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 따라 변하는 산과 주위의 정취에 마음이 바뀌고 발걸음도 달라진다. 봄이면 수줍은 처녀인 양 바위틈에 부끄러운 듯 고개 내민 진달래꽃이 나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게 한다. 하지만 새롭게 돋아나는 자기 새싹을 못 보고 지는 꽃이기에 애처로운 마음이 들기도 한다. 신록은 삶에 의욕을 준다. 세상은 엄동설한 긴 겨울을 참고 견뎌낸 신록의 환희에 찬 장이 된다. 꽃의 향기보다 신록의 싱그러운 풋내가 좋다."
둘레길을 걸으며 / 박창성
날씨가 웬만하면 아침 일찍 마을 뒷산에 오른다. 해발 150m 정도 되는 작은 산이다. 공식 명칭은 없으나 검단산이라 부른다. 산중에 신라 시대 창건한 고찰 검단사가 있어서인가 보다. 산 입구가 세 곳 있지만, 집 가까운 데를 택한다. 어느 입구로 가나 조금만 걸으면 산 정상으로 올라가는 능선길과 산 한 바퀴를 도는 둘레길인 ‘살래길’을 만난다. 나는 살래길이 생기기 전에는 늘 능선길로 정상에 올랐다. 요즘에는 가끔 살래길을 걷기도 한다.
‘살래길’은 2년 전 파주시에서 능선길과 연계하여 조성한 길이다. 제주도 ‘올래길’이 전국에 알려진 이후 모든 지자체가 경쟁하듯 앞다투어 산책길이나 트래킹 코스를 개발할 무렵이었다. 이 길은 산림 훼손을 피해 본래 있던 오솔길을 잇고 넓힌 길이라 꼬불꼬불한 길이 많다. 명명된 살래길에는 엉덩이를 살래살래 흔들며 즐겁게 걷는 길이라는 의미가 있다고 한다. 글쎄, 엉덩이를 살래살래 흔들며 걸으면 즐거워지는지, 즐겁게 걸으면 엉덩이가 살래살래 흔들어지는지 몰라도 재미있는 이름이다.
걷다 보면 오두산에 자리한 통일전망대를 마주 보며 2002년 월드컵 4강의 산실인 축구 국가대표 선수 트레이닝센터 뒷길을 지나 검단사 입구로 올라가게 된다. 살래길 주변에는 전망이 좋은 자리에 벤치가 있는 쉼터가 여러 군데 있다. 그 중 세 곳의 벤치 앞에는 눈높이 맞게 전시된 시詩가 한 편씩 있다. 이 시는 계절마다 주기적으로 바뀐다. 나는 가끔 시가 있는 곳을 둘러보다가 마음에 닿는 시가 있는 벤치에 앉는다. 한동안은 김재진 시인의 〈은어〉가 있는 벤치를 여러 번 찾았다.
썩어 가는 모과에서 향기가 납니다.
자식들 다 키우고 홀로 된
어머니 품에서도 향기가 납니다.
사랑도 어디쯤 지나간 사랑에선
향기가 납니다.
……
너무 가까이 있어 알지 못한 향기도
저만치 떨어지면 느껴집니다.
멀리 갈수록 잘 보이는 산처럼
헤어져 있는 동안 그대 모습이
은은한 향기처럼 그립습니다.
사랑과 그리움이 담긴 시구에 가슴이 뭉클해진다. 의외로 이곳을 찾는 이들이 많다. 시가 좋아서란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가까운 이웃이 된다. 누구에게나 지나간 사랑의 향기가 그리운가 보다.
살래길과 나뉘는 능선길로 정상에 오른다. 사방이 눈앞에 시원하게 펼쳐진다. 시야를 가리는 산이 없다. 길게 뻗은 자유로를 자동차가 꼬리를 물고 거침없이 질주한다. 멀리 북쪽에는 북한의 민둥산들이, 날씨가 쾌청하면 송악산도 보인다. 남으로는 넓은 벌판 뒤로 북한산과 도봉산이 보인다. 한강이 김포반도를 돌아 북에서 내려오는 임진강과 합수되어 서해로 흐르는 서쪽 끝에 강화도 마니산이 보인다. 정상에는 황색 ‘T’자 표식이 있다. 헬리콥터 착륙장은 ‘H’자인데 무슨 표식인지 궁금하였다. 인터넷을 검색하여 항공기 북방비행한계선 표식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표식을 설명한 푯말이 있으면 좋을 것 같다. 휴전선이 코앞에 있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된다.
계절 따라 변하는 산과 주위의 정취에 마음이 바뀌고 발걸음도 달라진다. 봄이면 수줍은 처녀인 양 바위틈에 부끄러운 듯 고개 내민 진달래꽃이 나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게 한다. 하지만 새롭게 돋아나는 자기 새싹을 못 보고 지는 꽃이기에 애처로운 마음이 들기도 한다. 신록은 삶에 의욕을 준다. 세상은 엄동설한 긴 겨울을 참고 견뎌낸 신록의 환희에 찬 장이 된다. 꽃의 향기보다 신록의 싱그러운 풋내가 좋다.
신록이 의욕을 준다면 녹음은 활력을 준다. 간간이 아침 햇살 비취는 녹음 사이를 걷는 발걸음에는 힘이 솟는다. 상쾌함이 있다. 오던 길을 되돌아 걷게 하는 녹음 덮인 길이다.
벼 익어 들판이 누렇게 변하면 기러기가 줄지어 난다. 풍성한 들판은 마음을 넉넉하게 한다. 석양에 북으로 나는 기러기 울음소리가 서글프게 들린다. 낙엽을 밟으며 걷는 마음엔 감사와 회한이 교차된다. 바람에 날리는 낙엽을 벗삼아 걷는다.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다.
눈길은 ‘뽀드득’ 소리와 함께 시작된다. 몇 안 되는 발자국을 따라 걷다가 발자국 없는 갈래길을 만나면 망설이게 된다. 늘 다닌 길이라도 앞선 발걸음이 없으면 조심스럽다. 갈 길이 걱정도 되려니와 내 발자국이 뒤에 오는 이들의 길잡이가 된다는 서산대사의 선시禪詩가 생각나서다. 눈 소복이 쌓인 소나무들과 앙상한 가지 위에 핀 눈꽃들 앙상블이 발길을 붙잡는다. 눈 덮인 언덕의 흠 없는 부드러운 곡선을 보면 엉뚱한 생각이 난다. 마음 설레게 하는 눈길이다.
지금까지 살아온 집 근처에는 산이 있었다. 서울에서 40여 년을 사는 동안 네다섯 번 이사를 한 것 같다. 집을 옮길 때마다 산의 유무가 그렇게 중요한 요건은 아니었으나 산이 있는 동네에서 많이 살았다. 그러다 보니 규칙적인 산행은 않더라도 습관적으로 산을 자주 찾게 되었다. 이사를 하면 산을 둘러보는 일이 먼저였다. 아내와 즐겨 걷던 능선길도 자식들을 모두 출가시키고 이곳으로 온 후에 이웃들보다 먼저 친해진 길이다. 노래하고 이야기하던 쉼터가 있다. 아내는 꽃이 있는 봄길 걷기를 좋아했다. 나는 눈길을 좋아한다. 그래서인지 생각해보면 눈길은 늘 내가 앞장을 섰지만, 봄에는 아내가 앞서 걷는 때가 많았던 것 같다. 몸이 불편한 아내를 부축하고 걷기도 했다. 우리 부부와 10년 넘게 애환을 함께한 길이다.
‘살래길’은 아내가 걸어보지 못한 길이다.
박창성 --------------------------------------
박창성님은 수필가 경기도 개풍 출생, 연세대학교 졸업, 월간 《좋은수필》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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