 들어설 때마다 동박새가 지저귀니 저절로 흥이 난다. 화살표 대신 동박새의 부리가 길을 안내하자 바람도 덩달아 길을 열어준다. 어깨를 나란히 하여 걷는 오솔길이라 그런지 문우들과의 정이 봄빛에 더욱 무르익는다.
‘지심도’란 지명을 처음 들었을 때 왠지 마음이 끌렸다. 그 섬은 마음을 다 내려놓고도 평화로울 것 같았다. 두세 시간이면 전체를 알 수 있을 만큼 아담한 섬. 더욱이 동백꽃으로 널리 알려졌으니 풍광 또한 얼마나 아름다울지 상상이 갔다.
곧 붉디붉은 수백만 송이의 동백꽃을 만나게 된다. 고혹적인 동백의 자태는 어떤 정염을 뿜어내고 있을지 자못 설레며 숲길을 한참 걸었다. 하지만 햇살에 간헐적으로 드러나는 동백꽃 몇 송이 외엔 별로 보이지 않는다.
지심도의 동백은 2〜3월이 절정이라지만 지난겨울이 유난히 추워서 올해엔 4월에도 동백을 볼 수 있다고 하였다. 계절의 순리를 거역할 순 없었던 것일까. 듬성듬성 얼굴 내민 몇 송이 외엔 반지르르한 잎사귀만 햇살을 튕겨내고 있다.
차츰 흥겹게 그렸던 음표들이 맥없이 주저앉았다. 괜히 심드렁해진다. 수령이 오래된 나무들은 키가 엄청 커 겨우 매달린 꽃도 보기 힘들고. 경사진 곳에 엎드리듯 뻗은 동백나무는 곧 쓰러지지 않을까 불안하다. 게다가 동백꽃잎 예쁘게 장식해 놓아 눈이라도 호사할라치면 상업성을 띤 민박집의 장치여서 오래 서 있을 수도 없다. 숲의 운치를 더하자면 타박타박 걷는 흙길이면 좋으련만 그렇지도 않다. 청결한 환경을 위해서라지만 적당한 곳에 쓰레기통 하나 없으니 다소 불편한 것들이 서운함으로 다가왔다.
그때였다. 머리 위에서 동백꽃 한 송이가 뚝 떨어졌다. 가풀막에서 또르르 구르다 한곳으로 쏠렸다. 아, 그곳은 선혈이 낭자했다. 각혈의 현장이다. 숲에 가려 미처 보지 못한 곳에 낙화가 무리 지어있다. 갑자기 동공이 확장되었다. 시선에 꽉 들어찬 붉은 꽃잎들. 숨이 멎을 만큼 환상적인 광경에 목울대가 저려왔다.
동백꽃 하나 들어 잎맥을 본다. 그들의 은유는 알 수 없지만 수런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 하다. 살며시 부드러운 몸피를 만지자 내 체온을 통해 다시금 생기가 돈다. 붉은 빛이 손끝으로 스며든다. 심장으로 전이된다. 뇌에서 도파민의 생성이 물결친다. 얼굴이 달뜬다. 다시금 심장이 뛴다. 꽃 진 자리가 이렇게 황홀경인 줄 미처 몰랐다.
그동안 바람과 구름과 햇살의 기운을 받아 용케도 버텨왔나 보다. 붉은 빛 제 스스로 거둬들이지 않고 늦게라도 찾아온 내 눈빛에 스며들고자 함이 대견스럽다. 그러고 보면 가풀막에서 엎어지듯 자라나던 동백나무도 나름의 엄정한 질서와 자기를 지킬 줄 아는 지혜가 있었겠다. 또한 주변 환경은 개발을 절제하여 자연과 인간이 공존하는 길을 선택한 것이 아니었을까. 꽃 진 자리에서의 감동이 잠시 서운했던 감정들을 말끔히 거두어 갔다.
나는 지심도에 와서 붉은 빛 감도는 선명한 동백꽃만을 보려 했다. 아름다운 풍광만 동경했다. 마음에 담기보다는 눈에 먼저 담으려 했다.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는 것을 거두어 키운다는 것을 미처 깨닫지 못했다.
비로소 마음의 위안을 얻는다. 출렁, 숲에 가득 찬 동백향이 큰 파도처럼 숲 속을 한바탕 뒤집고 지나간다.
꽃 진 자리에 붉은 생명 꿈틀댄다.
이 동 이 --------------------------------------
≪수필과비평≫ 등단. 수필집 : ≪바람개비의 갈망≫. 2008년 ≪경남문학≫ 우수작품집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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