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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수필과비평 2014년 01월호, 지상에서 길찾기] 신발 - 신서영

신아미디어 2014. 9. 29. 21:13

"신발은 그 주인의 삶을 닮아 간다. 윤기가 흐르는 남편의 구두 옆에 나란히 놓인 내 신발은 소박한 운동화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구두가 있던 자리다. 구두는 남편과 함께 출근을 했지만, 운동화는 출근하는 남편을 배웅한다. 운동화를 신고 어디든 나서도 낯가림이 없어 편하다. 쓰레기를 비우고, 재래시장을 다니고, 운동장을 걷고, 이웃과 차를 나누며 수다를 떨어도 아무렇지 않은 넉넉한 여유가 있다."

 

 

 

 

 

 신발        신서영


   산소호흡기나 첨단의료장비 등에 생명을 의탁하지 않는 말기 암 환자들이 병실 여기저기 섬처럼 누워 있다. 넓은 실내엔 깊은 적요가 출렁인다.
   그는 단잠에 빠져있다. 수면제를 복용한 탓인지는 모르지만, 잠든 모습이 너무 편안하다. 올레길 안내도가 그려진 알록달록한 수건을 목에 감고 있다. 봄소식이 들리는 어느 해안 길을 걷고 있는 꿈을 꾸는 것 같다. 잠을 푹 잘 수 있도록 한참을 그 곁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뼈마디가 앙상하게 드러나고 핏줄이 얼기설기 돋아난 그의 손을 살포시 잡았다. 따뜻한 체온이 느껴진다. 손가락이 자꾸만 미끄러져 내 손에서 스르르 빠져나간다. 잠을 깬 모양이다. 무어라 중얼거리지만, 소리는 입안에서 맴돌 뿐 들을 수가 없다. 모든 기력이 소진된 검불 같은 몸뚱이다. 차마 눈을 맞추지 못하고 창 너머로 시선을 돌렸다.
   그에게 할 수 있는 위로의 말은 아무것도 없다. 기운을 차리고 힘내라는 말도, 빨리 일어나서 동아리 활동을 함께하자는 말도 모두가 사치스런 빈말이다. 그저 지푸라기라도 잡을 수 있는 작은 기적이라도 이루어지길 신께 빌어볼 뿐이다.
   병원 문을 나서자 매서운 꽃샘바람이 나목인 가로수 은행나무를 거세게 흔든다. 깡마른 가지는 머지않아 파란 잎을 밀어 올릴 것이다. 두터운 옷깃을 세운 사람들이 종종걸음을 친다. 바삐 걸어가는 사람들을 보면 생동감이 넘쳐난다. 내 심장에도 피돌기가 빨라지는 느낌이 든다.
   동행한 그녀의 구두 소리가 또각또각 대리석 바닥을 찍는다. 경쾌한 리듬이다. 전등에 비친 윤기가 자르르한 지하 계단은 그녀의 구두와 더불어 어떤 활력소를 느끼게 한다. 차갑고 딱딱한 돌의 질감과 부드러운 리듬. 때로는 스타카토, 때로는 감미로운 레가토다. 젊고 건강한 모습은 모든 것을 아름답게 한다. 나는 언제 어디에서 저 소리를 잃어버렸는지 모르겠다. 굽이 낮은 펑퍼짐한 구두에 발이 질질 끌려간다.
   지하철 안에서 시선을 둘 곳이 마땅하지 않아 맞은편에 앉은 사람들의 신발을 차례로 내려다본다. 누런 흙이 군데군데 묻어 있는 약간은 낡은 등산화에 자꾸만 눈길이 간다. 중년인 사내는 허리를 구부린 채 졸고 있다. 신발을 보니 얼음이 녹은 산길을 헤매고 다닌 흔적이다. 아침나절에 산을 오르내린 차림새라면, 혹 명퇴를 한 처지는 아닌지 이런저런 생각이 마음을 더욱 무겁게 짓누른다.
   신발은 그 사람의 내면이고 외면이다. 혜원의 그림, <사시장춘>은 남녀가 벗어놓은 신발을 보며 조선회화에 나타난 에로티시즘의 극치라며 입방아를 찧는다. 장지문은 굳게 닫혀 있고, 댓돌이 아닌 쪽마루에 가지런히 벗어놓은 가냘픈 여인의 분홍 비단신, 급하게 벗어놓은 듯 흐트러진 사내의 검은 갖신이 그림보다 더 현실감 있는 상상의 나래를 펴게 한다. 이에 혜곡 선생은 ‘굳이 낯붉힐 설명 하나 없이 있을 것은 다 있고, 될 일은 다 돼 있다.’라는 은근하고 감칠맛 나는 말재간을 부렸다.
   사랑방 댓돌 위에 가지런히 놓인 할아버지의 흰 고무신은 그 모양만으로도 위엄이 서려 있었다. 대문을 들어서면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고무신, 할아버지의 장죽 터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옷매무새를 고치고 걸음걸이도 조심스러웠다. 달빛에 더더욱 하얗게 빛이 나던 고무신, 언니들이 밤마실 갔다 올 때면 신발을 벗고 고양이 걸음으로 사랑방 앞을 지나야 했다.
   그 고무신이 혼백과 함께 영여靈與를 타고 산길을 돌아 집으로 다시 돌아와서는 댓돌이 아닌 방안 빈소 앞에 얌전히 놓여 있었다. 곡소리는 환청처럼 들리는데 나는 하얀 고무신에 자꾸만 눈길이 머물렀다. 탈상을 하고 나면 다시는 보지 못할 신발을 살며시 만져 보았다. 말랑말랑 얇고 매끈한 촉감이 온몸으로 스며들었다. 혼백 때문인지 아직도 온기가 남은 듯했다. 뒷짐을 진 채 헛기침을 하시던 추상같은 위엄은 온데간데없고, 사랑채 앞 작은 뜰에는 매화가 하얀 꽃망울을 혼자 터트렸다.
   광안대교에서 신발을 가지런히 벗어 두고 바닷속으로 투신한 사건을 신문에서 읽은 적이 있다. 그는 생의 마지막 표적을 신발에 남겨두고 떠났을까, 아니면 죽음의 순간까지 만신창이가 된 삶의 무게를 곧추세워준 신발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였을까. 기사를 읽는 사람의 마음을 안쓰럽게 한다. 맨발이 빠져나간 자리가 텅 비어있어서 더 많은 것이 담겨있는 것 같은 죽은 자의 신발, 제 가족들에게도 말 못할 번뇌와 괴로움의 발자취를 고스란히 남겨둔 신발 한 켤레의 의미가 더욱 깊어 보였다.
   신발은 우주와 교감하는 안테나나 다름없다. 인체는 작은 우주라고 하지 않던가. 생명이 있는 모든 것들은 땅을 밟고 의지하며 살아간다. 내 몸의 가장 낮은 곳에서 나를 일으켜 세워준 고마움을 모르고 헌신짝 버리듯 살아온 지난날들이다. 때로는 발이 부르트는 아픔을 마다하고 새로 구입한 굽 높은 구두를 즐겨 신었다. 하지만 지금은 낡은 신발이 편안하다. 적당하게 닳고 헐거워진 신발은 오랜 친구처럼 말하지 않아도 마음의 아픔까지 보듬어 주는 믿음이 있다.
   신발은 그 주인의 삶을 닮아 간다. 윤기가 흐르는 남편의 구두 옆에 나란히 놓인 내 신발은 소박한 운동화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구두가 있던 자리다. 구두는 남편과 함께 출근을 했지만, 운동화는 출근하는 남편을 배웅한다. 운동화를 신고 어디든 나서도 낯가림이 없어 편하다. 쓰레기를 비우고, 재래시장을 다니고, 운동장을 걷고, 이웃과 차를 나누며 수다를 떨어도 아무렇지 않은 넉넉한 여유가 있다.
   그날 말기 암 병동 신발장에는 문병객을 위한 실내화만 있을 뿐 환자들 신발은 보이지 않았다. 신발 신고 걸어갈 길이 사라졌음을 예고한 것일까. 그와 함께했던 길들이 새삼 돌아봐졌다.
   화창한 주말, 이기대 갈맷길에 봄 마중이나 가야겠다. 발그레한 동백이 수줍은 듯 길을 안내하리라. 병상에 누워 있는 그에게 동백의 붉은 기운을 보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