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두 해는 참으로 혹독한 시련의 날들이었습니다. 그 시간들이 이젠 지난 이야기가 될 수 있게 해 준 것이 수필과의 만남이었습니다. 힘이 들 때는 그냥 종이에다 아픔을 썼다가 버렸습니다. 그리고 또 썼습니다. 쓰고 싶다는 생각을 버리지 못하는 물건처럼 늘 마음 한구석에 자리 잡고 있었나 봅니다. “책은 읽는 것이 아니라 만나는 것이다.”라는 말처럼 수필과의 인연도 운명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문門 - 정창호
막내의 취업시험이 일주일 앞으로 다가왔다. 멀쩡한 직장 버리고 공무원시험 준비한다고 백수생활 두 해를 넘기더니 마음을 바꿨나 보다. 아내가 기도하러 가잔다. 겉으로는 아닌 척해도 아내는 어쩔 수 없는 이 시대의 엄마다.
절 마당에 문門들이 해바라기를 하고 있다. 보살님들이 물뿌리개로 물을 뿌리고 불려서 때 묻은 창호지를 벗겨 내고 알몸으로 변신한 창살을 걸레로 닦아내어 담장에 기대어 세운다. 잘 마른 문살에 풀을 듬뿍 바른다. 가로 세로로 붓질하는 보살님들의 손길이 물 찬 제비같이 날렵하다. 풀칠을 마친 문을 작업대 위에 가지런히 올려놓고 양쪽에서 두 사람이 마주 서서 창호지를 조심조심 맞추고 고운 빗자루로 쓱쓱 문지른다. 문보다는 반 뼘씩은 넉넉하게 여유를 두고 바른다. 마당에서 해바라기 하는 문들은 요사채의 문인가 보다. 법당문은 나무 문틀에 유리 옷을 입었다. 청아한 가을 하늘로 풍경 소리 높아져 가고, 바람에 등 밀린 낙엽의 작별 인사가 애잔하다.
법당으로 들어가 부처님 전에 두 손 모아 경건한 마음으로 정성을 다해 절을 한다. 부처님 앞에 가부좌 틀고 앉아 호흡을 가다듬는다. 문득 오늘 내가 여닫았던 문이 몇 개였던가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친다. 안방 문은 나무로 만든 문이다. 습관적으로 냉장고 문을 열고 물을 마셔야 일과가 시작된다. 출근 전 잡다한 일상은 집안으로 옮겨온 화장실의 문을 열고 해결한다. 아침밥을 먹기 위해선 냉장고 문을 서너 번은 여닫는다. 현관문과 승강기 문은 쇠문이고, 아파트 출입구는 열려라 참깨를 외치지 않아도 저절로 열리는 유리문이다. 자동차 운전석 문을 열고 출근한다. 사무실 마당의 철제 대문은 항상 열려 있다. 현관문은 이중문이다. 비밀번호를 입력해야 하는 사무실 문도 쇠로 만들었다. 건축법상 일정 면적이 넘어서는 건물의 문은 방화防火를 위해서 금속으로 된 쇠문으로 만들어야 한단다. 전등을 켜고 창문을 연다.
문이란 방이나 집의 안팎을 구별 짓는 구조물이다. 사람들이 출입하기 위해서, 햇볕을 받아들이기 위해서, 밖을 내다보기 위해서 등등 여러 가지 이유와 필요에 따라 만들어졌다. 사람들은 언제부터 문을 만들었을까? 원시시대의 사람들은 아마도 맹수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동굴 입구를 막았으리라. 동굴을 벗어나 움집을 지었어도 문은 달았을 것이다. 씨족사회와 부족사회로 집단이 커지면서 내 집단을 외부로부터 지키기 위해서는 성을 쌓았고, 그 성에도 자신들의 출입뿐만 아니라 침입자의 방어를 위해 문을 달았을 것이다. 임금님이 사는 대궐에도, 고관대작들의 으리으리한 집도, 쓰러져가는 삼간 누옥이나 다리 아래 거적을 두른 거지의 움막이나 난민촌의 천막에도 문은 필요한 것이다. 달린 문이 많을수록 고층이고 문의 숫자에 비례하여 가격도 건물 높이만큼 높아진다.
초등학교에 입학하였을 때 학교에는 낙동강 방어전투의 상흔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일 학년 때 교실은 흙벽돌로 지은 초가지붕에 거적문이었다. 교실 바닥에는 짚으로 만든 멍석자리가 놓여있다. 한 학년이 쉰 명이 채 되지 못하는 우리 동기들은 인원이 적다는 이유만으로 서러움도 많이 받았다. 삼 학년이 되어서야 겨우 나무로 지어진 교실로 들어갔지만, 교실에서 공부하게 되었다고 더 좋았던 기억은 없다. 수업이 끝나면 마룻바닥에 양초로 칠을 하고 마른걸레로 윤이 나도록 닦아야 했다. 마룻바닥 청소가 끝났다고 바로 집에 갈 수는 없다. 얼굴이 훤히 비칠 때까지 유리창을 닦는 다른 아이들이 독사라는 별명으로 불렸던 까칠하고 늙은 여선생님의 검사에 통과해야 갈 수 있다. 사 학년이 되어서는 학교에서 십여 분 떨어진 재실齋室에서 공부하였다. 재실 마루에 칠판과 선생님의 책상이 있었고, 미닫이문을 열면 하나가 되는 방이 우리들의 교실이 되었다. 방 한쪽은 여학생이 다른 쪽은 남학생이 앉았다. 마루와 방 사이에는 내리면 벽이 되고 들어서 열면 문이 되는 커다란 문이 있었다. 공부할 때면 문을 위로 열어서 천장에 달린 커다란 낚싯바늘 모양의 걸쇠에 문고리를 걸었다. 선생님은 옛날 말을 잘 듣지 않는 사람은 그 걸쇠에 코를 꿰었다면서 조심하라고 했다. 재실을 떠날 때까지 그 걸쇠는 우리에겐 공포의 대상이었다.
해마다 가을걷이가 끝나면 어머니는 햇살 좋은 날에 문을 목욕시키고 새 옷을 갈아입혔다. 문 가운데는 아이들 손바닥 크기만 한 유리도 달았다. 그 유리는 마당과 골목을 향한 우리의 눈이다. 문고리에는 제법 긴 줄을 달았다. 자고 나면 윗목에 놓아둔 걸레가 꽁꽁 얼어붙는 동장군이 기성을 부리는 겨우내 그 줄이 참으로 긴요하게 쓰였다. 천방지축 뛰어다니는 개구쟁이들이 방문이라도 열어두고 나가면 ‘누구 꼬리가 저렇게 기냐?’ 하는 어른의 불호령이 떨어지곤 했다. 그때 문고리에 달린 줄은 착한 심부름꾼이다.
창호지를 바르는 일이 끝이 났나 보다. 새 단장을 마친 절집 문들이 담장에 기대어 오수를 즐기고 있다. 금방 목욕을 마친 모습이 훤하다. 나는 마음의 문을 얼마나 열어 보았을까. 욕심과 아집과 편견으로 얼룩지고 번뇌로 가득 쌓인 마음의 문을 열고 얼룩과 먼지를 지우려고 얼마나 노력했는지 곰곰이 생각해 본다. 엣 선인들이 이르기를 ‘나이가 들어 갈수록 입은 닫고 주머니는 열라.’고 했는데 비록 눈에 보이는 문은 없지만, 주머니부터 조금씩 열어야겠다고 마음을 다져본다.
문이 백 개를 넘는 집에 사는 사람이나 문 없는 역사에서 노숙하는 사람이나 하루 세끼 밥을 먹고 산다. 누구에게나 하루에 주어진 시간은 시곗바늘이 두 바퀴 도는 것이다. 대문 없이 살아도 불편하지 않았고 때로는 그것이 인정이었던 시절이 이었다. 대문이 없는 것을 자랑으로 알았던 우리네 인정이 어쩌다 밭가에도 울타리를 치고 잠금장치까지 채워야 하는 시절이 되었을까. 문이 있다는 것은 안이 있다는 것이다. 그 문은 드나들기 위해서거나 환기를 위해서 일삼아 문을 만들었는데 사람들은 왜 문을 자꾸 닫기만 할까. 갈수록 좁아져만 간다는 취업문이 훤하게 열려서 막내아이 뭐 하느냐는 말에 주눅 들지 않기를 발원하며 부처님 전에 빌어본다. 풍경소리 그윽한 절 마당에 이름 모를 산새 소리가 곱다. 저 새들도 문이 달린 집에서 살고 있을까?
정창호 --------------------------------------------
한국방송통신대학교 법학과 졸업(법학사). 경북대학교 행정대학원 졸업(행정학 석사). 대구수필문예대학 수료. 경북 칠곡군청 교육문화회관장, 칠곡군의회 전문위원, 칠곡군청 총무과장 등 역임. (현) 칠곡군청 세무과장.
신인상 당선소감
한쪽 양말에 구멍이 났습니다. 무좀에 걸린 발톱의 몽니 때문입니다. 구멍 난 것을 탓하며 짜증스럽게 쓰레기통에 던지려다 그만둡니다. 나를 위해 자신을 희생한 모습이라는 생각으로 곱게 말아놓습니다.
지난 두 해는 참으로 혹독한 시련의 날들이었습니다. 그 시간들이 이젠 지난 이야기가 될 수 있게 해 준 것이 수필과의 만남이었습니다. 힘이 들 때는 그냥 종이에다 아픔을 썼다가 버렸습니다. 그리고 또 썼습니다. 쓰고 싶다는 생각을 버리지 못하는 물건처럼 늘 마음 한구석에 자리 잡고 있었나 봅니다. “책은 읽는 것이 아니라 만나는 것이다.”라는 말처럼 수필과의 인연도 운명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대구수필문예대학의 문을 열고 들어선 것도 필연이었습니다. 고난은 하나의 경험이고 경험은 고난을 이겨내는 또 다른 지혜라는 말이 있습니다. 힘들었던 시간에 마주하게 된 수필은 고난을 경험으로 여기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구멍 난 양말에 과거의 아픔을 모두 싸서 함께 버리겠습니다. ‘자신의 가슴을 타인의 노래로 채우지 마라.’는 현자의 충고처럼 내 가슴을 내 노래로 채워나가려 합니다. 가르침을 주셨던 모든 분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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