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이 머리에 허옇게 내려앉은 아내가 입을 조금 벌리고 코를 골며 자는 모습도 눈물겹다. 사랑이 미치지 못하는 연민이 아려온다. 마음이 종잇장처럼 엷어진다. 이래저래 늙어가면서 눈물도 많아지고 연민도 많아진다."
어디 그것뿐이겠는가? / 장기오
‘울음 우는 아이는 우리를 슬프게 한다.’
안톤 시나크(Anton Schinack)의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의 첫 문장이다. 나는 젊었을 때 이 글을 무척 좋아했다. 아니 나뿐이 아니고 그 시절 모든 젊은이들이 다 좋아했던 글 중의 하나다. 그런데 나는 왜 울음 우는 아이가 우리를 슬프게 하는지, 그 많은 슬픔 중에서도 유독 아이의 울음이 문장의 첫머리에 올라올 만큼 슬픈 것인가에 대해 나는 동의하질 않았다.
그러나 많은 세월이 지난 지금 나는 비로소 그 말을 이해하게 되었다. 늙어서 눈물이 많아져서인지 혹은 마음이 약해져서인지 알 수는 없지만 우는 아이를 보고 있노라면 저절로 눈물이 난다. 맑고 투명한 아이의 두 눈에 수정 같은 눈물이 뚝뚝 떨어질 때면 ‘저건 진짜 슬픔이다. 저 슬픔에는 가식이 없다. 저거야말로 지극한 순수다.’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일생을 드라마 연출로 보냈다. 한편의 드라마에는 반드시라고 할 만큼 심금을 울리는 대목이 있기 마련이다. 그런 부분에서도 나는 속울음을 짚어내고 격조 있는 슬픔을 만들어내려고 노력했다. 그런데 이제는 조금만 슬픈 드라마만 봐도 눈물이 나온다.
우리 시대를 어렵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을 다룬 <동행同行>이라는 다큐 프로가 있다. 어머니가 가출하고 아버지가 세 아이를 키우며 힘들게 살아가는 한 남자의 이야기를 다룬 적이 있었다. 남자는 일용 노동자로 하루하루를 어렵게 벌어 먹고 산다. 어느 날 지방으로 일거리를 찾아나서면서 아이를 보육원에 맡겨야만 했다. 네 살배기 막내가 그 말을 듣는 순간 두 눈에 수정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무릎을 꿇고 아빠에게 손을 싹싹 비비며 애원을 한다.
“아빠, 잘못했어요! 다시는 안 그럴게요. 이제부터 아빠 말 잘 들을게요. 정말 잘 들을게요. 네?”
그런 아이들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아빠는 와락 세 자매를 끌어안았다. 통곡이었다. 몸 깊은 곳에서 터져나온 듯, 짐승 같은 울음을 뱉어냈다. 한덩어리가 되어 울었다. 앞 울음이 뒷 울음을 끌어냈다. 자기 설움이었으리라. 한참을 그렇게 울던 아이들 중 첫째가 먼저 울음을 그치고 그랬다.
“아빠, …울, 울지 마. …우, 우리가 잘못했어. 응, 아빠 울지 마. 내가 동생들 잘 돌보고 아빠 기다릴게. 응.”
그런 첫째를 물끄러미 지켜보던 아빠는 다시 벽에 머리를 박고 숨을 죽이고 흑흑거리며 깊이 울었다. 아이들도 그런 아빠의 등뒤에 매달려 하염없이 또 울었다. 나는 아빠의 눈물보다 아이들의 눈물이 더 서러워 보였다.
아! 그렇구나. 울음 우는 아이는 우리를 슬프게 하는구나. 처지를 생각하고 형편을 헤아려 울어지는 울음이 아니라 가슴 저 깊은 곳에 자리한 근원적인 서러움이 복받쳐 올라오는 본질적인 울음이구나. 생의 깊이를 실감했다. 한참을 그러던 아빠는 간신히 울음을 추스르고 우는 아이들의 눈물을 하나하나 닦아주면서 그랬다.
“너희들이 잘못한 건 없다. 아빠가 잘못해서 그렇다. …불, 불쌍한 것들.”
그러고는 다시 아이들을 끌어안고 천장을 올려다보며 소리없이 눈물만 흘렸다.
나는 그 프로를 보다가 화장실로 뛰어가 수도꼭지를 틀어놓고 엉엉 울었다. 아빠와 떨어지지 않으려고, 무엇을 잘못했는지도 모르면서도 무조건 울면서 잘못했다고 비는 그 아이들의 눈물은 순수 그 자체다. 결국 아빠와 떨어지기 싫어 발버둥치는 아이들을 남겨두고 남자는 떠났다. 일반적으로 남자는 늙으면 여성호르몬이 많아지면서 눈물이 많아지고, 반대로 여자는 남성호르몬이 많아지면서 대담해지고 남성화된다고 한다. 생의 깊이를 좀 더 알은 건지, 아니면 생리학적으로 그럴 수밖에 없는 건지 나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아이의 눈물을 보면 견딜 수가 없다.
어디 그것뿐이겠는가?
세월이 머리에 허옇게 내려앉은 아내가 입을 조금 벌리고 코를 골며 자는 모습도 눈물겹다. 사랑이 미치지 못하는 연민이 아려온다. 마음이 종잇장처럼 엷어진다.
이래저래 늙어가면서 눈물도 많아지고 연민도 많아진다.
장기오 -------------------------------------------
장기오님은 수필가. 《현대수필》로 등단, KBS대(大)PD, 드라마 제작국장 역임, 저서 《사라지는 것은 시간이 아니다 우리다》, 《나 또한 그대이고 싶다》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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