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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수필과비평 2014년 2월호, 사색의 창] 사랑니의 비애 - 정서현

신아미디어 2014. 11. 28. 11:33

"나는 사랑니가 나고, 자라고, 뽑혀나가는, 전과정을 통해 그의 아픔을 조금이나마 헤아릴 수 있게 되었다. 의사의 지시대로 몽땅 빼버린 것이 과연 잘한 것인가 하는 후회도 들었다. 굳이 빼버리지 않아도 되는 거라면, 그래서 좀 더 살을 부비고 살았더라면, 하는 아쉬움과 함께 말이다. 축복받지 못한 삶이란 얼마나 비참한 것인가. 나는 사랑니를 통해 내 삶이 얼마나 고귀하고 감사한 건지 새삼 느낄 수 있었다. 아리따운 이름 뒤에 감춰진 사랑니의 비애. 참으로 애잔하다."

 

 

 

 

 

 

 

 

 사랑니의 비애         정서현


   오늘 사랑니 두 개를 뺐다. 다행히 뿌리가 아래로 곧게 뻗어 있어 그리 힘들진 않았다. 게다가 자그마한 체구에 여성스런 느낌마저 풍기는 의사의 섬세한 손놀림이 고통을 훨씬 덜어주었다. 칠 년 전 왼쪽 사랑니 두 개를 뺄 때와는 대조적이었다. 그때는 우람한 체격의 의사가 마취도 덜 된 상태에서 강제로 뽑느라 나를 공포로 몰아넣었다. 부끄러움도 잊은 채 비명을 지르고, 온몸이 땀으로 뒤범벅되었던 일. 지금 생각해도 정말 끔찍한 일이다.
   오늘을 끝으로 사랑니와는 완전 이별하게 되었다. 시원섭섭하다는 표현은 바로 이런 걸 두고 하나 보다. 20년 가량 내 입 안에서 동고동락해 온 사랑니. 때로는 심통을 부려 힘들게도 했지만 내 몸의 일부였던 것만큼은 분명한 사실이다. 나는 혀를 깊게 말아 그가 살던 자리를 더듬어본다. 뿌리째 뽑느라 마구 헤집고는 두루뭉술하게 꿰매 놓은 상태다. 끝까지 함께하지 못하고 중간에 내팽개친 듯한 자책감이 와락 밀려든다.
   사랑니가 나기 시작한 것은 대학교 2학년. 내가 막 첫사랑에 들떠 있던 때였다. 며칠 어금니 끝부분이 욱신거리며 부어오르는가 싶더니 통증은 점점 심해졌다. 볼거리를 앓는 것처럼 볼이 벌겋게 되고 고열도 났다. 입을 열고 닫을 적마다 부어오른 잇몸이 위쪽과 부딪히는 바람에 몹시 아팠다. 씹어 먹는 건 아예 포기하고 우유나 음료를, 그것도 빨대로 조금씩 빨아먹었다. 다이어트가 저절로 되는 듯했다. 말하는 것조차 어눌해서 어딘가 부족한 사람 같기도 했다. 이런 나를 두고 첫사랑 남자는 한없이 놀려댔다. 미개한 사람만 사랑니가 난다는 둥, 아직 진화가 덜 되어서 그렇다는 둥. 나는 그의 말에 대꾸하기도 힘들어서 그저 눈만 흘길 뿐이었다. 하지만 ‘사랑니’란 이름은 무척 마음에 들었다. 사랑을 알게 되는 시기에 난다고 해 그렇게 이름 붙여졌다고 하니 더욱 그랬다. 한편 사랑에 빠진 것을 들키기라도 한 양 쑥스러운 마음조차 들었다.
   열흘 가량 나를 괴롭히던 녀석이 드디어 잇몸을 뚫고 올라왔다. 어금니 맨 끝 부분의 살이 부풀어 얇아질 대로 얇아진 상태에서 하얀 얼굴을 쏘옥 내밀었다. 마치 오랜 진통 끝에 산도를 어렵사리 통과한 아가처럼. 처음에는 크기가 너무 작아 눈에 띄지도 않았다. 손가락으로 잇몸을 살살 만져보면 약간 꺼끌꺼끌한 느낌만 있었다. 녀석이 답답한 잇몸 속을 벗어나 바깥나들이에 성공한 다음부터 통증은 거의 사라졌다. 이후 내 관심사를 벗어나 있는 듯 없는 듯 자라주었다. 다만 피곤하거나 컨디션이 좋지 않은 날엔 자신의 존재를 은근 과시하곤 했다. 불만이 있는 듯 콕콕 쑤시기도 하고, 살짝 부어오르며 심술보를 드러내기도 했다.
   사랑니는 몇 년간에 걸쳐 모두 네 개가 순차적으로 났다. 그때마다 고통이 따르긴 했지만 처음만큼은 아니었다. 나의 첫사랑도 무려 칠 년 가량 이어졌다. 그렇다고 항상 좋은 날만 계속된 것은 아니었다. 철부지 아이들마냥 좋아라 하는 날이 있는가 하면 심기가 불편한 날도 있었다. 이런 날엔 사랑니의 아픔까지 겹쳐져 이중고를 겪어야 했다. 그야말로 나의 첫사랑은 사랑니와 더불어 한층 성숙해지고 있었다. 결국 만져지지도 않던 사랑니가 온전히 어금니의 형태를 갖추게 되었고, 나는 첫사랑의 남자와 결혼을 했다.
   신혼을 즐기던 어느 날이었다. 더 이상은 참기 어려운 듯 남편이 내게 고통을 호소했다. 사랑니가 나는지 너무 아프다며, 한쪽 볼에 손을 얹은 채 볼멘소리를 했다. 나는 박수를 치며 크게 소리 내어 웃었다. 예전에 나를 그렇게 놀리더니만 죄를 받은 모양이라며 깔깔댔다. 평소 엄살이라곤 없는 남편이 병원을 다녀오겠다며 서둘러 집을 나섰다. 아는 병인지라 나는 동행하지 않고 집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돌아올 시간이 훨씬 넘었음에도 불구하고 남편에게서는 연락조차 없었다. 한밤중이 다 되어서야 돌아온 남편은 초죽음이 되어 있었다. 사랑니 뿌리가 완전히 옆으로 뻗어있어 세 시간에 걸친 대수술을 받았단다. 더 이상 놀릴 수 없을 만큼 남편은 힘들어했다. 예전의 나처럼 며칠 동안 식사를 제대로 못했음은 말할 필요조차 없다.
   결혼생활 역시 연애시절과 마찬가지로 늘 달콤한 것만은 아니었다. 그때마다 어김없이 신호를 보내오던 사랑니로부터 연락이 뜸하더니, 이번에는 바로 옆에 있는 어금니로부터 전갈이 왔다. 더 이상 사랑니 때문에 살 수 없노라 했다. 자기 영역을 침범하는 것은 둘째고, 육중한 몸을 기대는 통에 자신이 병들었다고 했다. 설마 그럴까 싶어 반신반의하며 꾹 눌러 참았다. 어금니는 계속해서 나를 채근하며 어서 병원에 가볼 것을 간청했다. 마흔이 넘도록 충치 한번 앓아보지 않은 내가 치과병원을 간다는 것은 실로 겁부터 나는 일이었다. 진료를 마친 의사로부터 단호한 결정이 내려졌다. 사랑니로 인해 옆에 있는 어금니 염증이 심하니 사랑니를 뽑아야겠다고 했다. 이렇게 시작된 사랑니와의 이별이었다.
   사랑니는 제일 안쪽에 위치하는 세 번째 큰 어금니를 말한다. 인류가 진화하면서 퇴화하는 것 가운데 하나로, 나는 것도 사람마다 천차만별이다. 나처럼 네 개 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한두 개 나는 사람도 있고, 아예 나지 않는 사람도 있다. 자연의 섭리에 따라 맨 마지막 순서로 탄생하는 사랑니. 비좁은 틈새를 힘겹게 뚫고 나온 보람도 없이 태어나는 순간부터 천덕꾸러기 신세다. 이름처럼 사랑을 받기는커녕 불필요한 존재로 홀대받기 일쑤다. 그것도 모자라 작은 핑곗거리라도 생기면 앞뒤 잴 것도 없이 그냥 뽑아버리는 것이다.
   나는 사랑니가 나고, 자라고, 뽑혀나가는, 전과정을 통해 그의 아픔을 조금이나마 헤아릴 수 있게 되었다. 의사의 지시대로 몽땅 빼버린 것이 과연 잘한 것인가 하는 후회도 들었다. 굳이 빼버리지 않아도 되는 거라면, 그래서 좀 더 살을 부비고 살았더라면, 하는 아쉬움과 함께 말이다.
   축복받지 못한 삶이란 얼마나 비참한 것인가. 나는 사랑니를 통해 내 삶이 얼마나 고귀하고 감사한 건지 새삼 느낄 수 있었다. 아리따운 이름 뒤에 감춰진 사랑니의 비애. 참으로 애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