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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과비평 2013년 12월호, 지상에서 길찾기] goodbye 성규 엄마 - 이차순

신아미디어 2014. 7. 1. 21:43

"우리는 가까우면서도 서로 배려했고 누가 되지 않기 위해 조심한 사이였다. 노후에는 자식한테 짐이 될 것까지 염려하던 분들이 어떤 각오로 떠났을까. 이것이 나와 영이별이 아니 되길 바라면서도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던 말을 생각해야 했다. “성규 엄마, 나한테 무슨 말 못할 사정이 있었나요?” 서둘러 문자를 찍고 보니 수신 전화번호마저 사라져 없다. 서운했지만 나는 나직한 소리로 ‘성규 엄마, 잘 가요.’ 뻥 뚫린 가슴으로 다시 작별을 해야 했다."

 

 

 

 

 

 goodbye 성규 엄마        -  이차순


   매년 열리는 문학행사가 금년에는 용인 민속촌에서 열린다고 했을 때 나는 환영했다. 민속촌 근처에는 성규 엄마가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선뜻 나설 형편이 못 되어 고민했다. 결국엔 참석하기로 마음먹고 새벽에 문자를 찍었다.
   “성규 엄마, 내가 오늘은 그곳에 갈일이 생겼어요.” 우리 민속촌 부근에서 만나 점심이나 같이하자는 문자를 띄우자 가슴이 뛰었다. 강산이 두 번 바뀌었으니 얼마나 변했을까. 평소에도 전화보다 문자를 이용해온 터라 일찍 문자로 알렸는데 바로 오던 회신이 없어 기다리게 했다. 종각역에서 민속촌행 버스를 타자 다시 문자를 띄웠다. 이 댁에선 민속촌이 불과 10여 분 거리라 하였으니 점심을 함께 못 하면 잠깐 얼굴이라도 볼까 한 것인데 도착하도록 아무 소식이 없다. 예까지 왔으니 선물이라도 전하고 갈 마음으로 근처 한 상가로 갔다. 과일 상자를 골라놓고 주소를 대니 곧 배달 될 것이라 했어도 어디선가 나타날 것만 같아 맞은편 식당으로 들어갔다. 음식을 주문하고 기다리는 동안 많은 생각을 떠올렸다. 갑자기 만나자는 말에 당황했나? 아니면 선약이 있는지도 모르지! 하면서도 그녀를 기다렸다. 눈은 핸드폰에 두고 식사를 마치도록 연락이 없자 갑자기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기대는 수포로 돌아가 홀로 행사장을 향해 걸어가며 지나온 일들을 그리고 있었다.

 

   나는 그때나 지금도 일이 많은 편이다. 친정 형제가 구 남매 되고 사촌형제도 많다 보니 집안에 대소사도 끊일 날이 없다. 반면에 성규 엄마는 친정도 단출한데다 두 팔 벌려도 걸릴 사람은 남동생 하나뿐이라 가고 올 사람도 별로 없는데 자녀 삼 남매가 모두 미국에 살아 부부의 유유자적한 삶을 부러워했다.
   그때 성규네와 함께 지냈던 생각에 잠기려는 순간 가방 속에 핸드폰이 부르르 울렸다. 성규 엄마 회신이었다. ‘죄송해요. 어쩌다 보니 연락을 못했는데 지금 우리는 미국으로 가기 위해 공항에 와 있어요. 그간에 집 팔고 이젠 미국으로 아주 갑니다. 곧 이 전화도 끊길 것입니다.’ 아니 이럴 수가? 언젠가는 한국을 떠날 분으로 알고는 있었지만 왜 하필 오늘이! 설마 아니길 바라지만 내가 진즉에 전화로 알려주지 못한 게 후회됐다.
   성규엄마는 지난해 봄, 심장에 이상으로 입원을 했었다. 이 소식을 뒤늦게 알게 된 나는 그때 바로 병문안을 겸해 집으로 찾아보려 하였지만 왠지 부담스러워해서 미뤄왔는데 이별을 알릴 줄이야! 전 같으면 벌써 달려가 그녀를 만나보았겠으나 공직에서 물러나신 성규 아버지께는 민폐가 될지 모른다는 생각에 찾아가지는 못했다. 양재쯤에서 만나고자 하였는데도 사양해 불경기의 여파로 아파트가 팔리지 않아서일까, 일이 뜻대로 안 돼서일까? 그녀의 불편한 심기를 지레짐작은 해보았었지만 이렇게 훌쩍 떠난다는 것은 상상도 못했다. 집만 팔리면 아들한테 가게 될 것을 당연지사로 생각한 터라 ‘잘됐다.’ 하면서도 왠지 모를 섭섭함이 밀려온다.
   성규 엄마는 내가 서른 살 되던 해에 서울로 이사와 처음 알게 된 이웃사촌이며 가장 가깝게 지낸 친구였다. 같은 아파트에 같은 동, 같은 층서 살았지만 나와 나이가 동갑이고 남편의 직업도 같은 공무원이어서 더 가까워진 것 같다. 아이들도 눈만 뜨면 한데 어울려 놀다보니 두 집은 자연스럽게 친해져 집안에 어려움까지 의논하는 사이가 되었다. 짧은 기간이나마 정들여 지내다 어느 날, 우리가 먼저 그 아파트에서 떠나게 되자 성규 엄마는 딸 현주를 업고 울먹였다. 이삿짐이 나오던 날도 차가 안 보일 때까지 손을 흔들어주어 나도 눈물을 글썽이며 떠나왔지만 그 뒤로 오고간 편지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고 일이 잘 풀리는 성규네를 부러워했다. 그녀는 남편 따라 해외생활, 여행도 많이 하였지만 아이들도 부모님 잘 만나 입시전쟁 모르고 명문대 나와 사회진출도 빨랐으니 나에겐 더없이 부러운 존재였다. 우리가 친할 수 있었던 것은 두 집 남편이 모두 조실부모하고 고생도 많이 한데다 실향의 외로움을 뼈저리게 겪은 사람들, 동병상련을 이해한 때문이라 보게 된다.
   얼마 후 성규 아버지는 가족과 함께 처음 해외근무지로 떠나게 되었는데도 두고 갈 짐을 맡겨 둘 친척이 없어 고민했다. 이때 내가 선뜻 맡아준 것이 인연되어 두 번, 세 번째 떠나게 되었을 때도 짐은 우리가 맡아야했으니, 이렇게 30년 우정을 쌓았다고 보면 남남이라도 전생에 어떤 관계였기에 피붙이처럼 생각하게 되었는지 보통 인연은 아니라 생각했다. 그런데 왜 성규 엄마는 나한테 한마디 말도 없이 떠나려 했을까? 지금은 그 마음 헤아릴 길이 없다. 이제 내가 생각해 본 것은 인간 생명은 유한하고 우리도 종착역이 가까워졌음이다. 왜 자식이 그립지 않고 외로움이 없겠나. 한때는 남들이 부러워하는 외교관생활로 자유분방했던 그때 모습을 떠올리자 내 마음이 숙연해진다. 그 연세에 ‘이젠 미국으로 아주 가요.’ 했지만 고국을 등지고 떠나는 노부부의 모습이 초겨울 석양처럼 그려진다. 예전엔 내가 그녀와 가족을 보내고 맞이하느라 김포공항도 수없이 나갔지만 그때는 다음 만남을 약속한 때문인지 떠나는 뒷모습까지 부러움을 주었는데 오늘의 작별은 약속 없는 이별이 되어 내게 아쉬움만 남게 했다.
   우리는 가까우면서도 서로 배려했고 누가 되지 않기 위해 조심한 사이였다. 노후에는 자식한테 짐이 될 것까지 염려하던 분들이 어떤 각오로 떠났을까. 이것이 나와 영이별이 아니 되길 바라면서도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던 말을 생각해야 했다. “성규 엄마, 나한테 무슨 말 못할 사정이 있었나요?” 서둘러 문자를 찍고 보니 수신 전화번호마저 사라져 없다. 서운했지만 나는 나직한 소리로 ‘성규 엄마, 잘 가요.’ 뻥 뚫린 가슴으로 다시 작별을 해야 했다.

 

 

이차순  ---------------------------------------------------
   ≪수필과비평≫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