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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수필과비평 2014년 01월호, 세상마주보기] 나의 꽃밭 - 김정수

신아미디어 2014. 8. 28. 17:14

"9월 나의 꽃밭에는 키가 훌쩍 커버린 백일홍 한 무더기와 분홍과 보랏빛의 과꽃 몇 포기만 겨우 살아남아 나를 위로해주고 있다. 과꽃은 연약한 줄기에서 기어이 꽃을 피워 간당간당 매달려 있어 애처롭기만 하다."

 

 

 

 

 

 나의 꽃밭       김정수


   우리 집은 아파트 2층이다. 1층은 앞뒤가 트인 빈 공간으로 통로로 쓰이고 있다. 그 통로 한쪽에는 크고 작은 나무들이 서 있는 화단이다. 화단 끝에는 인도로, 차도와 나란히 이어져 있어 가로수들이 서 있다.
   작년 어느 봄날, 화단에 서 있는 커다란 나무들의 가지가 전기톱으로 사정없이 잘려져 나갔다. 잘린 나무들은 거의 본체만 남아 있어 볼품없이 돼버렸다. 이곳에서 20여 년을 사는 동안 그렇게 나뭇가지들을 많이 쳐낸 것은 처음이었다. 숲과 같았던 곳이 하늘이 다 드러나도록 휑하니 삭막해졌다. 그 대신 화단 가득히 눈부신 햇살이 쏟아져 내렸다. 그곳에는 동네사람들이 마구 갖다버린 죽은 화초와 깨진 화분들이 어지럽게 나뒹굴고 있다. 나는 불현듯 그곳에 꽃밭을 만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지저분한 것들을 치우고 꽃을 심으면 이웃들도 뭐라 말할 것 같진 않았다. 그런데 그 쓰레기들을 치울 일이 걱정이었다. 하지만 그곳에서 화사한 꽃들이 다투어 피어날 것을 상상하니 되레 힘이 솟았다. 더구나 단독주택도 아닌 아파트에서 내 꽃밭을 갖는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 않은가. 두 평도 안 되는 나의 꽃밭이 그럴듯하게 만들어졌다.
   나는 예쁜 꽃나무들이 자라고 있는 곳을 보면 그냥 지나치질 못한다.‘내게 꽃밭이 있다면 저런 꽃을 심으면 얼마나 좋을까.’라며, 꽃밭이 없는 것을 몹시 아쉬워했다. 비좁긴 하지만 마침내 내가 소원하던 꽃밭이 생긴 것이다. 나는 좋아하는 꽃을 심을 수 있게 된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찼다.
   다음날 일찌감치 양재동 꽃시장에 갔다. 붉은 양귀비, 노란 달맞이, 하얀 마가렛과 이름을 모르는 청보랏빛 꽃을 골고루 섞어서 심어 놓고 보니 참으로 황홀했다. 틈만 나면 나는 꽃이 보고 싶어 꽃밭으로 나갔다. 솔직히 꽃밭 앞에 자리를 깔고 날이 저물도록 그곳에 앉아 음악도 듣고, 책도 읽고, 차도 마시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렇게 예쁘고 고운 나의 꽃밭을 혼자 보기에 아까워 친구들에게 꽃구경을 오라 하고, 우리의 모임이 있는 날엔 굳이 우리 집으로 장소를 정하도록 했다.
   내 꽃밭이 생기자 다른 곳에서 마음에 드는 꽃을 보면 내 꽃밭에 갖다 심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처음 보는 꽃을 보면 더욱 그랬다. 어느 음식점에서는 진분홍빛의 야생화를 주인에게 말해 얻어오기도 했다.
   어느새 나의 꽃밭에도 봄볕이 사라지고 무더운 여름이 찾아들었다. 하는 수 없이 시들어가는 꽃들은 거두고 어려서부터 정이 든 채송화와 맨드라미와 백일홍을 사다 심었다. 여름 꽃들도 다 좋지만, 나는 유독 과꽃을 심고 싶었다. 2, 3년 전의 어느 늦은 여름날, 홍천 근처로 가족여행을 갔을 때였다. 휴게소 모퉁이에 과꽃 몇 송이가 저절로 피어난 듯 아무렇게나 피어 있었다. 그 꽃을 보는 순간 나도 모르게 콧등이 시큰해졌다. 예쁠 것도 없는, 촌스럽고 보잘것없는 꽃이라며 눈길조차 주지 않았던 꽃이다. 그런데 뜬금없이 그 꽃이 내 눈에 들어온 것이다. 환갑을 지난 이제야 가슴을 뭉클하게 하는 그 꽃의 수수하고 소탈한 모습이, 잘날 것도 없고 내세울 것도 없는 나를 보는 것만 같아서였나 보다. 그 꽃을 찾기 위해 여러 화원을 돌아다녔으나 구하지 못했다. 가을이 되어서야 친구에게서 과꽃 씨를 얻을 수 있었다. 나는 그 씨를 뿌릴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기다렸다.

 

   어느덧 봄이 되었다. 설레는 마음으로 작년에 나의 꽃밭에서 받아둔 꽃씨들과 친구에게서 얻어 온 과꽃 씨도 행여 잊을세라 빼놓지 않고 뿌렸다. 얼마 후, 새싹들이 빼곡히 올라왔지만 기대만큼 쑥쑥 자라주질 않았다. 작년에 가지치기를 한 나무들이 왕성하게 새로운 가지를 뻗어, 햇살은 오전에만 잠깐 꽃밭을 비치고는 온종일 그늘이 져 있었다. 나는 날마다 그 여린 것들 중에서도 튼실한 것들을 골라 뿌리가 다칠세라 조심하며 햇볕을 조금이라도 더 쬘 수 있는 곳으로 옮겨 주었다. 정성을 들여서인지 양귀비와 청보랏빛 꽃나무가 키는 쑥 자랐지만, 어찌나 대궁이 가늘던지 봄내 꽃도 몇 송이 피우지 못하고 비실거리더니 마침내는 물러서 형체조차 찾아볼 수 없게 되어버렸다. 안타까워 가슴이 아팠다.
   나의 꽃밭에는 다시 그늘이 져서 씨를 뿌려 꽃을 피울 수는 없었다. 피어 있는 꽃을 갖다 심어야 할 것 같다. 그러나 아무리 싱싱한 꽃나무인들 일조량이 부족한 이곳에서는 살아나기 어려울 것 같았다. 그런 줄 뻔히 알면서 그곳에 꽃을 심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오래된 나무들을 베어버릴 수도 없는 일 아닌가. 무슨 일이든 이치대로 해야지 억지로 되는 일은 없다.
   9월 나의 꽃밭에는 키가 훌쩍 커버린 백일홍 한 무더기와 분홍과 보랏빛의 과꽃 몇 포기만 겨우 살아남아 나를 위로해주고 있다. 과꽃은 연약한 줄기에서 기어이 꽃을 피워 간당간당 매달려 있어 애처롭기만 하다.
   서운하지만 올해로 나의 꽃밭은 포기해야 할 것 같다. 비록 2년밖에 안 되는 짧은 동안이었지만, 꽃밭도 만들어 보았고, 좋아하는 꽃들도 심어 볼 수 있어서 나는 더없이 행복했었다. 허술하고 보잘것없는 내 꽃밭이었지만, 그것들과의 잠깐 동안의 인연이 아름답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