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선읍내 물레방아는 사시장철 물살만 안고 빙글빙글 도는데 우리 님은 날 안고 돌 줄을 모른네."
정선아리랑 / 박 재 삼
예미禮美에서부터 정선까지는 꼬박 세 시간이 걸렸다. 산록에서 중복께를 향해서 치닫는가 하자 또다시 중복에서 산록께를 향해서 내리닫는다. 길도 좋지 않는데 상승과 하강을 거듭하기를 얼마나 했는지 모른다. 굽이굽이 구절양장의 산길이었다. 정선군하는 거의가 다 가파른 길이라 한다. 그러한 산길을 따라 비스듬히 옥수수밭과 콩밭이 심심찮게 길동갑을 하고 있었고, 밭이 없는 데에서는 새들이 깃들이기에 흡족한 숲이 들어차 있었다.
차창을 통해서 간혹 꿩이 기어 달아나는 것을 보기도 하고, 새떼가 우루루 다른 데를 향해서 날아가는 것을 보고 심심산천深深山川이란 잊었던 말이 떠오르곤 했다.
아다시피 아리랑은 우리 민요를 대표하는 노래다. 아리랑하면 외국 사람들도 으례 ‘한국의 민요!’하게 되어 있다. 따라서 그 아리랑만큼 풍토와 환경을 따라 변조를 많이 보인 노래는 없다. 그만큼 갈래가 많고 다양한 노래다.
『정선아리랑』은 그 많은 아리랑 중에서도 애조哀調에 있어서나 절창도絶唱度에 있어 절정을 이룬다고 이곳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입에 침이 없다. 아닌게 아니라 사방이 울창한 숲으로 둘러싸이고 하늘이 가까운 고장이고 보면 한결 두절감杜絶感은 더하고 적막강산이 된다. 그리하여 고개를 넘는 어려움으로 노래가락 역시 많은 고개를 넘기는 어려움을 보였다. 그러나 이제는 『정선아리랑』의 굽이지는 고개를 따라 반대로 산길이 넘어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정선읍내 물레방아는
사시장철 물살만 안고
빙글빙글 도는데
우리 님은 날 안고
돌 줄을 모른네.
가락은 슬프다 못해 청승맞기조차 하였다. 그것은 노래라기보다 듣는 이에 따라서는 흐느낌과 종이 한 장을 사이한 정도밖에는 다른 무엇을 못 느길는지도 모른다. 흐느낌 근처에까지 다 온 한恨이 겨우겨우 ‘노래가락’의 격식만을 갖추고 있는 그런 아슬아슬한 노래라 할까. 「울어서는 안된다」, 「울 수밖에는 없다」 ― 이 두 가지가 눈물겨운 배반背反과 조화를 동시에 간직하고 있는 것이 『정선아리랑』의 가락이라 하면 어떨는지.
가사에는 한 얘기가 얽혀 흐르고 있다.
초립草笠동이 신랑이 있던 조혼助婚의 풍습에 얽매였던 시절이다. 신부는 스무 살에 신랑은 열 살. 처음에는 보나마나 신부가 많은 것을 참고 사는 세월일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나 글 참고 살아왔던 세월이 한 순간에 무너질 뻔했다. 어찌 이리도 부부로서의 재미가 너무 없는가 비관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하여 나 하나 죽으면 그만이라는 생각에서 투신자살을 꾀하여 조양강朝陽江에 이르렀다. 강에서는 마침 물레방아가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그 물레방아에서 그녀는 문득 세월의 본체本體를 느꼈던 것일까. 세월은 한 순간의 희노애락喜怒哀樂을 위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세월은 어디까지나 참는데 있는 것이다. 여기에 그녀의 막혔던 정신이 비로소 눈을 뜨게 된 것인지 모른다. 이 정신의 개안開眼이 육체의 서러움 정도는 능히 떠받들 만큼 힘이 있었던 것이라 할까. 그리하여 그녀는 세월이라는 큰 인식이 주는 그늘에 묻혀들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다, 우리 남편의 그 장성長成을 기다리는 것이 내가 할 도리이다 ― 이런 심정에서 저절로 노래가 나왔다는 것이다.
지금도 용탄龍灘과 신월에는 물레방아가 있기는 하나 이 노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었다. 이 노래가 발상되었다는 물레방아는 봉양리鳳陽里 상동上洞에 있었던 그것이다. 지금은 그 언저리 수량水量이 줄어 물레방아는 자취도 없고, 다만 크고 작은 돌들만이 강바닥에 하얗게 깔려 세월의 무상無常을 알려 줄 뿐이다.
원래 그 물레방아는 지금부터 60년쯤 전에 이경삼李慶三씨와 이정수李正守씨의 합자合資로 이루어졌으며 한 10년쯤 있다가 장마에 떠밀려 가고 말았다 한다. 이 물레방아의 내력은 이정수씨의 처남이 되는 이명호옹李明浩翁(82세)이 알려 주었다. 옹도 한동안 이 물레방아를 관리한 적이 있었다는 것. 옹의 말에 의하면 그 무렵 고덕명高德明이라는 소리를 잘하는 멋장이가 있었는데, 전부터 전해 온 가락에다가 그 가사를 지어 불러서 퍼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작사자作詞者가 있을 때는 그것이 민요라 할 수 없다. 작사作詞나 작곡이 안개에 가려지는 것만이 민요이고 보면 고덕명이라는 사람이 문제가 되겠는데, 이 옹은 노래를 잘 모르는데다가 기억이 흐려 자꾸 다지고 물으니 확답적確答的인 결론을 피하는 것이다. 이 옹은 정선아리랑에 얽힌 얘기에는 별로 관심이 없어 보였고, “고덕명이 같은 소리는 이젠 없지”에만 힘을 주어 말했다.
어쩌면 「정선아리랑」을 잘 부른 사실을 그 작사자로 착각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어졌다. 그리고는 자꾸 한다는 말이 고덕명에 대한 칭찬이고, 또 고덕명의 외질外姪이 되는 김천유金千有 란 소리꾼을 잠깐 입에 올렸다. 둘이가 이 근방을 판쳤다는 것이다.
아우라지 지장구 아저씨
배 좀 건네 주게
싸리골 동백이 다 떨어지네.
떨어진 동백은 낙엽에나 쌓였지
잠시 잠깐 님 그리워
나는 못살겠네.
여기에도 얘기는 서렸다.
북면北面에 두 청춘남녀가 있었다. 여자는 여량리餘糧里, 남자는 유천리柳川里, 물을 건너 보고 살았다. 어느 해 가을 둘이는 싸리골에 동백을 따러 가기로 했는데 밤새 비가와서 나룻배가 통하지 못하게 되었다. 아침에 물가에 나와 서로의 애절한 정情을 누를 길 없어 이 노래를 주고받았다는 것이다. 전절前節을 여자, 후절을 남자가 불렀다 한다. 지금은 이 노래가 남녀창男女唱으로 나누어 있지는 않은데, 가사의 구성상 그런 얘기가 전하는 것뿐이다.
여기 ‘아우라지’는 ‘다만’이나 ‘오직’의 뜻을 가진 ‘애오라지’가 아니다. 이곳의 지명地名으로서 강물이 합치는 곳이란 뜻이다. 강물은 합치는 곳을 보이는데 사람은 합쳐지지 않음을 절감한 데서 이 말이 집중적인 중량重量을 가지게 된 것일까. 지장구는 지금도 살아있다는 나룻배의 뱃사공 이름.
「정선아리랑」의 가락을 한두 마디로 요약해서 말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렵다. 굳이 비유한다면 정한情恨의 밑바닥이 비치는 가락이라 할까. 그것은 또 물레의 실처럼 가늘게 빼어서 나오는 것이었다. 굽이굽이 저 간장肝臟의 제일 밑바닥에서 말이다.
< 다음 호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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