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소한 냄새로 온 집안에 설날 꽃을 피웠던 강정 만들기가 마무리되었다. 어머니는 함께 늙어가는 강정 틀을 깨끗이 손질하여 제자리에 간직했다. 내년이면 다시 사그랑이 된 강정 틀을 닦고 동백유로 광을 내어 몸이 허락하는 날까지 강정을 만들 것이다. 가까운 이들이 맛깔스럽게 먹는 모습이 좋아서 만들고 싶다고 하셨다. 그러나 나는 안다. 강정을 드시며 간의 가감을 알려 주던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기억하기 위해서라는 것 말이다."
강정틀 - 김경자
직사각형 자작나무 틀이 거실 한가운데 오롯이 놓여 있다. 귀티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지만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모양새가 제법 득의양양하다. 제집에 앉은 듯, 거뭇하게 엮인 나이테마다 주인과 함께 보낸 삼십 수년이 스며있다. 올해도 어김없이 어머니는 그 반려를 다독여 목련처럼 고운 오색 강정을 만들어 보내주셨다.
보자기를 풀어 사각 대바구니 뚜껑을 열었다. 오색 강정이 겨울 낮 햇살을 받으며 울긋불긋한 자태를 드러낸다. 겨울에 핀 꽃밭이 드러난다. 뽀얗게 부푼 찹쌀 강정은 방금 핀 은목서꽃을 보는 듯 새하얗고 핑크빛이 얇게 감도는 백년초 강정은 매화를 닮았다. 노란 빛깔의 유자청을 휘감은 강정은 한창 물오른 봄날 유채꽃이며, 새까만 쥐눈이콩 강정은 파란 속을 드러낸 채 한껏 영양 성분을 자랑하고 있다. 참깨와 땅콩이 혼합된 강정은 담백한 향을 솔솔 낸다. 나는 목젖까지 차올라 울컥이는 마음을 억누르며 최고의 미각자가 되어 하나씩 맛을 본다. 식도로 삼키는 강정에서 솟아나는 어머니의 온기가 30여 년째 내 몸 안으로 녹아든다.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 명절이 다가오면 어머니 심부름으로 뻥튀기 가게에 갔다. 뻥튀기 가게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순번을 기다리고 있었다. 시장 한쪽에 낮은 양철지붕을 얹고 있는 가게는 겨우 비만 피할 정도이고 사방에서 불어오는 황소바람은 사람들의 온몸을 움츠리게 했다. 뻥튀기 기계는 화려한 불꽃을 올리며 신이 난 듯 열심히 돌아가고 있었다. 내 순서가 언제 돌아올지 기약이 없다. 족히 한나절은 기다려야 했지만 강정 먹을 것을 생각하면 지루함도 없었다.
넓은 이마와 귀밑까지 수염이 덥수룩한 주인아저씨는 긴 줄을 볼 때마다 벙긋 웃음을 지었다. “펑펑” 울리는 뻥튀기 소리가 날 때마다 웃음소리는 더욱 커졌다. 손님들도 그때마다 탄성을 질렀다. 피곤한 기색이나 지루함은 찾을 수가 없다. 얌전히 누워 있는 무명 쌀자루를 순서에 맞게 남겨 두고 시간도 보낼 겸 친구들과 비석치기를 했다. 겨울바람이 훈훈해졌다. 드디어 내 차례가 다가왔다. 그리고 펑 소리와 함께 내 자루도 마술처럼 부풀어 올랐다. 그렇게 시간을 굴리며 튀겨온 박꽃 같은 쌀 튀밥은 어머니의 손에서 올망졸망 강정으로 만들어졌다.
강정은 손길을 많이 거친다. 맛과 영양을 듬뿍 담으려면 아무래도 제대로 된 과정이 필요하다. 첫 단계가 찹쌀을 불려서 고두밥을 찐 다음 며칠 동안 바싹 말려 널찍한 프라이팬에서 천천히 볶으면 삭풍 일던 산골에 설화가 피어나듯 밥풀이 새하얗게 부풀어 오른다. 때맞추어 참깨와 땅콩, 쥐눈이콩, 들깨 등을 볶는다. 그런 다음 솥에서 엿을 녹여 재료를 색깔 별로 넣고 곱게 갈아 놓은 유자청과 생강청을 가미하면 특색 있는 맛을 내며 좋은 색감으로 마무리된다.
해가 갈수록 윤기를 더해가는 강정틀이 제 일을 할 때다. 투명 색의 두꺼운 비닐을 깔고 볶아 놓은 재료를 손의 요량에 따라 엿물을 혼합하여 뜨거울 때 재빨리 저어 틀에 붓는다. 재빠른 동작으로 둥그런 방망이를 힘껏 밀어 평평한 상에다 붓고 웬만큼 굳었을 때 일정한 모양으로 썰어서 더 굳히면 씹는 소리조차 통쾌하고 자로 잰 듯한 사각형 강정이 완성된다. 무엇보다 강정 만들기에서는 동작이 빨라야 제대로 모양을 낼 수가 있었다. 수월해 보이지만 나름대로 기술이 필요했다.
요즈음에는 거리마다 인스턴트와 패스트푸드가 넘치고 있다. 모든 것이 귀했던 시절에는 간식거리가 참으로 귀했다. 녹록지 않은 살림살이에도 꼭꼭 마련한 강정은 어머니표 최고의 간식이었다. 그렇게 어머니는 강정을 만들어 가족과 지인들께 나누어 준다. 세월이 묵을수록 강정에는 어머니의 영혼과 정성이 배어 들었고 나무틀 하나로 어머니의 사랑을 조각하여 자식들에게 건넸다. 그것이 자식과 손주들, 지인들과 마음을 나누는 어머니만의 유일한 방식이다.
어느덧 어머니의 인생도 여든셋 고개를 넘고 있다. 노곤한 삶이었지만 어머니에게 강정 만들기는 행복이었다. 예부터 강정은 영양 간식이고 손님을 접대할 때는 꼭 있어야 할 세찬이었다. 인가人家에서는 선조께 제사드릴 때 제수용으로는 으뜸이었으니 어머니는 강정의 미덕을 잘 아셨나 보다.
올 초에도 고소한 냄새로 온 집안에 설날 꽃을 피웠던 강정 만들기가 마무리되었다. 어머니는 함께 늙어가는 강정 틀을 깨끗이 손질하여 제자리에 간직했다. 내년이면 다시 사그랑이 된 강정 틀을 닦고 동백유로 광을 내어 몸이 허락하는 날까지 강정을 만들 것이다. 가까운 이들이 맛깔스럽게 먹는 모습이 좋아서 만들고 싶다고 하셨다. 그러나 나는 안다. 강정을 드시며 간의 가감을 알려 주던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기억하기 위해서라는 것 말이다.
내년, 후내년에도 강정 틀에서 계절을 알리는 작품이 만들어지길 기원해 본다. 굵은 손마디에서 피는 쌀꽃, 찹쌀꽃, 참깨꽃……. 정월 대보름날 달빛 아래 빛나는 꽃밭이 눈에 선하다.
김경자 ---------------------------------------------------
≪수필과비평≫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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