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란스러웠다. 이제까지의 삶은 거짓이었단 말인가. 우리는 어머니의 허상만을 붙들고 살아온 것인가. 그런 생각들은 이내 형언할 수 없는 슬픔 같은 것으로 바뀌었다. 팔십 평생을 붙박이로 산 세월이 떠돌이 사당패를 꿈꾸게 했던 걸까, 운명처럼 짊어졌던 고된 짐을 춤과 노래로 잊고 싶었던 걸까. 아니면 어머니에겐 정말 우리가 모르는 광대의 기질이 숨겨져 있는 걸까…."
演-흐르다 / 이용옥
홑이불을 빨아 널었다. 바지랑대 높이 세워 햇살 더 가까이 밀어올린 모시 홑이불에 바람이 안긴다. 잠시 침묵하던 그들은 박자라도 맞춰보듯 서서히 움직이더니 수줍은 블루스와 흥겨운 왈츠를 거쳐 격정의 탱고로 춤판을 마무리한다. 드레스의 뒷자락처럼 현란하게 넘실대던 홑이불 깃이 언제 그랬냐는 듯 다소곳하다. 마당 가득 눈부신 햇살, 매미 소리 끊이지 않는 여름 오후.
어머니를 뵈러 간 겨울날에도 빨랫줄에는 이불 홑청이 널려 있었다. 삼 년 가까운 병치레, 그 고비마다 사경을 헤매다 일어난 어머니는 지칠 대로 지쳐 보였다. 그럼에도 병석을 벗어나면 먼저 하는 일이 그거였다.
“큰일 나면 너희들 와서 자야허니께.”
앞니 없는 어머니의 웃음은 아기같이 천진했다. 당신 머물던 자리에 얼룩 한 점 남기지 않으려는 그 결벽성이 안타까우면서도 야속했다.
부지런히 이불 홑청을 빨고, 풀 먹이고, 다듬어 시친 덕분에 어머니 떠난 장롱 속에는 정갈한 이불 몇 채가 남아 있었다. 장례 기간의 이틀 밤샘을 참지 못하고 그것을 펴면서, 복받치는 슬픔에 이불 위로 무너져내렸다. 그러나 풀기 센 홑청은 자꾸만 날 밀어냈다. 편하고, 따뜻하고, 익숙했던 어머니 냄새가 아닌 다른 무엇이 그 속에서 버스럭거렸다.
어머니는 정말 정갈한 이불 몇 채로 남고 싶었던 걸까. 그 이불 속에 숨어 있던 낯선 느낌은 무엇이었을까. 홑이불 속에 숨어든 바람같이 이물스럽던 그것은….
병원의 통유리 밖 풍경은 스산했다. 잎을 떨군 나무들은 앙상했고 낙엽들은 바람에 쓸려 거리를 헤맸다. 간간이 비까지 흩뿌리는 회색빛 하늘은 한 폭의 암울한 풍경화를 그려놓고 있었다.
“사람은 제 기를 다 피고 살아야 하는겨.”
하염없이 창밖을 바라보던 어머니가 느닷없이 던진 한 마디였다.
“제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살아야 한다는 얘기다.”
보충하듯 이어진 말에 장단이나 맞출 요량으로 건성 물었다.
“뭘 하고 싶으셨는데?”
“광대.”
귀를 의심했다. 광대에 내가 모르는 다른 뜻이 있었던가?
“사당패. 춤추고 노래하는 사람들.”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삼켰다. 미동도 않는 어머니의 마른 등판이 농담으로 웃어넘기기엔 너무 진지했기 때문이다.
어머니와 광대, 광대와 어머니…. 아무리 관계 지으려 해도 공통점이 없었다. 평생을 그렇게 깔끔하게 살아내시고 이제 와서 무슨 가당찮은 말인가. 나는 어머니를 종부宗婦가 되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안동김씨 가家 둘째 딸로 열여덟에 시집온 후 60년을 종택의 안주인으로 산 여인. 해마다 열 번이 넘는 봉제사에 술 빚고 떡을 쪄 제사 올리고, 일가의 대소사는 빠짐없이 챙겼으며 일곱이나 되는 자식을 엄격하게 길러냈다. 자손들 혼례며, 당신들의 회갑연에서도 노래는커녕 박수 한 번 쳐본 적 없던 분이….
혼란스러웠다. 이제까지의 삶은 거짓이었단 말인가. 우리는 어머니의 허상만을 붙들고 살아온 것인가. 그런 생각들은 이내 형언할 수 없는 슬픔 같은 것으로 바뀌었다. 팔십 평생을 붙박이로 산 세월이 떠돌이 사당패를 꿈꾸게 했던 걸까, 운명처럼 짊어졌던 고된 짐을 춤과 노래로 잊고 싶었던 걸까. 아니면 어머니에겐 정말 우리가 모르는 광대의 기질이 숨겨져 있는 걸까….
한참을 더 그렇게 있던 어머니는 부축을 받으며 자리에 누우셨다. 뼈대만 남은 몸은 종잇장처럼 가벼웠고, 불빛 아래 얼굴은 더없이 창백했다. 별 다른 표정의 변화도 더 이상의 이야기도 듣지 못하길 열흘. 초겨울 볕이 따사로웠던 날 저녁, 어머니는 홀연히 이승을 떠나셨다. 공연 끝낸 사당패가 장마당을 떠나듯이.
그날 밤, 매화 꽃잎 같은 눈이 내렸다. 수줍게 시작해서 흥겹게, 때로 격정적으로 휘날리던 첫눈. 넘실대는 홑이불 같기도 하고, 펄럭이는 한삼자락 같기도 했던 그것은 어쩌면 어머니가 이승에서 했던 처음이자 마지막 공연이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용옥 --------------------------------------------
이용옥님은 수필가, 《계간수필》로 등단.
'월간 좋은수필 > 좋은수필 본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좋은수필 2013년 11월호, 신작수필 14인선] 거짓말 - 고 춘 (0) | 2014.06.30 |
---|---|
[좋은수필 2013년 11월호, 신작수필 14인선] 가거도 섬등반도에 가면 - 김선인 (0) | 2014.06.30 |
[좋은수필 2013년 11월호, 신작수필14인선] 어느 연리지의 하루 - 조유안 (0) | 2014.06.24 |
[좋은수필 2013년 11월호, 신작수필14인선] 오늘은 하루뿐 - 유숙자 (0) | 2014.06.24 |
[좋은수필 2013년 11월호, 신작수필14인선] 벌초 - 강여울 (0) | 2014.06.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