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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수필과비평 2014년 01월호, 세상마주보기] 날밭에서 잡힌 석동무니 - 김용순

신아미디어 2014. 8. 25. 13:59

"내 인생의 말은 어디쯤 와 있을까. 쫓기는 이 느낌은 무엇인가. 이러다가, 윷놀이 끝내고도 천장에 말판을 그리며 잠 못 들듯 인생놀이 끝내고도 구천을 떠돌며 영면하지 못하게 되는 건 아닐까. 혹여 아직 달지 않은 말이 있다면 이제부터라도 단동무니로 느리게 가고 싶다. 운명일랑 하늘 높이 던져 놓고 겅중겅중 춤추며 한바탕 놀다 가도 좋으리. 어차피 놀이가 끝나면 너나없이 훌훌 털고 두어 평 영면의 잠자리로 돌아가야 하지 않던가."

 

 

 

 

 

 

 

 날밭에서 잡힌 석동무니        김용순


   첫모 방정에 새 까먹는다는 말이 있다. 그런데 첫모도 두지 못했으면서 방정을 떨어 ‘새 까먹’고 말았다. 윷놀이가 끝나고 잠자리에 들었으나 윷가락이 어른거려서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문학세미나에 참가하느라 외숙을 하게 된 날이었다. 공식 일정이 끝나고 행사장 박수 소리의 여운을 그대로 간직한 채 숙소에 들었다. 무언가 모자란 듯 허기를 느꼈지만, 창밖을 내다보는 것 말고는 마땅히 할 것도 갈 곳도 떠오르지 않았다. 어느 버스 종점에 홀로 내린 막막한 느낌으로 우두커니 서 있는데, 평소 조용하기만 한 김 선생님께서 다가오셨다. 마치 내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빙그레 웃으시더니 가방을 뒤적거려 두 손바닥 넓이의 말판을 펴 놓으셨다. 그래도 그렇지, 모처럼의 자유 시간인데 방 안에 틀어박혀 윷놀이나 하잔 말인가. 시큰둥했다.
   “보통 윷과는 달라요. 천당도 있고 지옥도 있어요.”
   천당이라는 말에 솔깃하여 말판을 보니 희로애락이 다 쓰여 있었다. 그중에 ‘잉태’라는 글자에 눈길이 머물렀다. 아무것도 먹을 수 없고, 아무리 애를 써도 배설할 수 없는 입덧을 기꺼이 견디던 열 달, 환희의 잉태를 윷판에서 다시 경험할 수 있다고? 솔깃하여 말판에 다가앉았다. 같은 방에 배정받은 두 사람도 끼어들어 윷가락을 하나씩 던져 편을 가르고는 난데없이 윷판이 벌어졌다.
   말이 가야 할 길을 정해 두고는 기도하는 마음으로 윷가락을 던졌다. 그럴 때마다 우리 편은 “돗긴, 모!” 하며 애타게 격려를 보내는가 하면, 저만치 물러나 앉아 두 손을 모으기도 했다. 상대편은 “뒷도, 뒷도!” 하며 고함을 지르고 손뼉을 쳐대며 혼을 빼놓았다.
   그러나 어느 편의 장단에 춤을 출 것인가. 윷가락은 제멋대로 자빠지고 엎어지며 나 잡아 잡수 하고 윷배를 내밀기도, 시치미 뚝 떼고는 돌아눕기도 했다. 때로는 낙으로 객기를 부리기도 했다.
   말 하나가 스무 밭을 돌기 전에 ‘천당’에 이르러 수월하게 나고는 두 번째 말이 개밭에 올랐다. 용케 안 잡히고 살아남아 세 번째 말을 맞이했다. 업고 가잔다. 다음에 걸이 나와 앞서 가던 상대 말을 잡고는 모 한 사리에 도를 쳤다. 사기가 왕성해진 우리 편은 의기투합하여 석동무니로 말판을 돌게 되었다.
   반면 상대는 생윷으로 네 말이 뿔뿔이 흩어져 앞서거니 뒤서거니 공격해 왔다. 어느 말에게 잡힐지 몰라 조마조마했다. 한 방에 대박을 노렸던 과욕을 탓해보기도 했지만 엎어진 물그릇이니 어쩌랴.
   목구멍에서 단내가 올라올 때쯤이 되어서야 가까스로 날밭에 도착했다. 이제 도만 나오면 이긴다. 그러나 던지기만 하면 나와서 기를 죽이던 도가 모두 어디로 간 건가.
   “도, 도! 제발 한 번만!”
   그러나 윷가락을 던지는 것은 내 마음이지만, 떨어지는 것은 온전히 윷가락 마음이다.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윷가락의 그런 ‘제멋대로’가 오히려 짜릿한 매력인지도 모른다. 결과가 뻔하다면 무슨 재미가 있겠는가. 신이 인간에게 준 가장 큰 축복은 내일을 베일 속에 가려놓은 것이라고 하지 않던가. 학생들이 시험 치기를 좋아하지 않는 것도 어쩌면 결과가 뻔한 이유에서인지도 모른다. 시험지는 무리수도 에누리도 없이 수험생이 노력한 만큼만 점수를 주지 않던가.
   목이 쉬도록 외쳐도 도는 안 나오고 그토록 기다렸던, 이제는 필요 없는 윷, 모만 주책없이 나왔다. 그러는 사이 상대 말이 뒤를 바짝 쫓아오고 있었다. 드디어 상대 외동과 우리 석동무니가 날지와 날밭에 나란히 섰다. 마지막 기회였다. 우리가 도를 치면 이기는 것이고 상대가 도를 치면 우리 석동무니가 잡히는 판이었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윷가락을 던졌다. 개였다. 그리고는 그렇게도 기다리던 도가 나왔다, 우리가 아닌 상대편에서! 그들은 일어서서 환호성을 울리고 우리는 엎어지고 자빠지는 윷가락처럼, 방바닥을 치며 나뒹굴었다.

   한바탕 야단법석이 끝나고 미리 펴놓았던 이부자리에 나란히 누웠다. 딱 한 번만 더 놀아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여 잠이 오지 않았다. 석동무니로 내달리던 말만은 고쳐 놓고 싶었다. 옆자리에서 자는 상대편의 뒤척이는 소리가 미련을 부채질했다.
   아쉬운 것이 어디 윷놀이뿐이랴. 딱 한 번뿐이기는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이다. 주어진 것은 오로지 네 말과 말판 하나. 윷가락에 운명을 맡기고 날밭을 향하노라면 ‘천당’의 기쁨과 사랑의 결실 ‘잉태’ 환희를 맛보기도 하지만 곳곳에서 기다리는 ‘지옥’의 밭도 지나야 한다.
   내 인생의 말은 어디쯤 와 있을까. 쫓기는 이 느낌은 무엇인가. 이러다가, 윷놀이 끝내고도 천장에 말판을 그리며 잠 못 들듯 인생놀이 끝내고도 구천을 떠돌며 영면하지 못하게 되는 건 아닐까. 혹여 아직 달지 않은 말이 있다면 이제부터라도 단동무니로 느리게 가고 싶다. 운명일랑 하늘 높이 던져 놓고 겅중겅중 춤추며 한바탕 놀다 가도 좋으리. 어차피 놀이가 끝나면 너나없이 훌훌 털고 두어 평 영면의 잠자리로 돌아가야 하지 않던가.
   아쉬움에 꼬리를 물던 생각은 옆 사람이 코를 골아댈 때쯤이 되어서야 마무리가 되고 천장에서 어른거리던 윷가락도 희미하게 사라져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