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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연구 2013년 여름호, 기획특집 문학과 문학치료] 문학치료 또는 잃어버린 말을 찾아서 - 변학수

신아미디어 2013. 11. 18. 08:08

"치료와 문학은 ‘잃어버린 언어를 찾아 자기 고유한 삶을 만들어간다.’는 점에서 공동의 프로젝트를 갖고 있다. 그러나 문학은 치료가 아니다. 그저 전체적으로 볼 때 치료의 길을 걸어가도록 용기를 준다. 그리고 치료 또한 문학이 아니다. 치료는 다만 삶의 환상이 보장되고, 지탱되고, 현실과 소통되도록 문학에 도움을 준다. 그러니까 둘 다 스스로의 삶을 위협하는 사람들에게 평형 상태를 유지하게 하도록 하자는 같은 목적을 가지고 있다. 두 가지 모두 사는 법을 배우고 나면 살아남는 것이 자신에게 큰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통찰을 하게 한다. 그래서 천일야화의 샤흐르자드는 살아남기 위해 이야기를 했고, 박경리는 고통을 이기기 위해 글을 썼다. 행동을 포함한 목소리를 찾고, 그림과 이미지를 포함한 글로 표현된 기억 속에서 우리는 잃어버린 언어를 찾을 수 있다. 언어를 찾은 다음, 우리는 다시 인생을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마치 첫 걸음을 떼어 걸음마를 시작하는 아이처럼, 잃어버린 말을 새로 시작하는 것이다. 이런 자유를 얻는 사람은 기억과 이미지의 운명에서 해방될 수 있다. 그러므로 문학치료는 글로 쓰인 문자가 아니라 소리와 그림으로 이루어진 총체적인 언어로서만 수행될 수 있다. 언어 상실이란 결국 총체적으로 잃는 것을 말하고 치유란 상실된 것을 총체적으로 회복하는 것을 말한다."

 

 

 

 

 

 

 

 

 문학치료 또는 잃어버린 말을 찾아서     -  변학수

 

 

   나는 여태껏 내 기억으로는 어머니에게 ‘엄마, 사랑해.’란 말을 못해봤다. 물론 어머니로부터 ‘아들, 사랑해!’ 그런 말도 못 들어봤다. 그러니까 내가 쉰세대니까 그런 말을 못 들어봤을 거란 그런 뜻이 아니다. 어떤 화행話行의 형식을 빌린다 하더라도(가령 대가 군에 입대한다고 했을 때 눈물을 보인다든가) 그런 말을 들어보지도 해보지도 못했다. 나는 사랑한다는 것이 무슨 뜻인가 안다. 그러나 내가 어머니(또는 엄마)에게 그런 말을 못 들어보고 못해봤으므로 나는 그게 진정으로 무슨 뜻인지 모른다. 비트겐슈타인이 『철학적 탐구』에서 ‘언어의 의미는 사용에 있다.’고 했는데 나는 그 말을 사용해보지 못했으므로,(즉 엄마에게 그 말을 사용하여보지 못했으므로) 나는 그 의미를 모를 뿐 아니라, 그 말에 관한 한 언어장애라고 할 수 있다. 내가 언어 장애이므로 나는 그 말을 언제나 그리워한다. 다리가 없는 사람이 달리기를 꿈꾸고, 볼 수 없었던 헬렌 켈러가 「사흘만 볼 수 있다면」이라는 글을 쓰고 보기를 소망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지금 나는 시의 독자들에게 나의 주제가 시작되었음을 알리고자 한다. 잃어버린 언어를 발견(또는 재발견)하는 것이 문학치료의 핵심이라고 강조한다. 다시 말해 말할 수 없었던 것, 말하지 못했던 것에 대한 언어를 재생하는 것이 문학치료다 이 말이다.

 

   이런 주장에 대해 우리가 좀 더 분명한 태도를 취할 수 있기 위해서 나는 언어에 대한 문제부터 먼저 파악해보고자 한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변학수 씨, 그냥 해봐! 엄마 사랑해.”라고, 그리고 내가 그 말을 따라 한다고 가정해보자. 그런다고 정말 내가 그 의미를 알고 나의 마음이 기뻐지거나 어머니가 기뻐할까? 잠시 내 개인적인 이야기를 좀 해보겠다. 경북 문경 시골에 사는 나의 숙모는 그게 가식인지 혹은 진실인지 모르지만, 내가 뵈러 가면 맨발로 달려오다시피 하면서 “아이고 우리 조카, 어서 오시게, 사랑해!”하면서 난리법석을 피우신다. 그것을 보는 우리 어머니, 질투 나서 죽을 것 같아 한다. 어릴 때 시집을 와서 외로울 때 나랑 같이 있을 수 있어서 많은 위로를 받았던 것이 나를 사랑하는 계기가 된 것이었단다. 그렇다면 언어란 도대체 무엇인가? 내 나이 이제 서른이 넘었다. 그런데 왜 나는 이 ‘사랑’이라는 말에 민감한가? 내가 아직 어린애처럼 유치한 건가? 그럴 수도 있다. 우리 잠시 언어가 무엇인지 살펴보자. 국어사전을 찾아보면 언어란 ‘사람 사이의 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수단’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그렇다면 언어는 독백을 할 때도 대화의 구조로 되어 있을 것이다. 다만 우리는 언어를 수행하기 위해 여러 감각의 경로를 거쳐야 한다. 우리가 언어로 다른 사람과 소통하는 동안 우리는 우리의 느낌과 사고, 의지를 표현하고 있다. 그러므로 언어는 단지 소리로서만 표현되는 것이 아니라 몸과 느낌, 사고와 의지로 표현되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언어를 중심으로 충동과 감정, 사고, 의지는 분리될 수 없다.

 

   언어가 만약 정보만 전달하고 감각과 감정, 의지를 전달하지 못하는 경우, 그것은 언어로서 실패한 경우가 된다. 말하자면 일종의 언어 상실이라고 할 수 있다. 만약 누가 나에게 어머니에게 한번 ‘사랑해’하고 말해보라 하면 나는 그저 ‘내사 마 그런 말 모한다.’ 아니면 ‘그래, 내 그거 한다.’ 아니면 ‘어머니, 사랑합니다.’라고 말하면서 쑥스런 느낌을 가지게 될 것이다. 내 주위에 그런 친구들 너무나 많다. 사실 언어는 소통의 기초로서, 우리는 이 언어를 통해 우리의 정체성과 인성, 그리고 소속감을 표현한다. 이런 소통, 교감을 성취하기 위해 우리는 말하기, 읽기, 쓰기, 듣기, 그리기, 몸짓 등을 활용한다. 우리는 소통을 하기 위해 머리부터 발끝까지에 있는 신체 부분, 공간, 감각기관을 사용한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가 말할 때 일어나는 일은 단순한 소리가 아니라 공명이 있는 총체적인 언어다. 우리 목소리의 떨림은 다른 신체적 동작에 동반되어 나타나거나 그 동작에 의해 지지를 받는다. 다른 사람의 목소리를 들을 때도 우리는 몸의 떨림을 경험한다. 그렇게 보면 우리의 몸 전체는 말할 때나 소통할 때 모두 함께 참여하는 것이다.

 

   정말 그럴까? 한번 우리가 같이 실험해볼 필요가 있다. 우리 다 같이 실험에 참여해보자. 독자 여러분, 가령 전혀 어떤 느낌도 가지지 않은 채 옆 사람에게 인사를 해보시길 바란다. ‘안녕하세요’ 그것은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특히 아는 사람이라면, 친한 사람이라면 더더욱 그것이 불가능하게 된다. 그렇게 하면 소리가 말해지거나 소리가 들렸을지 모르겠지만 자신의 진정한 뜻이나 감정이나 의미는 전달되지 못하거나 전달받지 못할 것이다. 이는 우리에게 어떤 말을 전달할 때 입과 성대만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한다. 우리는 표정과 제스처, 감각과 느낌, 그리고 생각을 포함한 온몸으로 상대방을 향하고 있는 것이다. 때로는 속으로.

 

   언제부터 갈대는 속으로
   조용히 울고 있었다.
   그런 어느 밤이었을 것이다.
   갈대는
   그의 온몸이 흔들리고 있는 것을 알았다.
   바람도 달빛도 아닌 것,
   갈대는 저를 흔드는 것이 제 조용한 울음인 것을
   까맣게 몰랐다.
   - 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
   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란 것을
   그는 몰랐다.

— 신경림 「갈대」

 

   우리가 말하고 있는 동안 우리의 몸 전체가 반향 공간으로 같이 울리는데 시는 이때 말의 리듬을 동반하게 된다. 그뿐만 아니라 언어는 자신의 마음에 그림, 즉 이미지/상象 또한 동반하고 있습니다. 자, 옆 사람에 대해 어떤 느낌을 가져보라. 그리고 말을 한번 해보자. ‘네가 조용히 울고 있는 것을 내가 몰랐어.’라고.

 
   우리가 이런 말을 듣거나 발설할 때 무엇을 어떻게 지각할까? 우리와 같은 사람들이 말하는 그 말소리는 외부적 지각 이상일 것이다. 우리가 목소리나 말해진 것들뿐만이 아니라 얼굴과 몸의 경련, 나아가 냄새까지도 동시에 파악하지 않는다면 ‘속으로 우는’ 사람의 말을 이해할 수 없게 된다. 그러므로 언어는 근본적으로 감정(감성)적인 것이다. 만약 우리의 표현이 근육의 경직됨으로 인해 약화된다면 어떻게 될까? 경직된 몸은 울릴 수가 없다. 경직된 몸으로 노래한 K-pop스타는 대부분 탈락되었다. 진정한 소통은 우리가 다른 사람을 진정으로 받아들일 때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의 호흡, 그의 표정, 그의 걷는 모습(파우스트가 달아난 후 탄식하는 그레첸의 말을 상기하라!), 나아가 그의 리듬과 목소리의 진동 수를 받아들일 때만이 진정으로 우리는 그를 만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몸은 우리 언어의 핵심적 구성요소라고 볼 수밖에 없다. 그러니까 문학치료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부분이 바로 경직됨과 불협화음의 제거 과정인데, 불협화음이란 바로 잃어버린 말을 판단, 즉 이성적인 관점에서 평가하거나 가치평가를 할 때 생기는 일이다.

 

   이런 내적 언어의 특성은 언어발생사를 간략히 살펴보면 더욱 분명해진다. 인류가 언어를 말하기 전 12만 년 동안 인류는 언어 없이 살았다고 한다. 1만 년 동안은 아프리카 사바나에서 수렵을 하면서 살았을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소통했을까? 강아지나 코끼리처럼 했을 것이다. 자, 우리 강아지처럼 옆 사람과 소통을 해보자. 한번 강아지 소리를 내보자. 그러면 옆 사람은 그 사람이 무엇을 말했는지 맞춰보자. 또 그 말이 무슨 함의를 하는지. (모두 잘들 하셨을 것이다.) 이번에는 코끼리처럼 말을 해본다. 소통이 되는가? 안 되는 독자는 왜 내가 엄마에게 ‘엄마, 사랑해!’라는 말을 못하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아직까지도 이런 원시적 흔적으로 살아간다. 어머니는 내가 태어나자마자 할머니가 돌보았다고 한다. ‘젖만 먹으면 데려가고…’ 우리 어머니가 하는 말이다. 그래서 어머니는 유모밖에 안 되었다고 한다. 독자들은 나의 경우에 어떻게 언어가 상실되었는지 그 과정을 추론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반대로 언어가 어떻게 습득되는지, 그리고 몸에 어떻게 새겨지는지도 알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그래서 지금도 살갑게 대하는 여성들에게 매우 약하다. 그러니까 언어는 매체 상으로는 몸동작, 소리에서 출발하여 차츰 개념과 소리의 조합인 말로 나아갔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개개의 소리는 차츰 말로, 문장으로 발전해나갔을 것이다. 문장으로 발전한다는 것은 인간이 더 이상 1차적인 뇌(뇌간), 즉 원초적인 뇌기능만을 사용하지 않고, 2차적인 뇌기능으로 옮겨갔다는 뜻이기도 하다.

 

   일차적 뇌의 발전은 파충류 뇌로서 반복을 주관하는 것이었다. 가장 원시적인 뇌가 파충류 뇌라고 하였는데, 이 뇌는 자기가 태어난 곳에서 도마뱀이 반복적으로 왔다 갔다 하는 것처럼 반복을 주관하는 뇌다. 1차적 뇌는 파충류 뇌만이 아니라 그 다음으로 확장된 뇌인 대뇌변연계(limbic system)를 만들었는데 이것이 감정을 주관한다. 그런데 인간을 인간답게 만든 것은 2차적 뇌 곧 신피질(neocortex)이 만들어졌을 때부터이다. 이 뇌는 뇌 중에서 가장 늦게 발달한 부분이다. 이것이 동물과는 다른 특성을 인간에게 부여했다. 이 뇌는 사고를 관장하는 뇌로서, 삶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작동하는 신피질, 즉 사고의 뇌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신피질 뇌가 감정이나 반복충동을 담당하는 1차적 뇌를 억압하게 되면 거기서 불균형이 일어나는데 이것을 정신분석가 프로이트는 억압 Verdrngung이라 하였다. 충동을 억제하고 감정을 억제당할 때 일어나는 현상은 곧 언어상실을 의미한다. 그런데 아동들에게서는 이런 뇌의 발달이 6세 이전에 한꺼번에 폭발적으로 일어나는데, 만약 어린 시절 다른 사람과의 감성적 소통, 육체적 스킨십을 통해 뇌의 다양한 부분이 골고루 발달되지 않으면 언어가 발전되지 않거나 발달을 중지하는데, 이것을 발달장애라 한다. 그러니 나는 평생 동안 발달장애와 언어장애를 앓고 있고 그것이 나의 삶을 바꾸어 놓았다고 말할 수 있다.

 

   말과 말의 예술인 시는 평생 우리의 삶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언어 상실을 유발하는 것은 나의 경우처럼 비단 돌봄을 받을 수 없을 때 생기는 것만은 아니다. 지나친 학습요구와 인터넷 중독도 언어 상실을 유발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이제 네 명 중 한 명꼴로 학습에서 언어장애가 발견된다고 한다. 지금 대학생들에게서 보이는 문해성의 부족은 아이들 때 얼마나 반복적인 생활을 통해 언어가 상실되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뇌 과학은 이 점에 대해 중요한 연구를 제공하고 있다. 뇌 과학자 슈피처는 어떤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TV나 인터넷은 장기적으로 사람을 뚱뚱하게, 바보스럽게 그리고 폭력적으로 만든다. 우리가 그것을 알고 있었더라면 무엇인가 다른 조치를 취했을 것이다.” 인터넷이 물론 정보의 교환에 유리한 수단임에는 틀림없으나 갓난아기 때부터 이미 우리의 아이들이 매체에 깊이 빠져들게 된다는 것은 경악할 만한 일이다. 그렇게 되는 순간 아이는 감정을 표현하고, 감정을 언어적으로 표현하는 능력을 잃어버리게 된다. 그런 감각이 마비되면 아이는 하나의 감각만 발달시키게 된다. 

 

   이런 일은 성인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일어나는데 그것이 꼭 병이나 사고를 통한 트라우마에 의해서만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동시에 일시적 충격이나 공포, 불행으로 인한 언어 상실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그것은 조금 더 오래된, 유년의 언어 상실에서 비롯된 것이다. 관계 속의 갈등, 관계의 위기, 이별, 이혼 또한 그에 못지않게 언어 상실을 가져오는데 그렇게 되면 우리는 더 이상 할 말이 없거나 침묵하게 된다. 독일의 인간학자 헤르더나 겔렌은 언어를 ‘다시 본 것에 대한 즐거움’이라 정의하고 있다. 다시 본 것에 대한 즐거움이 언어라면 언어 상실은 트라우마나 상처가 된다. 체념이나 마음의 상처는 집중력 저하나 언어능력 저하를 유발할 수 있다. 애도나 슬픔 또한 장기적으로 지속되면 우울증이 되어 우리에게서 말을 뺏어가 공격적인 언어, 자학적인 언어, 메마른 언어만 내뱉게 할 수 있다. TV나 라디오, 음악이나 인터넷 서핑 같은 쾌감도 중독이라는 경로를 통해 우리의 언어 상실을 가져올 수 있다. 자연적인 노화도 우리에게 언어 상실을 재촉한다. 미래의 불안으로 인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희망이나 의지 같은 언어를 빼앗기기도 한다. 매체를 보면 20억은 있어야 노후가 보장된다는데 그런 숫자를 생각하는 순간 우리는 우리의 말을 빼앗기게 된다. 그들의 의견이라면 나의 노후는 보장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문학치료는 희망이라는 언어를 상실하지 않게 우리를 힐링의 세계로 인도한다.

 
   문학적 언어는 언어 상실을 대체할 수 있는 좋은 수단이다. 일기, 르포, 에세이 같은 비교적 현실적인 언어를 포함해서 이미지의 언어인 문학은 언어를 회복할 수 있는 좋은 매체다. 이런 말들은 우리의 영혼을 쉽게 일깨우기 때문에 언어 상실에 대응할 수 있는 좋은 수단이자 그 자체가 바로 언어 창조를 통한 치료가 된다. 문학치료란 말 속에 들어있는 치료란 말의 원래 의미는 ‘보살핀다, 봉사한다, 동행한다.’란 뜻을 포함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문학치료는 인성의 발달, 의식의 형성, 연대의 체험, 재사회화를 인간의 네 가지 치유력, 즉 적응력, 창의력, 편심능력, 역행능력에 의존하여 성취할 수 있다. 이런 치유를 위해 무엇보다 우리는 목소리를 필두로 한 감정-작업을 제일로 꼽아야 한다. 목소리를 찾기 위해서 우리는 우선 어린 시절에 대한 회상이 선행되어야 한다. 다시 말하자면 잃어버린 언어를 찾기 위해 그 상황으로 퇴행해야 한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을까? 가령 우리는 『어린 왕자』의 이야기나 소설가들의 자전적 글, 시인들의 시에서 과거가 순간적인 이미지로 떠오른다. 이야기에서 또는 이미지를 가진 시어에서 감정이 발생될 때 그런 순간을 경험한다. 다음에 박완서의 이야기를 들어본다.

 

   남편과 만날 장소를 파바로티로 정해준 것은 딸 채정이었다. 채정이 졸업식 때도 그들 부부는 별거중이었다. 시골서 당일로 올라오는 남편과는 졸업식장 근처에 있는 초대 총장 동상 앞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그 대학에는 그 동상 말고도 동상이 너무 많았다. 남편은 누구 동상이라는 것은 확인해보지 않고 제일 먼저 눈에 띄는 동상 앞에 마냥 죽치고 앉아 있었으니 식구들하고 만나질 리가 없었다. 더군다나 그날은 채정이가 오랫동안 연애하던 남자친구네 부모하고 처음으로 상견례를 치르기로 한 날이기도 했다. 식이 다 끝난 후에 찾아 헤맨 끝에 가까스로 만나긴 했지만 그날 촌스럽고 변변치 못한 남편 때문에 속상하고 초조했던 일은 나중에 생각해도 새록새록 울화가 치밀었다. 사돈 될 집에 비해 내세울 거라곤 없는 집안이라는 자격지심 때문에 그날의 조바심은 더욱 피를 말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하객들이 반 이상 빠져나간 후에 겨우 만나진 남편은 차라리 안 만나니만 못했다. 그 추운 날 오버도 없이 세탁을 잘못해 모양이 망가진 누비 파카에다 색 바랜 껑뚱한 면바지를 입은 모습은 사돈을 의식하지 않는다고 해도 못 봐주게 추비했다. 채정이가 울상을 하고 엄마 귓전에다 ‘난 몰라. 아빤 우리들이 미워서 일부러 거지처럼 하고 왔나 봐.’라고 속삭일 정도였다. 평소에도 마음에 안 드는 건 뭐든지 거지에다 빗대는 건 채정이의 아주 나쁜 버릇이었지만 그때는 듣기 싫지도 않았다. 그쪽 식구들 앞만 아니라면 더 심한 말도 해주고 싶었다.

(박완서, 「너무도 쓸쓸한 당신」, 창비, 2004, 146~147쪽)

 

   이 이야기를 듣는 순간 우리는 우리의 기억을 재현하게 된다. 나는 이 이야기를 듣는 순간 할머니 성화에 못 이겨 아버지가 리어카에 배추와 무를 싣고 점촌읍내 학교 바로 앞 동네로 그 무를 팔러 나왔던 기억이 떠올랐다. 내가 수치스런 상황을 견디지 못하는 것이 이때 잃어버린 나의 말과도 관계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특수한 정황에서, 이를테면 조창인의 『가시고기』에서 아이가 아빠와 엄마에 대해 말하는 것에서도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올리고 상황을 반복하게 된다. 이 상실된 감정을 언어화하는 것이 중요하다. 인간의 상상은 기억에서 오는 것이지만 그 상상이 다시 기억을 몰고 온다. 이때 우리는 상상을 자기의 글로 만든다. 그러면서 동시에 우리는 자신의 목소리, 즉 잃어버린 말을 찾게 되고 어떤 목소리에서 자신의 새로운 감정을 찾을 수 있다. 이미 지나가버린 시간, 이미 반복할 수 없는 사건을 다시 반복하는 것이다. 그래서 독일의 소설가 무쉭 Muschg은 치료를 두고 ‘글쓰기는 결석한 날을 마치 출석한 날처럼 기록하는 것’이라고 멋지게 말한 바 있다. 문학을 통해 우리는 억압된 것을 보이게 하고 말할 수 없었던 것을 말할 수 있게 된다.

 

   시는 소설보다 오히려 감정적 과거와 만나는 데 더 큰 역동성을 제공해줄 수 있다. 왜냐하면 시에서는 산문처럼 내용이 전면에 부상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분위기가 부상하기 때문이다. 시의 언어는 구조화되어 있을 뿐, 그것이 말해지지 않은 상태에 있기 때문에 우리의 정서를 광범위하게 받아들인다. 독자는 시인과 쌍둥이다. 그리고 시는 마음의 영사막이다. 그 시에는 바로 시인이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들어 있다. 다음은 릴케의 시다. 읽어보자.

 

   나는 사람들의 말이 매우 두렵다.
   그들은 모든 것을 아주 분명히 말한다.
   이것은 개고 저것은 집이며,
   여기가 시작이고 저기가 끝이라고.

 

   그들의 생각, 그들의 말장난이 나를 두렵게 한다.
   그들은 미래와 과거를 다 안다.
   그들은 어떤 산을 보고도 감동하지 않는데
   그것은 그들의 정원과 땅이 곧 신의 나라에 가깝기 때문이다.

 

   나는 언제나 멀리 떨어져 있으라고 경고하고 저항하고 싶다.
   나는 사물들이 노래하는 소리가 좋다.
   너희들이 사물을 건드리면 사물들은 놀라 벙어리가 된다.
   너희들이 나의 모든 사물들을 죽이고 있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 1898. 11. 21.)

 

   시란 모든 사람들의 선택인 만큼 모든 사람들의 삶의 방식이기도 하다. 모든 사물들은 주관적으로 받아들여진다. 이 시에 나타난 릴케의 언어는 사실 모순적이다. ‘나는 사람들의 말이 매우 두렵다. 그들은 모든 것을 아주 분명히 말한다. 이것은 개고 저것은 집이며, 여기가 시작이고 저기가 끝이라고.’ 릴케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분명하지만 그가 말하는 것 자체도 분명하므로 모순이다. 그러나 독자로서의 참여자는 그런 내용이나 가치보다는 시에서 부수적인 감정이 훨씬 중요하다. 그러면 나는 시가 말하는 것을 판단할 필요도 없다. 오히려 나의 상처, 나의 잃어버린 말을 찾게 한다. 이를테면 ‘사람들의 말이 두렵다.’라는 말을 들을 때(읽을 때) 나는 어떤 감정을 가지게 되는가? 어떤 영상을 떠올리는가? 나는 무슨 말을 잃어버렸는가? 정확하게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어렴풋이 영상이 떠오를 것이다. 나는 할머니의 꾸짖는 소리와 어머니의 울음소리가 들린다. 할머니의 명령이 그릇이 깨지는 소리로 들린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사람마다 다르기에 그것을 분명하게 할 필요는 없다. 그냥 나는 이런 말을 떠올려본다.(참고로 아래 글은 그냥 나에게 떠오르는 영상, 소리, 몸의 반응을 그대로 적어본 것이다.)

 

   무색의 푸른 장미 잎이 감정 없이 가시를 내민다
   빨개지는 빨주노초파남보통 사람들 가시 속에서
   후아 잘못했다 그런 말하는 게 아닌게 아니라
   으악 숨가쁜 치약소리 차차차치치 추추 구룩구룩 흐악
   약발받는 소리지지지 추쿠투루아미바사라미라

 

   이런 난센스 시(?)는 일견 말이 아닌 것 같지만 무의식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서너 살 된 어린아이가 그리는 난화처럼 나오는 대로 써보는 난센스 시는 나의 잃어버린 언어에 대한 매우 귀중한 자료를 보여줄 수 있다. 그 다음에는 다음과 같은 순서로 가보자.

 

   치료사: 어린 시절 집에서, 학교에서, 친구들에게서 하지 말아야 했던 말은 무엇인가? 그리고 그때부터 지금까지 지켜오고 있는 것이 있는가?

 

   이런 이야기를 쓰는 것은 시(문학) 치료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이때 그것을 집단에서 듣는 것은 다시 독서치료가 된다. 나는 능동적이고 적극적 상상(이미 릴케의 시를 통해서 어느 정도 기억의 창고에 접근해 있었다.)을 통해서 이런 기억을 끄집어낼 수 있었다.

 

   나는 어머니에게 들은 것을 할머니에게 말하면 안 되었고 할머니에게 들은 것을 어머니에게 말하면 안 되었고 아버지에게 들은 것을 할머니에게 말하면 안 되었고 할머니에게 들은 것은 아버지에게 말할 수 있었고, 아버지에게 들은 것을 어머니에게 말하면 안 되었고 어머니에게 들은 것은 아버지에게 말해도 좋았다.

 

   이 이야기를 회상하는 가운데 나는 참으로 답답한 기분에 빠져들게 되었다. 과거에 할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어머니가 서로 뒤엉켜 싸운 적이 많았다. 그러고 난 후면 반드시 할머니와 개인적으로, 그리고 어머니와 개인적으로 만나게 된다. 그러면 그들은 이런 말을 묻는다. “네 에미가 뭐라고 하더냐?” “할매가 뭐라 하더냐?” 나는 처음에는 아무것도 모르고 대답을 했다. 그러나 그것은 곧 풍파를 몰고 왔다. 대부분 아이(사람)들은 자기가 보고 들은 것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권리와 즐거움이 있다. 그러나 나는 이 시기부터 대략 이 문제에 관해서는 말을 하지 않게 됐고 지금도 그와 비슷한 상황이 되면 선택적 함구증이 있다. 이랬으면 얼마나 좋을까? ‘엄마, 할매가 미안하다고 그랬어!’ 아니면 ‘할매, 엄마가 어른한테 말대꾸하는 것은 잘못되었다고 반성하고 있어요. 할머니가 용서해주세요.’ 시는 기원이자 탄원이다. 시가 원시 시대에는 이런 내용을 대부분 신이나 신령들이나 토템에 비는 내용으로 실현했다. 그 어떤 신이 있어서 이런 탄원의 내용을 들어주었든, 그렇지 않았든 당시에는 시가 어떤 주술적, 치료적 역할을 했던 것은 분명한 일이다. 잠시 숨을 고르고 가기 위해 시가 아니나 시 같은 카프카의 「귀향」이라는 글을 읽어보자.

 

 「귀향」(프란츠 카프카)

   나는 집으로 돌아와 마당을 가로질러 건너갔다. 그리고 한번 둘러보았다. 여기가 바로 내 아버지의 오래된 집이다. 마당 가운데는 웅덩이가 있다. 그리고 오래되고 쓸모없는 도구들이 서로 뒤엉켜 이층 계단으로 향한 길을 막는다. 고양이는 난간에서 노려보고 있고, 찢어진 수건이 장대 끝에 걸려서 바람에 이리저리 날리고 있다.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누가 나를 맞아줄 것인가? 누가 부엌문 뒤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가? 굴뚝에서는 연기가 나고 저녁식사 후에 마실 커피가 끓는다. 고향 같은 느낌이 드는가, 그리고 집에 온 느낌이 드는가? 나는 모르겠다. 그리고 확실치 않다. 이것이 아버지의 집이다. 그러나 모든 것들이 그냥 자기 일에만 골몰하고 있는 것처럼 따로 따로 놀고 있다. 어떤 것들은 잊어버렸고 어떤 것들은 처음 보는 것들이다. 내가 그들에게 어떤 쓸모가 있을까, 나는 그들에게 어떤 존재일까, 그것도 아버지의 아들, 한 늙은 농부의 아들로서 말이다. 하지만 나는 부엌의 문을 두드릴 용기가 없다. 그저 먼발치서 귀를 기울여 무슨 소리가 나는지 들으려고 할 뿐. 먼발치서 그것도 서서 듣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내가 엿듣는 사람으로 들키지 않는 한에서만 그렇게 하고 있다. 내가 먼발치서 엿듣고 있으므로 나는 아무것도 엿들을 수 없다. 그저 시계추 흔들리는 소리나 듣고 있지만 사실은 그런 소리가 어린 시절의 기억에서 나온 소리일지도 모른다. 부엌에서 일어나는 일은 내게 들리지 않을 만큼만 속닥거릴, 거기 앉아 있는 사람들의 비밀이다. 문 앞에서 내가 머뭇거리면 머뭇거릴수록 나는 더욱 낯선 사람이 된다. 이제 누가 문을 열어서 내게 말을 걸기라도 한다면 어떻게 하나. 그렇게 되면 나 또한 비밀을 지키고자 하는 사람 중의 한 사람이 아닐까.

 

   나는 이 이야기를 들은 후 시골집이 떠올랐다. 그리고 다시는 이 집에 돌아오는 일이 없으리라고 집에 갈 때마다 맹세를 하던 일이 떠올랐다. 지긋지긋한 집을 다시 떠올리게 되다니! 내가 문학치료를 하지 않았다면 다시 만나지 않았을 나의 고향, 아버지 집, 그리고 나의 언어! 나는 카프카처럼 망설인다. 그것은 육체적, 지리적 고향이기도 하지만 실제로 현재 나의 기억 창고로 들어가는 문이기도 하기 때문에 나는 망설인다. 이 글에는 어머니가 없다. 아버지만 있을 뿐! 어쩌면 나의 기억과 똑같은가! 나는 돌연 어린 어느 날 잠에서 깨었을 때가 생각난다. 그런데 밖은 깜깜하고 집에는 아무도 없다. 무서웠다. 울고, 오줌도 싸고, 똥도 쌌던 것 같다. 사실인지는 모르겠다. 기억일 뿐이다. 글을 읽고 난 후 난 이런 글을 썼다. ‘내가 누울 때 있었던 엄마가 일어났을 때 내 머리맡에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그렇다. 이것이 나의 잃어버린 말이다. 시를 짓는다.

 

   고양이는 찢어진 수건처럼 나부끼고
   엄마는 굴뚝의 연기처럼 사라진다.
   아버지는 유년의 비밀을 엿듣고
   나는 먼발치서 시계추처럼 흔들린다.
   옛집, 낯선 슬픔
   고향은 가벼운 전율처럼 다가온다.

 

   나는 이 글을 쓰고 많은 사람들에게서 피드백을 받았다. ‘유년이 시입니다.’ ‘잃어버린 말을 찾게 해주어 고맙습니다.’ ‘갑자기 슬퍼집니다.’ ‘유년의 비밀’이란 말이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평가하고 판단하는 말이 없어서 행복했다.
   나는 잃어버린 말을 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대체할 수 있는 말이 없다. 내 옆에 있는 대타자로서의 ‘엄마’는 상실되었다. 잃어버린 말을 대체할 수 있는 말이 있을까? 나는 독일의 시인 엔첸스베르거의 시에서 큰 위로를 받았다. 큰 파문波紋이 없이, 나지막한 소리로 나의 마음을 채워주고 마음을 치유한 「잠들게(Schlferung)」라는 시를 읽어본다.

 

   오늘 밤 나를 기타 속에 잠들게 해 주세요
   경이로운 밤의 기타 속에서
   나를 쉬게 해 주세요
                                부서진 나무 속에서
   내 두 손을 잠들게 해주세요
                                그녀의 기타줄 위에서
   나의 경이로운 손들을
                                잠들게 해 주세요
   그 달콤한 나무를
                    나의 기타 줄을
                                       그 밤을 
   잊혀진 코드 위에 쉬게 해 주시고
   나의 부서진 두 손을
                      잠들게 해 주세요
   경이로운 나무 속
   달콤한 기타 줄 위에서 

                  

   이 시는 보면 혼란스럽다. 그러나 들어보라. 시가 나에게 무슨 말을 하는지. 개개의 이미지들이 무엇을 말하는지 그리고 서로 어떤 관련이 있는지도 불분명하다. 그러나 이 시는 자장가를 떠올리게 하는 부드럽고 율동적인 리듬이 나를 압도한다. 시의 의미와 해석은 부수적인 것으로 밀려나고 내 기억 속의 그림자나 평온한 분위기만 살아난다. 이런 분위기는 두어첩용으로 계속되는 ‘나를… 해 주세요, 나를… 하게 그냥 두세요.’라는 말에서 비롯된 것 같다. 나에게는 엄마와 같은 ‘기타’가 있고, ‘기타 속’ ‘나무 속’이라는 말에서 엄마의 품안과 같은 편안함을 얻을 수 있었다. ‘부서진 나무’/‘부서진 손’은 ‘경이로운 손’/‘경이로운 나무’/‘경이로운 기타’, ‘달콤한 나무’/‘달콤한 기타줄’, ‘그녀의 기타줄’/‘나의 기타줄’ 같은 반복으로 인해 마치 자장가를 불러주는 엄마의 노랫가락을 듣는 듯하다. 문학치료에서 중요한 것은 시가 내게 무슨 말을 하느냐이지 시의 전달 내용이나 미학이 아니다. 도덕이나 가치는 더더욱 아니다.

 

   지금까지 길고 긴 잃어버린 말을 찾는 과정을 두고 문학치료사는 어떻게 말할까? 아서 러너 Arthur Lerner는 미국의 의사로서 초기의 문학치료를 시행한 사람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1. 문학치료에서 문학은 치료를 위해 사용하는 것이지 그 중심은 참여자의 반응에 있다. 문학 공방工房에서는 문학적 읽기와 글쓰기가 그 중심에 있다.
   2. 문학은 a) 감정의 묵은 찌꺼기를 걸러낼 수 있다.
          b) 나만의 해석을 도출할 수 있다.
          c) 감정이입(투사)을 할 수 있다.
          d) 꿈에서처럼 소원을 충족할 수 있다.
   3. 문학의 근본적인 영향력은 메타포와 비유에서 나온다.
   4. 문학이 유용한 것은 그것이 인간의 감성과 이성을 재편할 수 있기 때문이다.
   5. 어떤 특정한 순간에 의미를 가진 문학이 다른 순간에 영향을 미치지 못할 수도 있다. 마찬가지로 어떤 특정한 사람에게 영향을 미친 문학이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지 못할 수도 있다. 아직은 특정한 문학이 특정한 상처나 고통에 도움이 된다는 보고가 없다. 그저 문학은 치유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는 보고는 있다.
   6. 치료에 제공되는, 또는 치료과정에서 생산된 텍스트는 참여자가 자신의 감정을 이해하고 자신의 역할이나 미결 감정, 자신의 인성, 경향성을 파악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Arthur Lerner, Poetry in the therapeutic experience. New York: Pergamon Press 1980.)

 

   치료와 문학은 ‘잃어버린 언어를 찾아 자기 고유한 삶을 만들어간다.’는 점에서 공동의 프로젝트를 갖고 있다. 그러나 문학은 치료가 아니다. 그저 전체적으로 볼 때 치료의 길을 걸어가도록 용기를 준다. 그리고 치료 또한 문학이 아니다. 치료는 다만 삶의 환상이 보장되고, 지탱되고, 현실과 소통되도록 문학에 도움을 준다. 그러니까 둘 다 스스로의 삶을 위협하는 사람들에게 평형 상태를 유지하게 하도록 하자는 같은 목적을 가지고 있다. 두 가지 모두 사는 법을 배우고 나면 살아남는 것이 자신에게 큰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통찰을 하게 한다. 그래서 천일야화의 샤흐르자드는 살아남기 위해 이야기를 했고, 박경리는 고통을 이기기 위해 글을 썼다. 행동을 포함한 목소리를 찾고, 그림과 이미지를 포함한 글로 표현된 기억 속에서 우리는 잃어버린 언어를 찾을 수 있다. 언어를 찾은 다음, 우리는 다시 인생을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마치 첫 걸음을 떼어 걸음마를 시작하는 아이처럼, 잃어버린 말을 새로 시작하는 것이다. 이런 자유를 얻는 사람은 기억과 이미지의 운명에서 해방될 수 있다. 그러므로 문학치료는 글로 쓰인 문자가 아니라 소리와 그림으로 이루어진 총체적인 언어로서만 수행될 수 있다. 언어 상실이란 결국 총체적으로 잃는 것을 말하고 치유란 상실된 것을 총체적으로 회복하는 것을 말한다.

 

 

변학수  --------------------------------------------------------

   독일 슈투트가르트 대학교에서 문학과 철학으로 석사학위(M.A.)를 받고, 같은 대학교에서 문학박사(Dr.phil.)학위를 받았다. 계간지 『시와반시』 기획위원이며, 문학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다. 현재 한국연구재단 전문위원이며, 경북대학교 사범대학 독어교육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저서로는 『감성독서』, 『문학적 기억의 탄생』, 『프로이트 프리즘』, 『문학치료』 등이 있으며, 역서로는 『기억의 공간』, 『이집트인 모세』, 『시와 인식』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