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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수필 2013년 11월호, 신작수필14인선] 벌초 - 강여울

신아미디어 2014. 6. 24. 16:28

"당신 몸에 손대는 것을 싫어하는 아버님이지만 면도할 때만은 눈까지 지그시 감고 턱을 대준다. 면도가 그 사람의 얼굴을 환하게 하듯, 벌초는 묻혀버린 조상의 푸른 삶을 기억하고 확인하여 나의 근원을 되새기는 일이다. 소중한 나의 삶이 잡초 무성한 풀 무덤이 되지 않도록 날마다 마음을 깎고 다듬는 노력이 필요하다."

 

 

 

 

 

 벌초        강여울

 

   풀처럼 제 살 땅을 잘 찾아내어 몸 부려 놓는 것이 또 있을까. 사람의 발길 뜸한 곳일수록 풀은 무성하게 자라서 여름이 되면 온 땅이 풀빛으로 우거진다. 우거진 풀들은 그들의 입주를 자축하듯 세차게 줄기를 뻗고 꽃을 피우고, 씨앗을 사방으로 뿌린다. 풀들의 잔치가 무르익을 때면 잊고 있던 뿌리의 기억을 찾아 사람들의 벌초 행렬이 줄을 잇는다. 그 행렬에 섞여 산에 가면 나풀거리는 풀냄새 두르고 까까머리로 돋아 있는 묘들을 만나게 된다. 더러 전에는 미처 무덤인 줄도 몰랐던 봉분 낮은 무덤의 기침 소리에 깜짝 놀라기도 한다. 벌초는 우거진 풀을 깎아 앞서 간 조상의 무덤 앞에서 우리의 뿌리를 생각하고, 자신의 존재를 다시 확인하는 일이 아닌가. 벌초를 끝낸 묘가 사람의 몸처럼 느껴진다.
   나는 아침마다 아버님의 수염을 깎아 드린다. 어쩌다 바빠 하루 이틀 쉬면 웃자란 풀처럼 전기면도기로는 잘 깎이지 않는다. 하는 수 없이 비누 거품을 발라 예리한 일회용 면도기를 사용한다. 이렇게 밀면 전기면도기로 한 것보다 면도한 자리가 훨씬 매끈하다. 면도를 하면 할수록 수염이 풀 같다. 어디에서고 뿌리내린 목숨이란 위로 솟구쳐 살려는 의지가 강한 모양이다. 아버님은 일상은 물론 대소변까지 옆에서 거들지 않으면 안 되는 치매 환자다. 그런데도 수염은 뿌리내린 토양에 불평 없이 무성해지는 풀처럼 잘도 자란다.
   어느 여름, 남편의 친구가 늙으면 들어가 살겠다고 사 놓은 주말농장에 따라 간 적이 있다. 단감나무 수백 주를 심어 놓은 야산 언덕배기의 밭이었다. 감나무가 얼마나 자랐는지 보고, 풀도 뽑고, 앞 개울에서 물고기를 잡아 매운탕도 끓여 먹자고 하기에 즐거운 마음으로 따라 나섰다. 이천여 평의 밭에는 무릎 높이도 되지 않는 단감나무를 제치고 쑥, 비름나물, 개망초, 쓴나물 등 객풀客草들이 다 차지하고 있었다. 씨도 뿌린 적 없고, 거름이나 물을 준 것도 아닌데 풀은 온 밭에 가득했다.
   풀만큼 부지런한 목숨이 또 있을까 싶다. 몇 년 전에 식구들 양식이나 하자며 논 한 떼기를 사서 한 자 높이로 객토를 했었다. 거름기 하나 없는 속살처럼 싱싱한 흙에 무슨 씨앗이 있으랴 싶었다. 그런데도 모내기 철에 가보니 적지 않은 풀들이 하늘로 초록을 쏘아 올리고 있었다. 풀의 번식력과 왕성한 힘은 보도블록 비좁은 틈에서 대를 잇는 민들레, 오래된 와가의 지붕에 자라는 이끼풀이나 돌담 틈에 자라는 냉이꽃에서도 발견된다. 풀은 잘도 싹 틔우고 줄기차게 꽃 피워 몇십 배의 씨앗을 눈 깜박할 사이에 뿌려서 놀라움을 넘어 진저리치게도 한다.
   아버님, 어머님은 평생 농사를 지으며 사신 분이다. 내가 결혼해서도 거의 십여 년이나 농사를 지었다. 특히 밭농사는 풀들과의 전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씨 뿌리는 일이 끝나고 나면 아버님 어머님은 거의 날마다 호미로 풀을 뽑았다. 밭 한 떼기를 다 메고 나면 다음 밭에 무성하게 풀이 돋아 있고, 그 밭을 메면 처음 맨 밭고랑에 풀이 또 그만큼 자라 있는 것이다. 그러다 지치면 아버님은 제초제를 뿌리기도 하셨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다. 노랗게 말라 들어가는 풀들 사이로 다시 파랗게 다른 풀들이 고개를 내밀었다. 이렇게 끝없는 풀들과의 전쟁에도 불구하고, 해마다 풀은 그만큼씩 다시 살아났다. 
   벌초는 풀이 자라지 못하게 뿌리째 뽑거나 죽도록 제초제를 뿌리는 것도 아닌 웃자란 것을 잘라낸다는 점에서 면도와 참 많이 닮았다. 추석이 지나도 벌초하지 않은 무덤을 보면 짠해진다. 사는 게 바빠 이삼 일 면도를 해 드리지 않으면 아버님의 수염은 가시처럼 억세게 자라서 더 측은하다.
   당신 몸에 손대는 것을 싫어하는 아버님이지만 면도할 때만은 눈까지 지그시 감고 턱을 대준다. 면도가 그 사람의 얼굴을 환하게 하듯, 벌초는 묻혀버린 조상의 푸른 삶을 기억하고 확인하여 나의 근원을 되새기는 일이다. 소중한 나의 삶이 잡초 무성한 풀 무덤이 되지 않도록 날마다 마음을 깎고 다듬는 노력이 필요하다.   

 

 

강여울  ---------------------------------------

   강여울님은 수필가, 《월간문학》으로 등단. 《대구문학대구달서구보》 편집위원, 《수필세계》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