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좋은수필/좋은수필 본문

[좋은수필 2013년 11월호, 신작수필14인선] 전래동화집과 할머니 - 한명희

신아미디어 2014. 6. 17. 22:51

"한글을 읽을 수 있게 된 사실을 자랑스러워하던 할머니, 손자 손녀에게 손수 쓰신 편지를 읽으며 행복의 눈물을 지으시던 할머니, 전래동화집을 받고 어린아이처럼 즐거워하시던 할머니, 행복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생각해본다. 글을 읽고 쓸 수 있다는 평범한 사실에서 행복과 감사를 깨닫는다."

 

 

 

 

 

 전래동화집과 할머니       /  한명희

 

   KBS <6시 내 고향>을 즐겨 시청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가수 김정연이 버스 안내양 역을 맡아 서민들의 삶을 감칠맛 나게 그려내고 있는 <시골길 따라, 인생길 따라>는 빠짐없이 보고 있다.
   8월 12일에는 시골 버스가 전북 순창을 찾았다. 버스에는 시골 사시는 할머니를 뵈러 가는 손녀와 손자, 그리고 그들의 젊은 엄마가 타고 있었고, 손녀의 무릎 위에는 전래동화집 세 권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버스 안내양 김정연이 전래동화집을 들고 누가 보는 것이냐고 물으니, 할머니께 드릴 선물이라고 한다. 할머니는 한글을 모르셔서 불편하게 지내시다가 최근에 한글을 깨우치셨다고 한다. 그래서 읽을거리로 준비한 선물이라고 했다.
   손자 일행과 함께 버스 안내양 김정연이 할머니 댁을 찾았다. 할머니는 미리 연락을 받으셨는지 환한 웃음으로 손자 손녀와 함께 김정연을 반갑게 맞이하였다. 이야기는 자연스레 손녀가 가지고 온 전래동화집으로 옮겨졌고, 할머니는 배우지 못한 한恨을 부끄럼 없이 모두 털어놓으셨다.
   할머니가 자랄 때는 남아선호사상 때문인지 아들들은 가르치고 딸들은 가르치지 않아 한글을 모르는 상태에서 시집을 왔다고 했다. 글을 모르니 불편한 점이 하나둘이 아니었다. 남편이 돈을 찾아오라고 하면 글을 모른다고 할 수가 없어서 손목에 붕대를 감고 은행에 가서, 손목이 아파 글을 쓸 수 없으니 출금전표를 대신 써달라고 부탁을 하기도 하고, 광주光州에 나가 버스를 타게 되면 제대로 탄 것인지 불안하여 옆 사람에게 확인을 하고 나서야 마음을 놓았다고 한다. 그 고충을 어떻게 일일이 다 열거할 수 있을까.
   할머니는 군대에 간 아들에게 편지 한 장 써 보내지 못한 것이 지금껏 한이 되었다고 하면서 손자에게 쓴 편지를 읽다가 결국에는 눈물을 흘리셨다. 눈뜬장님으로 살아오신 긴 세월이 억울하여 자신도 모르게 설움이 북받쳐 오른 것 같다. 그 모습에 나도 생각지 않은 눈물을 보였다.
   다행스럽게도 할머니는 잠시 후 밝은 미소를 지으셨다. 늦기는 했지만 한글을 깨우치신 사실에 스스로 만족하고, 행복해하시는 모습이다. 할머니의 미소를 보면서 행복이 무엇인가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았다. 
   아직도 우리 주위에는 한글을 제대로 몰라 불편을 겪으시는 할머니들이 많이 계시다. 할아버지들은 군대에 갔다 오신 때문인지 대부분 한글을 알고 있다. 예전에는 장병이 한글을 모르면 부대 내에 공민학교, 공민반 등을 만들어 별도로 한글 교육을 시켰다.
   글을 모르면 생활하는 데 불편도 크지만 더 심각한 것은 심리적 위축이다. 글을 모르면 자신감을 잃게 되고 매사에 소극적이 되어 사회생활을 제대로 할 수 없게 된다.
   내가 어릴 적에 이웃에 글을 모르는 할머니 한 분이 사셨다. 그 할머니는 언제나 나를 자상하게 보살펴주고 귀여워해 주셨다. 나는 어른이 한글을 모른다는 사실이 이상하여 어느 날 할머니께 정말 글을 모르시냐고 직접 물어보았다. 그리고는 쑥스러워하시는 할머니를 처다 보면서 재미있다는 듯이 혼자 새새거린 일이 있다. 할머니의 아픔 같은 것은 생각조차 못하고….
   글을 모른다는 것은 정말로 큰 상처이고, 장애이다. 우리는 그들에게 세상 문을 열어주어야 한다. 광명을 찾아주어야 한다. 평생교육법에는 일상생활을 하는 데 불편함이 없도록 조직화된 프로그램을 통하여 문자 해독 능력을 갖출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글을 읽고 쓸 수 없는 사람들의 고충을 해결하기 위한 국가의 이러한 노력은 늦은 감이 없지 않으나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다.
   퇴직 교원 평생교육활동지원법에 의해 운영되고 있는 한국교육삼락회도 국가의 이러한 시책에 부응하여 ‘마을학숙’이라는 사회교육기관을 운영하고 있다. 그중 경기도 포천 ‘운천 마을학숙’에서는 2003년부터 지금까지 10년 동안 52명에게 한글을 깨우쳐 주었다고 한다. 눈뜬장님처럼 불편하게 살아온 그들에게 새로운 세상을 열어준 것이다. 얼마나 보람차고 고마운 일인가.
   우리 주위에는 아직도 한글을 몰라 불편하게 사시는 할머니들이 있다. 그 수가 미미하지만  방치해서는 안 된다. 그들의 못 배운 한은 어떻게든 풀어주어야 한다. 그것이 배운 사람들의 몫이고 책무이다.
   한글을 읽을 수 있게 된 사실을 자랑스러워하던 할머니, 손자 손녀에게 손수 쓰신 편지를 읽으며 행복의 눈물을 지으시던 할머니, 전래동화집을 받고 어린아이처럼 즐거워하시던 할머니, 행복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생각해본다.
   글을 읽고 쓸 수 있다는 평범한 사실에서 행복과 감사를 깨닫는다.

 

 

한명희  -----------------------------------------------

   한명희님은 수필가. 월간 《문학저널》 편집위원. 수필집 《드러누워 보는 세상》, 《참을 걸 베풀 걸 즐길 걸》, 시집 《배꼽》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