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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 계간문예 2014년 봄호, 단편소설] 엥흐바이야르 Энхбаияр - 김한창

신아미디어 2014. 12. 17. 17:14

『계간문예』에서 '김한창'님의 단편소설 엥흐바이야르를 소개합니다.

 

 

 

 

 

 

 

 엥흐바이야르 Энхбаияр        김한창

 

 

 
   내 이름은 푸렙 엥흐바이야르다. 아버지의 이름 푸렙(: 목요일)을 성性으로 쓰고 이름은 엥흐바이야르(Энх баияр : 평화축제)다. 『목요일 평화축제』라는 뜻을 가진 여자이름으로 아주 예쁜 이름이다. 그리고 부유한 유목민의 딸이다. 나는 몽골동쪽 옵스(Увс) 아이막(аимаг : 우리의 道에 해당하는 몽골의 행정단위), 러시아 국경 가까운 곳 에서 유년시절을 보내며 성장했다. 몽골의 수도 울란바타르에서 다녀오자면 몇 개의 아이막을 거쳐, 가고 오는데 거의 보름이 넘게 걸리는 먼 곳이다.
   내가 태어났을 때 몽골은 사회주의였다. 여덟 살 때 나는 삶이 무엇인지 존재 이유가 무엇인지 모르는 나이었다. 부모 그늘 속에서 먹을 것 입을 것만 있으면 그것으로 만족했다. 모든 사람이 잘살거나 못살거나 다 똑 같이 사는 때였다. 나는 학교에서 공부를 잘하는 편은 아니었다. 그러나 나름대로 중상中上은 넘었다. 그 때 몽골에는 고급공직자 가정에 배급된 흑백 TV만 있을 뿐 컴퓨터나 핸드폰은 없었다. 그래서 편지를 써서 주고받았다. 몽골은 러시아와 가깝게 지냈다.
   나는 어릴 때부터 외국어에 관심이 많았다. 러시아 아이들과 편지를 주고받을 정도였다. 그리고 우리 동리에 살던 러시아 사람 집에 아빠하고 놀러갔는데 러시아 사람들 삶이 색다른 것이 신기하기도 했었다. 아버지는 학교선생이었기 때문에 공부를 많이 시키는 편이었다. 어머니는 후흐딩( : 탁아소)에 나갔다. 아버지는 직장이 보장되어 있었지만 사회주의 이전 가업이던 목축을 항상 꿈꾸어 왔고 사회주의에 불만이 컷다. 나는 왜 아버지가 똑같이 잘사는 사회주의를 싫어하는지, 왜 유목민을 꿈꾸는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어릴 적에 남자아이들 하고 잘 놀았던 편이었다. 가장 가깝게 지냈던 남자 친구 이름은 뭉흐 토야(: 영원한 햇볕)로 아버지의 이름 뭉흐는 성性이며 토야는 본이름이다. 그의 아버지는 초원 집단목축장 반장으로 유목민이어서 토야는 학교의 기숙사에서 생활하며 공부했기 때문에 항상 혼자였다. 그런 토야는 언제나 나와 잘 어울렸다. 그러나 방학이 되면 나는 토야를 볼 수 없었다. 부모가 찾아와 초원의 목축지로 데려갔기 때문이다. 방학이 끝나고 돌아와야만 토야를 볼 수 있었다. 나는 언제나 그것이 퍽 아쉬웠다.

 


   5학년 겨울 방학이 되었을 때 나는 부모의 허락을 받고 토야와 함께 그의 부모를 따라 옵스에서 얼마 떨어진 초원의 목축지로 가게 된 적이 있었다. 그 때 학교에서는 바타(бата : 강함)는 자야(жая : 운명)를 좋아하고 할리옹보가촐로(халиунбуга чулуу  : 사슴돌)는 엥흐타이방(Энхтаибан : 평화-정숙)을 짝사랑하고 하는 말들이 무성했다. 나는 토야를 따라 그의 부모목축지에서 방학을 지내고 올 정도로 토야를 무척 좋아했다. 혼자 학교생활을 하는 토야도 나를 많이 의지했다.
   나는 옵스 솜(сум : 우리의 市 나 郡을 지칭하는 행정단위.) 소도시에 공직자에게 배급되는 러시아식 조립식 아파트에서 생활 했다. 그런데 토야를 따라 간 초원의 목축지 설원의 넓은 대지, 몽골의 전통가옥인 게르(гзр : 몽골 유목민들의 둥글고 하얀 천막모양의 전통 가옥으로 40분이면 세운다. 내몽골에서는 게르를 빠오(бауу)라 부른다.- 옮긴이 주)의 침대에서 토야와 함께 잤고 그와 즐거운 겨울방학을 보냈다. 유목민이 겨울철에 즐기는 얼음놀이를 토야와 즐길 수도 있었다. 말을 타고 함께 설원을 달려도 보았다. 그 생활은 나에게 전혀 낮 설지 않았다. 우리는 어렸지만 한 침대에 누워 자면서 서로 장래도 꿈꿨다.
   그 때 나는 아버지가 남들에게 존경 받는 선생님을 마다하고 왜 목축을 원하고 있는지 이해가 안 되었다. 어린 생각으로는 『이렇게 말을 타고 싶어서일까?』하는 생각도 했지만 그건 전혀 이유가 안 되는 생각이었다. 여하튼 나는 그 때를 기화로 방학이면 토야 부모의 목축지 초원에서 토야와 방학을 보내면서 함께 성장했다. 고등 교에 들어간 후 15세 때였다. 토야의 부모와 호쇼르 (Хуушуур : 다진 양고기를 밀가루 반죽으로 감싸 기름에 튀긴 즐겨먹는 음식 - 옮긴이 주)와 우유차로 저녁식사를 하면서 토야의 아버지가 전해주는 말을 듣고 우리아버지가 사회주의를 싫어하는 이유와 왜 유목민이 되기를 꿈꾸는지 처음 알았다.
   토야의 아버지가 말했다.
   “엥흐바이야르, 네가 이제 다 컷구나. 몽골이 사회주의가 되지 않았더라면 아버지가 지금 쯤 몽골에서는 가장 많은 가축을 거느린 큰 부호가 되었을 게다.”
   “무슨 말씀이세요?”
   “너희 가족은 선조 대대로 목축을 해왔는데 덕망 높은 네 조부는 스무 명이나 되는 목동을 거느린 대 부호였다. 목동들의 가족까지 먹여 살릴 정도였지. 그러니까 엥흐바이야르 넌 자랑스런 몽골유목민의 후손이다.”
   “그래요? 전 전혀 몰랐어요.”
   “넌 모르지.1930년에 몽골이 사회주의가 되면서 사유재산 보유를 금지하는 법을 제정하고 몽골전역에 부유층의 가산과 사유재산 몰수정책으로 모든 가축을 강제로 몰수하기 시작했다. 이뿐만이 아니라 국교가 불교인 몽골사원의 재산도 남김없이 몰수했다. 만약 재산을 숨기거나 내놓지 않으면 체포 감금했고 인민혁명당은 중산층과 하층민까지 모든 재산을 몰수 하면서 너의 조부는 사회주의반대운동을 주동했다. 그러자 결국 반동분자로 몰려 러시아 죽음의 군대에 의해 시베리아로 끌려가 본보기로 처형되고 말았어. 그 때 반대운동에 가담했던 스무 명의 목동들은 물론 다른 유목민들까지 초원에서 공개총살당한 이들이 정확히 5,191명이나 된다. 집단목축으로 남아도는 유목민과 몰수를 당한 초원의 유목민들은 살길이 없어 수도 울란바타르로 몰려들었다. 그 수는 십만 명에 도달했고 공업화가 진행되고 도시사회구조로 변화하면서 몽골은 유목생활에서 거주정착 문화가 그 때부터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뭐라구요? 전 전혀  모르고 있었어요. 우리나라에 그런 일이 있었나요?”
   “너희 세대는 당연히 모르지, 아버진 조부의 목축을 이어받지 못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을 게다. 입을 막으려고 그 보상으로 직계 후손인 너희 아버지의 직장이 보장된 것은 정말 큰 다행이지만…….”
   “그럼 국민들은 그냥 가만히 당하기만 했나요?”
   “물론 아니지, 인민혁명당 정책에 반대하는 소요사태가 크게 발생했는데 재산몰수, 가축 집단화, 종교핍박, 사회계층구분, 대량체포. 정치박해를 반대하는 민중소요는 아주 컸다. 이 때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는데 무종교사회정책으로 2년 동안 3만 명의 사람들과 사원의 승려, 그리고 무당들까지 살해되었고. 6천여 개의 사원과 수백만 건의 불경과 문화재들을 불태워 버렸다. 그러자 1932년 여름에 국민적인 소요가 크게 일어나 전국적인 범위의 비무장 인원들이 금지 되어있는 우리 민요  토올(Туул : 목동들이 양을 치며 즐겨 부르는 전통노래로 톱쇼르를 연주하며 부르는 노래를 토올이라 하고 이를 전문으로 하는 사람을 토일치라 한다. 토올을 부르거나 들으면 마음이 편안함을 느낀다하여 유목민들은 길일을 택하여 토일치들을 집으로 불러  토올을 부르게 하는 신앙적 의미가 있기 때문에 사회주의 몽골에서는 이를 금지시켰다. 지금은 서 몽골에서 보존되고 있으며 울란바타르 전통극장에서 외국인을 상대로 연주한다. - 옮긴이 주)을 부르며 항거했다. 이에 맞서 정부는 탱크와 전투기까지 동원하여 무력진압을 했고 내전형태로 확대되었지. 그러자 살기위해 3만 명이 넘는 몽골 사람들이 국경을 넘어 탈출하여 목숨을 부지 했다. 그 때 뭉흐 토야 두 삼촌의 행방을 지금도 모르고 있지 뭐냐. 이 시기 몽골 성인남성 20%가량이 희생되었다. 1만 7천명의 승려들이 사형에 처해졌지. 그런데 지도자 초이발상은 총 56,938명이 체포만 되었다고 기록했다. 이 때 몽골 인구가 70만 명이었다. 이런 대량학살과 박해는 뒤에서 조종하는 소련의 주도적 역할이 있었던 거지.”
   “저희 아버지께선 그런 말씀 한마디도 해주지 않았어요.”
   “ 해줄 수가 없었겠지. 신분이 사회주의를 가르쳐야 하는 선생인걸…….”
   나는 아버지가 평소 어쩌다 초원으로 나가면 유목민들이 즐기는 머링호오르(Морин-хуур : 몽골 기원신화 『머링호오르 전설』에서 나오는 말馬머리를 형상화한 몽골전통현악기로 마두馬頭금으로도 불린다. 몽골의 전통 현악기로는 2현으로 된 머링호오르와 톱쇼르가 있고 떨판으로 되어있는 작은 현악기 호오르는 무당이 신을 부를 때 입에 물고 손으로 떨판을 튕겨 소리를 낸다. - 옮긴이 주)를 연주하고 특히 사회주의 체제에서 금지되어 있는 토올을 부르는 모습을 자주 보았다. 그것은 유목민으로 회귀하고자 하는 마음과 향수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다.

 

3  
   나는 집에 돌아와서도 토야의 아버지에게 들은 이야기를 말 하지 않았다. 교사라는 신분 때문에 교육적으로도 사회주의를 미화하여야 하는, 그런 입장의 아버지의 내면을 혼자 가슴에 담아두고 아버지의 모든 생각을 존중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과거와 같은 유목민이 되기를 꿈꾸는 아버지의 소원이 이루어지기를 바랐다. 
   아버지의 그 꿈은 1990년대로 접어든, 내가 17세가 되던 때 이루어졌다. 이 때 부터 동 유럽 국가들이 민주화-자유화를 선택하기 시작했다. 공산주의 국가들이 붕괴되기 시작한 것이다. 1989년 중국의 천안문 사태가 발생했고 소련의 사회주의가 붕괴되면서 소련의 위성국가였던 몽골에서 소련군이 철수했다. 몽골은 1989년 12월 12일에 설립된 민주연합이 민주화 운동을 주도하고 대중적인 움직임으로 확산되었다. 이어 민주당, 사회민주당, 국민 민주당 등이 창당되고 사회체제 변화를 요구하며 수도인 울란바타르 수흐바타르 광장에서 단식투쟁을 벌였다.
   그러자 1990년 3월 19일 사회주의인민혁명당 정치상임위원회가 도망치듯 사퇴했다. 몽골에 대 변혁의 소용돌이가 휘몰아 쳤다. 때를 기다렸다는 듯 우리 몽골은 6월에 자유총선이 실시되고 임시국회인 국가소회가 구성된다. 이렇게 몽골은 자유-민주화되어 개방사회, 시장경제 체제로 전환하여 완전한 자유국가로 변신했다.
   이와 같이 소용돌이치는 나라의 큰 변화는 아버지의 꿈이 실현되는 초석이 되었다. 왜 그러냐 하면 1991년 5월 국민소회의는 공산주의식 네그델(가축공동사육)을 철폐하고 가축사유화 결정을 내렸다. 이때부터 93년까지 3년에 걸쳐 가축 사유재산 화 결정에 따라 분배를 실시했다. 당시 2천2백만 두였던 가축 수는 자유화 이 후 오늘날 5천만 두로 크게 증가 했다.
   사유화는 전체 가축에서 50%를 민영-사유화하면서 아버지는 대대로 보관해온 조부가 공산화 이전 국가에서 받았던 모범적 가축사유로 받은 여러 개의 훈장을 근거하고 몰수재산기록부에 의해 특별히 가축재산의 60%를 후손의 자격으로 맨 먼저 돌려받은 것이다. 당초 조부가 몰수당했던 가축수가 워낙 많았기 때문에 그 가축 수는 실로 엄청났다. 그러자 아버지는 모든 것을 팽개치고 공식직업을 목자로 등록하고 원하던 유목민이 되어 날듯이 초원으로 떠났다. 학교를 막 졸업한 나는 당연하게 어머니와 함께 아버지의 유목에 편승해야했다.

 

 
   그러나 반면 유년기부터 성년기까지 항상 함께하며 성장했던 토야와의 뼈아픈 이별을 의미했다. 그 때 나는 이별이라는 것은 슬픈 것이며, 가슴을 쓰리게 한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그것이 사랑이라는 것을, 나는 세상에 태어나 비로소 처음 느낀 것이다. 이제 많은 가축을 기르자면 풍성한 초지를 찾아 넓은 몽골대륙 초원으로 대 이동을 거듭해야 했고. 토야는 토야대로 유목민 아버지와 양 떼를 몰고 몽골 초원을 떠돌며 살고 있을 터였기 때문에, 그가 몽골 땅 어디에 있는지조차 알 길이 없었다.
   나는 아버지가 어릴 때부터 성년이 될 때까지 방학을 토야 아버지의 목축지에서 토야와 함께 지내는 것을 반대하지 않은 이유도 알게 되었다. 이를테면 아버지는 장차 유목생활을 하는데 내가 그 생활을 익혀두도록 함묵으로 일관해 왔던 것이다. 어느 날 아침, 내가 말을 타고 강 건너 초원으로 말떼를 몰아 방목하고 돌아오자 아버지가 말했다.
   “엥흐바이야르 말 모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구나. 말몰이가 가장 힘 드는데 저 많은 말떼를 혼자 강 건너까지 몰아가는 솜씨가 사내 못지않구나. 유목민 딸답구나.”
   하고 칭찬했다, 그러면서 아버지는 다시,
   “네가 토야 하고 토야 아버지 목축지에서 성년이 되도록 매번 방학을 보내는 것을 그냥 놔둔 것이 지금은 아버지 목축에 큰 도움이 되는 구나. 아버지가 그런 네 뜻을 받아줬던 이유를 알겠느냐?”
   “…….”
   “나는 몽골 사회주의가 언젠가 이렇게 무너질 줄 예상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날이 올 줄 알고 있었다. 몽골의 경제기반을 다스리는 것은 초원을 유목하는 목축에 있다. 우리 몽골의 유목은 최상의 자유 안에서만 발전을 기약할 수 있는 것이다. 어떻게 집단화한 목축이 성공할 수 있겠느냐.”
   하며 처음으로 마음에 두었던 말을 했다. 아버지의 가축 두수는 해가 넘어 갈수 록 늘어갔다. 가축이 새끼를 치는 봄이면 양이 먼저 새끼를 쳤고. 이어 망아지. 낙타까지 새끼를 쳤다. 봄이라지만 밤 기온이 영하로 내려가기 때문에 아버지는 새로운 게르를 세우고 난로 불을 지폈고 그곳에 새끼 양들을 넣어뒀으며, 아침이면 다시 꺼내어 어미 양을 찾아 젖을 먹이기에 온가족이 항상 바빴다. 어머니는 종일 양젖을 짜서 샤르터스(Шартос : 버터)를 만들었고. 말 젖 짜기에 바빴으며 아이락(айраг : 말의 우유로 만든 술. 마유주)을 만들었다. 또 봄엔 온 가족이 양털을 깎아 모아 인근 솜에 내다 팔았다. 갈수록 힘이 겨워지자 아버지가 말했다.
   “목동을 구해야지 아무래도 안 되겠다. 네 엄마랑 네가 너무 힘들구나. 가축몰이도 힘이 드는데…….”
   그런 다음 아버지는 말을 타고 인근 솜으로 간 후 며칠 만에 다 섯 명의 목동들을 데려와 고용했다. 그 중 책임자로 지명된 목자는 가족도 있었다. 가족이 늘어  남에 따라 게르를 더 세워야 했다. 아버지는, 
   “너희 조부는 스무 명의 목동을 고용할 정도로 가축이 많았는데 이대로 가면 조부 못지않을 것 같다.”
   하며 만족해했다. 아버지는 평소 가졌던 꿈과 소원을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반면 나는 토야가 무척 그리웠다. 평원의 유목생활은 더더욱 토야를 그립게 만들었다. 그가 없는 초원의 삶은 외롭기 짝이 없었다. 나는 초원을 떠나고만 싶었다. 토야가 그리우면 홀연한 구릉에 올라 바람무늬 진 넓고 드푸른 초원을 바라보며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머링호오르를 연주하며 토올을 불렀다. 유목을 시작한 뒤 아버지는 머링호오르를 켜는 법과 토올을 내게 가르쳤던 것이다.
   나의 토올 소리는 슬프게 울렸다. 토올소리는 토야를 부르는 소리였다. 짝을 찾는 늑대의 긴 울음소리처럼 토올소리는 초원의 이흐타미르(Ихтамйр : 몽골 서쪽 아르항가이 바잉올 초원에 있는 강 이름으로 아름답다. - 옮긴이 주)강줄기를 타고 멀리 흘러갔지만 토야는 추억 속에만 존재될 뿐이었다. 가축을 몰고 대 초원으로 이동을 하면서 멀리 보이는 유목민을 보면 말을 타고 달려가 행여 토야가족이 아닌지 눈여겨보기도 했다. 토야를 아는지 묻기도 했다. 그러나 토야를 말하는 유목민은 아무도 없었다.

 


   내 나이 스무 살이 넘어서였다. 고용된 목동들이 여러 일들을 하게 되자 여유가 생긴 나는 공부를 계속하고 싶었다. 그렇게 마음먹은 결과 내가 몽골의 수도 국립 울란바타르 대학에 입학하는 것을 아버지는 허락했다. 그것은 아버지가 고용한 목동이 다 섯 명이나 되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아버지는 어릴 적부터 나의 뜻을 한 번도 거절한 적이 없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엥흐바이야르. 겨울목축지는 울란바타르에서 가까운 툽 아이막(: 수도 울란바타르에서 네 시간 거리의 아이막 - 옮긴이 주)초원으로 정하겠다. 그래야만 겨울에는 너를 볼 수 있고 네 학비와 생활비도 마련해 줄게 아니냐.”
   아버지는 그 약속을 지켰다. 9월에 첫눈이 오고 본격적으로 10월 추위가 닥칠 무렵이면 가축 떼를 몰고 울란바타르에서 가까운 툽 아이막 초원으로 이동하여 게르를 세웠다. 그리고 서른 마리가량의 양을 잡아 나랑토(Наранту : 사방 500M 면적의 울란바타르에 있으며 몽골에서 가장 큰 전통시장으로 양고기를 비롯하여 몽골의 옛것부터 현대에 이르는 모든 생활용품이 거래되는 시장이다. - 옮긴이 주) 고깃간에 내다 판돈으로 기숙사비와 학비, 그리고 생활비를 충분하게 주었다.
   6월, 졸업을 앞둔 방학이 되자 나는 결코 잊을 수 없는 토야의 졸업축하를 받고 싶었다. 토야를 단 하루도 잊은 적이 없었다. 나는 한 달 동안의 방학을 토야를 찾는 일로 쓰기로 했다. 그리고 가고 오는 데만 보름이 넘게 걸리는 고향 옵스로 가기로 했다. 버스를 환승해가며 몇 개의 아이막을 거쳐야만 했다. 어떤 곳은 오후 4시에 출발하면 다음날 오전 9시에 다음 솜에 도착하는 곳도 있었다. 버스 안에서 자야했고 주행 중 기사가 머물러주는 솜의 식당에서 다른 승객들과 식사를 하며 버스는 다시 달렸다.
   차창 밖 멀리 초원에 보이는 양떼 속에 토야와 내가 말에 올라 양 떼를 모는 환상이 펼쳐 보였다. 지난 낭일, 성년의 나이가 되었어도 토야 아버지의 목축지에 가서도 토야의 부모는 우리를 한 게르 안에서 재웠다. 그것은 유목민의 전통이었다. 고대로부터 이어오는 유목생활의 특성과 칭기즈칸 통일전쟁의 역사와 사회주의로 급변하는 20세기 몽골의 역사 속에서 많은 성인남성이 살해되었다. 그 결과 남성이 부족할 수밖에 없는 성비율의 부조화에서 오는 종족보존을 위한 방책으로 전통이 되어 왔다는 것을 대학에서 몽골 역사학을 전공하면서 알게 되었다. 토야와 나는 그것을 처음부터 자연스럽게 수용했고 그 현실은 토야와의 일생이 자연스럽게 약속되는 지극히 당연하고 형이상학적인 것이었다. 유년기에 토야와 나는 오누이처럼 방학을 즐겼다. 그러나 성년의 나이가 되면서 우리는 서로를 찾게 되었고 언제나 방학을 기다렸다.

 


   고향, 옵스에 도착한 것은 12일만 이었다. 소도시 옵스는 사회주의 시절과 달리 활기에 차 있었다. 며칠을 머물면서 학교친구들을 찾았다. 겨우 하나만난 친구는 같은 반 이었던 엥흐타이방이었다. 껴안고 양 볼을 비비며 그가 깜짝 반갑게 반겼다. 타이방은 몽골이 러시아 키릴문자를 받아들이기 이전에 사용하던 몽골비칙(МОНГОЛ БИЧИГ : 내려쓰는 몽골의 옛 문자로 몽골은 1946년 1월 1일부터 새로운 문자인 러시아 키릴자모를 사용할 것을 공포했다. - 옮긴이 주) 문자연구에 빠져있었다.  
   “타이방, 토야 소식 모르지? 아빠 따라 유목 길을 떠난 뒤 토야를 한 번도 보지 못했어. 토야 아버지가 겨울을 보내는 목초지를 어디로 정했는지 그것만 알아도  찾을 수 있을 텐데. 내가 미쳐 토야 아버지에게 그걸 묻지 못하고 떠났어. 토야가 보고 싶어 죽겠어. 혹 토야 아버지가 겨울목초지를 고향인 여기 옵스초원으로 정해서 온다면 네가 토야를 만나게 될지도 몰라. 그럼 내말을 꼭 전해주렴. 아마 토야도 나를 찾을 거야.”
   “모두 옵스를 떠났는데 옵스를 떠난 뒤 지금까지 누구 한 번도 여길 오지 않았어. 엥흐바이야르 네가 처음이야. 이제 이 먼 곳에 올 일도 없겠지. 난 네가 토야와 함께 사는 줄 알고 있었어. 학교 친구로 겨우 하나 자야가 옵스에 살고 있는데 자야를 만나보렴. 혹 자야가 알지도 모르지.”
   “그래?”
   나는 다시 자야를 만났다. 자야는,
   “내가 들은 바로는 바트 토야가 열차기관사가 되었다더라.”
   하고 토야의 소식을 알려줬다. 그러고 보니 토야가 나와는 같은 하늘 울란바타르 수도에 들어와 있던 것이다. 나는 다시 옵스를 떠나 울란바타르로 돌아왔다. 열차기관사라면 중국과 러시아를 오가는 몽골중심 단일노선으로 열차의 통제와 모든 인력관리가 울란바타르 역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그를 찾기는 어렵지 않았다. 도착하기가 바쁘게 기차역을 찾아가 묻자 나이 든 역장이 말했다.
   “뭉흐 토야는 10일을 근무하고 몽골에서는 삼일을 쉬는데 보기가 어렵지. 마침 모레부터 쉬는 날이어서 내일저녁 6시에 교대가 이루어지니까 그 시간에 오려므나.”
   그러니까 토야는 몽골에서 쉬는 날을 제외하면 나머지는 중국이나 러시아 기차역 관사에서 숙박하는 것 같았다. 다음날 나는 서둘러 다시 기차역으로 향했다. 수흐바타르 광장 앞에서 미크로버스를 놓쳐 전차를 타고 가는 바람에 시간을 조금 지체하고 말았다. 전차는 기차역 반대편에서 쉬었다. 서둘러 길을 건너려는데 퇴근시간 때여서 열차에서 내리고 타려는 인파와 도로에 붐비는 차량사이로 기관사 복장에 금테 문양 차양 모를 쓴 토야가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반가웠다. 그가 붐비는 인파 속으로 일순간에 사라질 것만 같았다.
   “뭉흐 토야-,”
   다급한 나는 이렇게 큰 소리로 그를 부르려다가 “뭉흐 토……,” 하고는 말문을 닫아야만 했다. 두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토야에게 갓난아이를 안고 그에게 안겨드는 다른 여인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아기를 받아 안고 기뻐하는 모습을 먼빛으로 마냥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석양에 붉게 물든 톨 강변을(: 테를지 방향에서 울란바타르를 거쳐 흐르는 강 이름 - 옮긴이 주) 거닐었다. 차가운 강바람이 불었다. 눌러쓴 호르강 말가이 (: 새끼양의 털가죽으로 만든 전통모자 - 옮긴이 주) 양털 끝이 바람에 날려 눈을 가리면서 흐르는 눈물에 젖었다.

 

 

 

참고문헌 : 20세기 몽골의 역사 (케임브리지 대학발간. 저자, 바아바르(бабар) : 90년대 몽골 민주화운동 지도자이며 작가. 산자부장관 역임)

 

 

김 한 창  ---------------------------------------------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아시아거점 몽골문학레지던스 2011 선정작가, 몽골 울란바타르대학 연구교수역임 현 한국학과 객원교수(문학강의), 한국문인협회. 한국소설가협회 회원, 한국동인지문학아카데미 대표. 한-몽 문학교류협회 대표, 저서 : 단편소설 《핑갈의 동굴》, 《접근금지구역》,  장편소설 : 《솔롱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