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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수필과비평 2014년 1월호, 지상에서 길 찾기] 손톱을 깎다가 - 최원현

신아미디어 2014. 10. 13. 11:50

"산소의 풀도 손톱도 자라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을 할 법 하지만 그게 좋은 일은 아니다. 지나치면 모자람만 못하다고도 한다. 손톱 하나 조금 늦게 깎아서 생긴 이 불편과 아픔도 본의 아니게 어쩔 수 없었던 것이었어도 그냥 지나가지 않잖은가. 불편하고 아픈 것이 며칠 갈 것 같다. 해야 할 때를 놓치면 꼭 그만한 대가가 따른다. 하찮아 보이는 일이라도 조심하지 않으면 그 또한 대가를 치른다. 따끔거리는 손가락을 보며 아직도 어른스럽지 못한 나를 본다."

 

 

 

 

 

 

 손톱을 깎다가        최원현


   아얏, 무심코 스친 것 같은데 나도 모르게 신음이 나와 버렸다. 날카로운 가시에 찔린 듯 따갑고 아리다.

 

   뭐가 그리도 바쁜 것일까. 사흘째 못했다. 오늘은 꼭 해야지 하다가도 급한 일이 생겨 나가게 되고 그러다가 잊어버렸다. 밤중에는 하는 게 아니라던 어릴 적 할머니 말씀이 생각나 내일 아침에 해야지 했는데 그것 또한 반은 잊고 반은 놓쳐버렸다.
   나는 손톱이 조금만 자라도 두고 보질 못한다. 그런데 오늘도 강의가 있어 아침 일찍 서두르다 보니 차를 타러 나가면서야 손톱을 못 깎은 것이 눈에 띄었다. 하얗게 표가 나게 벗어나 있는 부분이 눈에 거슬린다. 온종일 신경이 쓰였다. 점심을 먹으면서도 내 손을 누가 볼까봐 조심했다. 그런데 언제 어디서 무엇에 부딪쳤거나 걸려 그리 되었는지 손톱이 결 따라 찢어져 있었다. 따끔거리는 걸 보니 자칫 조금만 더 벌어졌으면 피가 나왔겠다.
   저녁에 집에 들어오자마자 TV 앞에서 손톱을 깎기 시작했다. 한데 갈라진 곳까지 깊숙이 손톱깎이를 집어넣어 자른다는 것이 TV화면에 잠깐 눈이 돌아갔는가 싶은 순간에 너무 깊이까지 잘라버렸다. 기어이 피를 보고 말았다. 쓰리고 아프다. 손톱 모양도 이 빠진 접시 모양이 되어버렸다. 지혈을 하고 다른 손톱들을 조심스레 마저 깎았다.
   문득 쓸데없는 손톱은 왜 자꾸 자라 이리 귀찮게 하나 하는 생각이 들려 했다. 그러나 순간 그 생각을 나는 의도적으로 중도에 차단했다. 혹여 손톱이 내 맘을 알아채기라도 했으면 몹시 서운했을 것이다. 결코 손톱은 쓸데없이 있는 게 아닌 것을 나는 안다.
   허리가 아파 정형외과병동에 입원을 했을 때다. 같은 병실에 고등학생이 손을 다쳐 들어왔는데 치료를 위해 손톱을 모두 뽑아버렸단다. 그런데 그 손으로는 아무것도 하질 못 했다. 손톱만 없는 것인데도 손가락을 쓰지 못했다. 붙잡지도 들지도 못했다. 숟가락조차 못 들었다. 신기했다. 손톱이 없는데 왜 손가락 전체가 힘을 못 쓰고 손도 힘을 못 쓰는 걸까. 사람의 허리뼈가 온몸을 세워주듯 손가락은 손톱이 그러는 것 같다. 손톱은 절대로 손가락 끝에 그냥 보호용으로만 있는 게 아니었다.
   학생은 아침에 일어나면 손톱부터 살폈다. 밤사이 손톱이 쑥 올라왔을 리 만무하지만 급한 마음에서 그럴 것이다. 손톱이 없는 그의 손은 그야말로 무용지물이었다. 의사의 말로는 손톱이 다 나려면 4-5개월은 걸릴 거라고 했다. 손톱은 손톱뿌리의 세포분열에 의해 성장이 일어나는데 1주일에 겨우 1mm정도 자란단다. 그까짓 손톱 다시 나면 되지 했겠지만 빠진 손톱이 나기까지는 상당한 기간이 필요했고 나도 손톱의 힘을 그때 실감했다.
   난 어렸을 때 손톱을 이빨로 물어뜯어 끊어내곤 하여 어른들의 야단을 맞곤 했다. 사실 그땐 지금 같은 손톱깎이가 있는 것도 아녀서 누군가에게 깎아달라고 부탁을 해야만 했었기에 난 조금만 손톱이 자라나도 그걸 두고 보지 못했다. 쉽게 고쳐지지 않는 버릇이었다. 그런데 중학교 때 도시에서 학교에 다니던 동네 형이 방학으로 내려왔는데 손톱으로 기타를 치는 것이 얼마나 멋져 보이던지 나는 기타도 없으면서 손톱부터 기르기 시작했다. 한데 손톱이 길어지니 불편한 게 또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조금 길어지니 한참 부산한 나이 때라 한쪽 끝이 부러져 칼날처럼 되고 그것이 반대편 손목에 상처를 내는가 하면 아무데고 찢어지게 되니 손톱엔 감각이 없는 줄 알았는데 참을 수 없을 만큼 아팠다. 하지만 손톱은 적당히 길어야 놀기에도 좋았다. 언젠가는 고구마 서리를 갔는데 하필 손톱을 막 깎은 뒤가 되어 흙을 못 파내 안타까웠던 적도 있다. 한 번은 이빨로 물어뜯은 손톱을 방안의 화로에 넣었다가 그 타는 냄새가 오징어 굽는 냄새가 나는 바람에 할아버지께 들켜 크게 혼이 나기도 했다.
   손톱은 우리 신체 중 이齒 다음으로 단단한 부위라고 한다. 손톱의 용도는 손톱 살을 보호하는 것이고 일을 할 때도 필요한 것이지만 요즘은 손톱깎이가 용도별로 다양하여 깎기나 다듬기에 편해선지 여자들은 그걸 다듬고 치장하여 아름다움을 누리니 손톱의 용도가 하나 더 늘어난 셈이다.
   조금 전엔 핸드폰 배터리를 교체하려 뒤 덮개를 열려는데 열 수가 없었다. 평상시 아무런 불편이 없던 것이다. 하필 손톱을 깎아버린 후에 덮개를 열려니 어찌 해 볼 도리가 없었다. 우리 생활에서도 이런 일은 수없이 많을 것이다. 있을 땐 효용가치를 모르다가 없으면 비로소 그 진가를 알게 되는 것이 어디 그것뿐이랴. 결국 아내를 불러 열어달라고 했는데 우리 생활용품들도 이런 손톱의 용도를 고려하였다는데 또 한 번 놀랐다.

 

   손톱을 깎다가 문득 지난 추석 때 부모님 산소에 벌초를 했던 것이 생각났다. 손톱 깎기와 벌초가 닮았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손톱이 자라듯 산소의 풀도 자란다. 둘 다 깎아줘야 한다. 어릴 때는 할머니나 이모가 손톱을 가위로 깎아주셨다. 그땐 손톱은 가위로만 깎는 건 줄 알았다. 좀 커서도 오른손은 누군가가 깎아줘야 했다. 난 왼손으로는 할 수 있는 게 거의 없다.
   나는 벌초를 낫으로만 했다. 고작 일 년에 한 번인데 그것마저 기계의 힘을 빌리는 것이 죄송스럽기도 했고 산소에 기계를 대는 것이 내 양심에도 허락되지 않았다. 부모님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란 고작 그것 하나뿐이기도 한데 말이다. 요즘은 손톱깎이가 있어 왼손도 오른손도 아무 때나 혼자서 손톱을 깎을 수 있다. 가위로 하는 것보다 편리하고 예쁘게 깎인다. 지난해부터 예초기로 벌초를 하고 있다. 어느새 힘에 부쳐 낫질하기가 쉽지 않아졌다. 결국 1년에 한 번 사용하는 것이겠지만 예초기를 구입했다. 그래도 초벌은 잡초나 쑥뿌리 같은 것을 손으로 뽑아냈다. 그런 후 기계를 돌렸다. 잘못하여 잔디의 뿌리까지 파내버리지 않게 운전을 잘 해야 했다. 아차 하는 순간 흙먼지를 일으키며 잔디뿌리와 흙이 하늘로 날아올랐다.
   시원스레 깎인 봉우리가 예뻐 보일 때면 기분이 한껏 좋아졌다. 손톱도 어떨 땐 잘 깎여지고 어떨 땐 밉게 깎여졌다. 잘 깎여졌을 땐 기분이 좋았다. 산소의 잔디가 너무 잘 자라 귀찮다는 생각은 안 들었다. 가끔 쑥뿌리가 뻗어 나와서 틈을 내어 찾아가 그를 제거해야 했지만 만일 그도 없다면 산소를 돌보는 일도 그만큼 줄어들 것이고 그만큼 관심도 적어질 것이다. 관심을 갖고 다녀간 흔적은 바로 나타난다.
   손톱을 깎다보면 내 몸의 건강상태도 체크하게 된다. 손톱의 색깔이나 결로 몸의 건강을 알아볼 수 있다. 만일 손톱 깎는 일이 없다면 그 또한 없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살아가는 속에 주어지고 이뤄지는 모든 것이 서로 관계가 있기 마련이고 서로를 지켜주는 것이 되고 그래서 불필요한 것이란 없는 것 같다. 그럼에도 생각에 따라 귀찮게 여기거나 감사해 한다. 그걸로 기분이 좋아지거나 나빠지기도 한다. 그러고 보면 장자莊子의 ‘굽은 나무’와 ‘울지 않는 오리’처럼 좋은 일과 나쁜 일은 함께 있는 것 같다.
   장자가 제자들과 산에 올랐는데 곧게 자라지 못해 구부러져 있는 고목을 보자 “이 굽은 나무는 좋은 재료가 될 수 없어 천수天壽를 누리는 구나.” 하더란다. 그런데 그날 저녁 장자가 친구집에 묵게 되었는데 친구가 장자를 대접한다고 “집에 있는 오리 두 마리 중 울지 못하는 놈을 잡아 손님 대접을 해라.” 하고 하인에게 지시하더란다. 어떤 때는 좋지 못한 것이 오래 살고 어떤 때는 좋은 것이어야 오래 사는 이런 현상에 세상 이치를 생각게 한다.
   산소의 풀도 손톱도 자라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을 할 법 하지만 그게 좋은 일은 아니다. 지나치면 모자람만 못하다고도 한다. 손톱 하나 조금 늦게 깎아서 생긴 이 불편과 아픔도 본의 아니게 어쩔 수 없었던 것이었어도 그냥 지나가지 않잖은가. 불편하고 아픈 것이 며칠 갈 것 같다. 해야 할 때를 놓치면 꼭 그만한 대가가 따른다. 하찮아 보이는 일이라도 조심하지 않으면 그 또한 대가를 치른다. 따끔거리는 손가락을 보며 아직도 어른스럽지 못한 나를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