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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과비평 2013년 9월호, 지상에서 길찾기] 헌 의자와 새 벤치 - 하병주

신아미디어 2013. 11. 23. 07:48

"세상은 나날이 변하여 사람은 세대교체가 되고 헌 물건은 새것에 밀려 버려지기 마련이다. 그렇더라도 새 벤치를 설치하려면 헌 의자를 수거해서 가져갈 일이다. 흙밭에 뒹굴게 방치해 놓으니 보기가 꼴사납다. 마치 늙고 병들어 세상에서 버림받고 거리에 나앉은 노숙자를 보는 것 같아 마음이 더욱 안 좋다. 하지만 나 역시 새 벤치에 앉아 언덕 밑에 처박혀 발을 하늘로 향하고 있는 헌 의자를 멀거니 내려다보기만 했다."

 

 

 

 

 

 

  헌 의자와 새 벤치     -  하병주


   우리 동네 뒷산 오르는 길 중간쯤에 의자 하나가 놓여 있었다. 누가 그 무거운 걸 거기까지 들어다 놓았는지 알 수 없다. 다 낡아빠져 색이 바래고 여기저기 흠집도 있어 아주 볼품없는 플라스틱 의자다. 하지만 등산객들에게 그것은 아주 요긴한 물건이다. 그 지점은 숨을 헐떡이며 가파른 길을 올라간 사람들이 한숨 돌리는 곳이다. 처음에는 “여기에 웬 의자가 있네.” 하면서 앉아 보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그것은 으레 거기 있어야 할 걸로 생각되었다. 산을 오를 때는 언제나 거기에 앉아 쉴 생각을 하면서 부지런히 올라간다. 어쩌다가 다른 사람이 먼저 와서 앉아 있으면 아쉬운 마음으로 맨땅에 앉기도 한다. 나는 산을 오를 때 뿐 아니라 내려올 때도 그 의자에 앉아 많은 생각을 하면서 시간을 보내곤 했다. 말하자면 나에게는 ‘사색의 의자’였다. 다 낡은 플라스틱 의자지만 거기에 앉아 있으면 몸과 마음이 다 함께 편안하고 한가롭다. 봄․여름이면 향기롭고 풋풋한 숲 속 향기에 취해서, 가을이면 시나브로 떨어지는 고운 단풍잎을 보느라 일어설 생각을 잊기도 했다. 함박눈이 펄펄 내리는 겨울날 그 사색의 의자에서 눈사람이 된 적도 있다. 그리고 의자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해보았다. 도대체 이 의자가 어쩌다가 이 산 중턱에까지 오게 되었을까? 어쩌면 내가 여기저기 떠돌아 다녔듯이 이 의자도 그랬는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덧 그 하찮은 의자에 대해 별난 관심을 갖게 된 것이다.

 

   나는 직장생활을 남쪽 바닷가에서 처음 시작했다. 그리고 세월이 흐르는 동안 여러 곳을 옮겨 다니며 살다 보니 지금은 중부 이북 지방 산자락에서 살고 있다. 헌 의자도 그랬을 것만 같다. 공장에서 새로 막 나왔을 때는 깨끗한 비닐에 곱게 포장되어 어느 집 책상 앞에 당당하게 자리했겠지. 그 후 이삿짐 차에 실려 옮겨 다니다가 낡아서 볼품없게 되자 쓰레기장에 버린 것을 누군가 이 산 중턱에까지 가져다 놓았을 것이다. 초라한 몰골로 눈비도 피하지 못하고 덩그러니 앉아 있는 모습이 안쓰러워 보였다. 하지만 다 낡아서 버려진 의자에게 이 자리가 결코 나쁜 것만은 아니다. 방 안보다 훨씬 더 청량한 숲 속, 새소리 바람소리 싱그러운 곳에서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는다. 혹시 넘어져 있으면 누군가는 덜렁 일으켜 세워주고, 비에 젖고 흙이 묻어 있으면 손길 고운 아가씨가 휴지를 꺼내 닦아주고, 더러는 향내 나는 손수건으로 문질러주기도 한다. 벌써 분리수거되었을 폐품이 어쩌다가 자리를 잘 잡아 호사를 누리고 있는 것이다.
   헌 의자는 그렇게 한 자리에 2년을 넘게 앉아 있었다. 그러는 동안 그 모습은 더욱 낡아져서 몰골이 더한층 험하게 되었다. 그래도 많은 사람이 꾸준히 이용했다.

 

   오랜만에 산에 올랐다. 병원에 입원하는 바람에 거의 한 달여를 산에 가지 못했다. 그래선지 오르막길이 더욱 힘들었다. 어서 올라가 의자에 앉아 쉴 생각으로 숨차게 올라가 보니 이게 웬일인가! 의자가 없었다. 대신 그 자리에 반들반들 윤기가 나는 무늬목 벤치가 의젓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주변 땅도 평탄하게 골라서 손질해 놓았다. 시청에서 주민 복지사업의 일환으로 등산로 곳곳에 휴식처를 만들어 놓은 것이다. 새 벤치에 앉아 보았다. 당장은 헌 의자에 앉았을 때보다 낯설고 불편한 느낌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이고 미끈한 새 벤치가 좋았다.
   헌 의자는 언덕 밑에 굴러가 있었다. 흙밭에 처박혀 있는 모습이 흉물스러웠다. 전 같으면 바로 끌어올려 흙을 닦고 제 자리에 반듯하게 놓아줄 텐데 이제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는다. 세상에 나와 오랜 세월 여기저기 끌려 다니면서 자기 역할 다하느라고 시달리다가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뒹굴고 있는 것이다. 산뜻하고 고왔던 색깔은 우중충하게 변하고 얼굴은 상처투성이요 발에는 금이 갔다. 산에까지 와서 다리 아프고 피곤한 사람들 쉬어가도록 온몸을 내맡겼지만 새 벤치에 밀려 흙밭에 팽개쳐진 신세가 된 것이다. 의자에게 만약 생각이란 게 있다면 기가 막히고 억울하기 짝이 없을 것이다. 지나는 사람마다 찾아서 챙겨줄 때가 엊그제인데 이제는 누구 하나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세상은 나날이 변하여 사람은 세대교체가 되고 헌 물건은 새것에 밀려 버려지기 마련이다. 그렇더라도 새 벤치를 설치하려면 헌 의자를 수거해서 가져갈 일이다. 흙밭에 뒹굴게 방치해 놓으니 보기가 꼴사납다. 마치 늙고 병들어 세상에서 버림받고 거리에 나앉은 노숙자를 보는 것 같아 마음이 더욱 안 좋다. 하지만 나 역시 새 벤치에 앉아 언덕 밑에 처박혀 발을 하늘로 향하고 있는 헌 의자를 멀거니 내려다보기만 했다.

 

 

 

하병주  ---------------------------------------
   ≪수필과비평≫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