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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과비평 2013년 12월호, 지상에서 길찾기] 손 글씨  - 김재환

신아미디어 2014. 6. 29. 21:48

"글씨 쓰는 과정이 수양이며 득도이리라. 가끔 붓을 잡고 자신과 갈등하며 싸움을 한다. 최소한의 만족을 위하여 몸부림쳐보지만 늘 제자리걸음이다. 한 평생을 글씨에 매달린 대가들을 부러워한다. 불가능한 일임을 잘 알면서 만용을 부려본다."

 

 

 

 

 

 손 글씨       -  김재환


   나는 오늘도 손바닥만 한 사진엽서에 만년필로 편지를 쓴다. 몇 해 전 흠모하는 J 작가님이 보내준 워터맨(Water Man) 만년필이다. 서툰 컴퓨터 글쓰기를 시작한 뒤 멀어진 게 손 글씨다. 펜촉이 다 닳아버린 손때 짙게 묻은 파커(Paker)와 파이로트(Pilot) 만년필 몇 자루는 소임을 다하고 책상 서랍 속에서 골동품 대우를 받으며 편히 쉬고 있다. 한때 잘나가던 소싯적을 추억하면서…….
   어릴 때 문화연필은 참 좋은 친구였다. 종이가 절대 부족했던 그 시절, 글쓰기를 좋아했던 나는 달력이나 회 포대 등에 글씨 쓰고 그림 그리며 낙서하기를 무척 즐겼었다. 우리 고장 전주에서 생산되던 향나무 냄새 그윽한 문화연필은 으뜸이었다.
   그때 동아연필은 내겐 만년 은메달이었다.
   붓글씨에 익숙했던 아버지 세대가 지나고 연필글씨에 정들 무렵, 펜글씨가 대세인 양 밀려왔다. 잉크가 부족하면 선친께서 쓰던 벼루에 먹을 갈아 먹물을 잉크병에 담아, 펜촉이 칼날처럼 다 닳아 종이가 베어질 때까지 노트를 메웠다. 초등학교 고학년부터 시작된 펜글씨는 중고등학교 때까지 이어졌다.
   곧바로 만년필시대(파이로트)는 사라지고 모나미시대가 열렸다. 볼펜이 필기구의 제왕의 자리에 자연스럽게 군림하였다. 볼펜은 편리성과 경제성을 무기로 필기구의 왕자 자리를 차지했으나 예술성 높은 글씨와는 거리가 멀었다. 펜과 볼펜의 장단점을 두루 갖춘 만년필은 버릴 수 없는 묘한 매력을 가지고 있어 만인들에게, 특히 문인들에겐 보물과 같은 존재였고 연인이었다. 멋쟁이 신사의 정장차림엔 만년필은 필수 휴대품이었다. 신사복 윗주머니에 꽂혀있는 한 자루 만년필은 산뜻한 장식품이고 액세서리였다.
   인기가 영원할 것 같던 만년필도 20세기 문명의 총아, 컴퓨터의 등장으로 시들해졌다. 요즘 어린애들은 만년필을 알기나 할까? 문명의 흥망성쇠의 속도가 너무 빨라 어리둥절해진다. 지난날 메모장과 일기장, 습작노트를 펼쳐본다. 연애시절 오고간 수백 통의 연서는 명문이고 명필이다. 지금 보아도 미소 지어지는 참 정성들여 잘 쓴 만년필 글씨다. 시나브로 글씨가 흘림체로 변하며 형편없이 망가지고 있음을 한눈에 발견한다. 불혹에 접어들면서부터 확연히 눈에 띈다. 볼펜의 전성시대부터다. 그동안 만년필 글씨를 꽤나 고집하며 사랑해 왔었다. 컴퓨터에 맛들인 새천년을 맞으며 형편없는 난필이 되고 졸필이 되었다.
   집안 대물림인지 필체가 괜찮다는 소리를 듣고 살아왔다. 진즉부터 멋들어진 붓글씨를 쓰고 싶었다. 퇴직 이후 육 년째 서예공부를 하고 있다. 당연히 우리글 한글을 먼저 쓰고 싶었으나 한문 먼저 시작하라는 주위 분들의 권유를 빌미로 시작한 게 영 개운치 않다. 전국규모의 권위 있는 서도대전에 얼굴 내밀어 몇 번의 입상경력을 쌓았다. 유명 비문을 탁본하여 만든 체본을 기초로 서체를 모사하는 과정이다.
   글씨를 쓰는 게 아니라 그린다는 게 맞을 것이다. 어쩌면 독특한 자기만의 서체를 이룰 때까지 누구누구 체를 모사하는 짝퉁 글씨인 셈이다.
   손 글씨를 멀리하고 컴퓨터로 글을 쓰다 보니 낱말, 맞춤법, 한문, 사자성어 등을 자꾸 까먹는다. 독특한 나만의 펜글씨체가 망가지고 품격 있는 글씨를 쓸 수가 없다.
   가끔 보내주는 아이들의 편지를 읽는다. 큰 딸애의 글씨는 뚜렷하고 차분하다. 둘째 딸의 글씨는 유려하며 정갈하다. 아들의 글씨는 강건하나 왠지 어설퍼 보인다.
   형제간이지만 손 글씨는 같은 듯하면서도 제각각이다. 눈여겨보면 그 애들의 미세한 개성이 엿보인다. 애들의 성격이 잘 담겨있음을 금세 느낀다. 컴퓨터 세대라 그런가? 요즘 아이들에게 글씨를 보고 읽는 것은 솔직히 고역이다. 옛 직장 후배 하나는 워낙 악필이라 제가 쓴 글씨도 조금만 지나면 읽지 못해 박장대소한 적이 있었다. 글씨란 원래 내림이 있다고 하나 노력이 깃들면 명필이 되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저명 모모 작가들은 수습작가시절 유명작품을 노트에 여러 번 필사를 하며 문장력과 글씨를 키웠다는 고백을 들은 적이 있다. 추사 김정희 선생은 벼루를 열 개를 닳아 없애고 붓 천 자루를 닳아 없앴다고 전해진다. 독필禿筆이라 했던가.
   대단한 집념과 의지의 결실, 조선 최고의 서예가, 학자로서 추앙받고 있지 않는가.
   글씨는 곧 그 사람의 인격이라 했다. 그 사람의 정성이며 영혼이다.
   글씨 쓰는 과정이 수양이며 득도이리라. 가끔 붓을 잡고 자신과 갈등하며 싸움을 한다. 최소한의 만족을 위하여 몸부림쳐보지만 늘 제자리걸음이다. 한 평생을 글씨에 매달린 대가들을 부러워한다. 불가능한 일임을 잘 알면서 만용을 부려본다.
   남은 인생 즐기며 몇 자 써보는 것을 즐거움이라 생각하면서, 내 자신의 수련을 위해 손 글씨의 매력에 빠져본다. 몰입하다 보면 마음 한구석에선 잘 쓰고 싶은 욕망이 슬그머니 고개를 쳐든다. 이 나이에 또 욕심을 버리지 못하는 우둔함을 탓한다.

 

 

김재환  ----------------------------------------------

   ≪수필과비평≫ 등단. 수필집: ≪금물결 은물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