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는 빛을 볼 수 있다는 꿈과 희망이 내 가슴속에도 면면히 흐르고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새로운 시작의 출발선에 두려운 마음으로 섭니다. 파란 하늘의 고요함에서 울렁대고 출렁거리는 기운 넘치는 물결을 떠올리고, 새롭게 변화하는 것을 좋아했던 어린 시절의 꿈을 다시 한 번 꾸어봅니다. 넘어지고 뒹굴면서 한걸음 한걸음 정진할 것입니다. 부족한 글을 뽑아주신 심사위원님들께 감사드립니다."
북산 소금재 - 배중한
나의 고향 마을 앞에는 촘촘한 잔디로 다져진 제방 둑이 있다. 그곳을 가로지르면 소금재가 솟아있는 게 보인다. 마을에서 보면 남쪽으로 뻗어 있지만, 올라서서 보면 아담한 마을 전경을 따라 탁 트인 북쪽의 경치가 더 좋아 북산이라고도 부른다. 여기서 흘러내려 마을을 휘돌아 들판으로 쭉 뻗은 개천이 북천이다. 물이 맑기로 소문이 나 개천 바닥이 큰 돌 사이로 자갈과 모래가 적당히 섞여 있어 물장구치고 놀기가 좋아서 늘상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북적거렸다.
어릴 때 상여가 나갈 때면 앞소리꾼이 북망산천을 외치던 모습을 자주 보았다. 마을의 센 기운을 다스리고 액운을 쫓아 흉년을 멀리한다는 의미에서 북산 꼭대기에 소금을 묻었다고 전해진다. 초등학교 입학 무렵에 산나물을 캐러 가는 누나들을 따라서 딱 한번 가본 적이 있었다. 희미하게 떠오르는 기억 너머로 쌀가마니처럼 생긴 여러 개의 바위 사이로 참꽃과 풀꽃들이 숲 덤불 사이로 피어 있었다. 그곳을 지나 땀을 뻘뻘 흘리며 다다른 봉우리 한가운데에는 검게 탄 나뭇가지들이 돌 무리 위에 흩어져 있었다.
정월 대보름에 달집 태우기 행사가 시작되면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두가 마을 앞에 모였다. 청년들은 달집을 만들고 아이들은 쥐불놀이할 횃불을 만들었다. 어른들은 풍물놀이를 위한 북이며 장구며 고깔모자와 상모를 손질하기 바빴다. 분위기가 무르익으면 그날의 소금서방으로 선발된 사람이 토신제土神祭 의식을 치른다. 하얀 보자기에 빨간 끈으로 곱게 싼 소금단지를 안고 북천을 건너 북산을 향하여 한발 한발 내닿기 시작하는 것이다. 도중에 뒤를 돌아보지 말아야 하고 휴식을 취하지 말아야 한다. 공력을 들여서 곧바로 1시간 가까이 봉우리까지 가야 하기 때문에 그 역할은 주로 마을 청년들 중에서 번갈아 맡는 것이 상례화 되었다.
소금재가 나와 깊은 인연이 있다는 것을 아버지로부터 들은 것은 스무 살이 넘은 무렵이다. 대학 졸업을 얼마 앞두고 집에서 며칠을 쉴 때인데 평소와 달리 사랑채에서 아버지 옆에 나란히 눕게 되었다. 이런 저런 이야기 끝에 “이 근방 근동에서 최고의 명산이고 최대의 영험 있는 산이 소금재인데, 너는 그 영산靈山의 정기精氣를 받고 태어났음을 잊지 말고 포부를 당당히 펼치도록 해라.”라고 하셨다. “그러지요.” 하고 대답은 했지만 그 연유를 물어 보지는 못했다.
군 장교로 임관하여 군 생활을 시작한 지 오래지 않아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슬퍼할 겨를도 없이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한 가문의 종손宗孫으로서의 책임감이 양 어깨를 짓눌러 왔다. 홀로 계신 어머니를 생각해서 바쁜 군 생활 중에도 종종 집에 들러 미처 정리하지 못한 일들을 도와 드리곤 하였는데 한번은 어머니가 소금재 이야기를 꺼내셨다.
종가宗家에 시집와서 처음 먹어본 꽁보리밥이며 새벽까지 이어지는 다듬이질을 이야기했다. 그런데 다른 것은 다 참고 견디겠는데 스무 해가 다되어 가도록 아들 없는 설움과 아픔은 참고 견디기 힘들었다고 했다. 그러던 차에, 삼 년마다 돌아오는 마을 동 제사를 자청하여 모시게 되었는데 그 정성이 보통이 아니었다고 한다. 일 년 내내 궂은일을 보지 말아야 하고, 험한 일도 하지 말고, 몸과 마음을 단정히 해야 된다는 것이다. 백일을 남겨두고는 삼일에 한 번씩 어머니는 집 안에서 가마솥에 물을 데워 몸을 깨끗이 하고, 아버지는 북천 개울가 바위 밑에서 얼음을 깨고 목욕하기를 거르지 않았다고 한다.
섣달 그믐날 밤, 마을 어귀에 있는 동제나무 아래서 동제를 모셨다고 한다. 제사 짐 나르고 동제를 시작할 때만 해도 온 동네의 개가 다 짖어대곤 했는데 제사 시작부터 죽은 듯이 조용해지더라는 것이다. 제사가 끝날 때까지 큰 산짐승 한 마리가 나타나서 주위를 맴돌다가 홀연히 사라졌다고 한다. 이어서 정월 대보름날, 소금단지를 안고 한 걸음 한 걸음 소금재에 오른 사람은 젊은 청년이 아니라 머리가 희끗한 마흔이 넘은 아버지였다. 달이 뜨기를 기다려 가로 세로 한 자 남짓한 대리석 곽 속에 소금단지를 묻고 덮개 돌을 얹고 그 위에 달불을 놓아 훤하게 불을 밝혔다는 것이다.
그때를 기다려 마을 앞에선 풍악이 울려 퍼지고 달집태우기가 시작 되었다. 귀밝이술로 농주를 한잔씩 나누어 마시고 고소한 참기름 냄새 배어나는 산채를 한 가닥 입에 넣고는 서로 흥에 겨워 박수와 환호성을 질러댔다. 밖을 에워싼 볏짚이 먼저 타고 속에 든 소나무 가지가 ‘타닥’ ‘타다닥’ 소리를 내며 힘차게 타오르면 아이들과 청년들은 쥐불놀이할 횃불에 불을 붙여 윗마을 아랫마을 편을 갈라 넓은 들판으로 괴성을 지르면서 달려 나갔다.
그해 동짓달 초순에 내가 태어났다고 한다. 스무 해 동안 쌓였던 온갖 고초와 서러움들이 일순간 녹아내려 두 분이 감격해서 몇 날 동안이나 우셨다는 것이다. 삼 년이 몇 번 지나가고 차츰 소문이 이웃 동네까지 퍼져나갔다. 소금단지의 주인이 되고자 하는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나타났고 내가 그 이야기를 들었을 즈음에는 이미 까다로운 심사와 상당한 찬조금이 필요했다고 한다.
감동과 감격이 있는 성취감은 여기저기 자랑하고 싶고 떠들고 싶은 것이 보통사람의 마음이다. 하물며 스무 해가 넘도록 말을 삼가고 조심조심 마음을 숨기고 다닌 뜻은 아마도 사특함이 끼어들 틈을 주지 않으려는 지고至高의 정성이었으리라. 부분적인 일에 얽매이지 않고 여유롭게 흘러가는 자연스러움, 그리고 오늘 단 한 번의 기회에 짤막하게 훈계의 말씀으로 끝을 맺은 것이다.
자식이 덕을 크게 쌓으면 부모의 죗값도 감해 준다는 말이 있다. 그런데 나는 부모의 공덕으로 지금까지 양지에만 있어 왔으니 참으로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때부터 나는 더욱 더 바르게 살고자 노력했고 자식도 바르게 가르쳐 조금이나마 부모님의 은공에 보답하고자 했다.
더위 지나고 단풍 곱게 물들고 찬바람 불기 시작하면 잊고 지냈던 고향 마을에 한번 다녀와야겠다. 스무 살이 훌쩍 넘은 두 아들과 함께 북천을 건너 가물가물한 기억을 더듬어 가며 소금재에 올라 보아야겠다. 그곳에서 잊혀져가는 할아버지 할머니의 이야기와 소금재의 이야기를 들려주어야겠다.
배중한 -----------------------------------
영남대학교 약대 졸업. 동 대학원 경제학과 졸업 경제학박사. 대구통합병원 약제과장(육군대위). 대구시 약사회 정책위원장. 한국 마약퇴치운동본부 교수. 영남대 사회교육원 수필창작과정 수료. 대구보건대학 겸임교수. 영남제일약국 대표.
신인상 당선소감
천 년 동안 땅속에 묻혀있던 강낭콩이 새싹을 틔웠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길고도 긴 세월, 참고 기다리며 버티어 낸 힘은 어디에서 나왔는지를 생각해봅니다. 참으로 경이로운 생명의 씨앗이 스스로 그러한 원리에 따라 우리와 함께 숨을 쉬고 있었음을 느끼면서 시공을 초월한 도도한 흐름에 고개를 숙입니다.
언젠가는 빛을 볼 수 있다는 꿈과 희망이 내 가슴속에도 면면히 흐르고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새로운 시작의 출발선에 두려운 마음으로 섭니다. 파란 하늘의 고요함에서 울렁대고 출렁거리는 기운 넘치는 물결을 떠올리고, 새롭게 변화하는 것을 좋아했던 어린 시절의 꿈을 다시 한 번 꾸어봅니다. 넘어지고 뒹굴면서 한걸음 한걸음 정진할 것입니다. 부족한 글을 뽑아주신 심사위원님들께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문우 한분 한분께 따뜻한 고마움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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