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과 예술 종합계간지 『계간문예』에서 특집으로 임재정시인에 대해서 탐구를 해봅니다. 먼저 임시인의 작품을 감상해보시죠.
개암에 얹는 이야기 외 4편 / 임 재 정
1.
개암이 먹고 싶다던 먼데사람이 생각나서 약탕기 속인 듯 갈볕
이 끓어서 기껏 개암인데 싶어서 산길을 더듬었다.
아무래도 내게는 연(緣) 아니 닿는 개암
밤나무 아래 흩어진 되 남짓 알밤과
탐스레 무른 다래 알만 주워 돌아왔다
2.
가을은 어디 먼 데가 얼비치는 증세
먼 데 어디 거긴
낭떠러지 바위산, 그대
그저 나는 알밤이나 한 되 삶아 먹고
심중에 이빨달린 싹이 무성하기를 바랄 뿐
3.
나는 아무데도 아니 가고
아무 것도 아니 탐하려네
구역질하듯 곡진히 다 따른 약탕기이므로
내처 당신이나 다리려네
아흐레아, 그렇거니 당신은 꺼칠머리 억샛닢 먼데사람
가을 모기가 물어도 그냥 웃어 보낸다
까마귀 제삿날
정월 연못에 뜬 달
소나무가지 위에 쌓인 눈이
칠월 내간의 찻잔에서 녹는다
당신을 향해 날린 화살이 노래를 그치게 할 때, 나는
죽은 나무를 열고 밖을 내다보는 애벌레의 눈
생사를 붙잡고 농현(弄絃)으로 우는 돼지
다리 넷의 저마다 방향이 다른 발자국들
까마귀는 연못 속에 뜬 달로 날아가고
비명은 모가지라는 분지에 날려 쌓이고
질척하게 녹는다
삶과 죽음이 발자국 한 쌍을 거느린 신발 같다
찻잔 속에서 생의 배후까지 날아오르는 김
정월의 연못 속에 뜬 달을 마신다
오늘은 칠월하고도 칠석
일곱 별 사이에 걸린 여섯 줄
밤하늘 가득 성긴 눈이 후년 정월로 날려간다
가려운 등에 헌화(獻花)
형 박박은 나자마자 말문이 트였더라죠. 맞달린 부득이 제 어미를 잡고 꼬박 반나절을 버틴 탓. 종종걸음 치던 산파의 주름과 땀방울까지 죄다 배워버렸다던데요.
박박이 한낮 모퉁이를 어슬렁대면 부득은 밤의 모퉁이나 서성이기로
서로의 그중 가까운 옆구리를 찔러 기별 넣는 날은
가자는 데가 달라 다리 하나씩 나눠 쓰던 날
마을 후미진 곳엔 으레 미간을 찌푸린 날씨. 늦어 허둥대는 햇살은 금세 내리막. 몸은 하난데 입은 두 개, 심중으로 뻗은 길은 천 갈래. 한길엔 인기척이 잦아 등 뒤로 난 산길을 오르면 귓속 가득 부스럭 나뭇잎과 으르렁 짐승이 편을 갈라 싸우고. 걷자는 박박과 뛰자는 부득이 나눠 쓰던 다리도 티격태격 했던 모양.
낮의 걸음을 밤새 또 되짚어 걸어 다 끄덕인 상처가 새삼 덧나곤 하던 몸붙이쌍둥이.
물속에 얼비친 그림자에 손을 내미는 일이 저토록 무겁구나, 사람들은 뒤를 돌아다보는 것으로 제 안을 저어하곤 했다죠.
미워하는 일로써 자기를 편애하노라면, 벽도 슬그머니 지워지는 것을. 흐린 날엔 박박도 부득도 서로를 앓느라 하루가 하늘 언저리까지 두루뭉수리. 손닿지 않는 등에 꽃 꺾어 바치려 스스로 눈을 찔러 붉고 환하다느니. 히얘야-
어버버, 10㎝
벽과 바닥을 가르며 가로로 덧댄 ‘걸레받이’라 부르는 곳은 벽지와 바닥재가 마주앉아 생각을 펼치는 다방 같은 덴지도. 어둔 색으로 한발 물러앉은 것은 마주한 얼굴이 붉어질 일 천지여설 것.
거리라는 게 있어요. 10㎝의 넓이. 새침한 얼굴 악다문 입 바람벽 같은. 실은 그 어느 것도 아니죠. 이를테면, 무가 나무를 꿈꾸며 발꿈치를 쳐든 무청쯤인데요, 말더듬이 소년이 목을 뽑아 넘겨다본 담 너머이기도 사내가 서성이던 비좁고 긴 골목이기도 거기 우연을 가장해 스쳐 지나던 소녀의 어깨이기도.
10㎝는 신파의 폭이래도 그만. 늘 보수해야하는 낡은 집에 세든 당신은 신접살림 난 새댁이고요. 하필이면 말더듬이 전공 어버버 씨(氏)를 불러 콘센트를 손보기로 했겠죠. 걸레받이에 콘센트를 달아달라는 당신이 뻘이라면 말더듬이 어버버는 끝내 짱뚱어 쯤의 어설픈 물고기였을까요.
누구든 살아 움직이는 벽 일렁이는 얼룩인데. 플러그를 꼽으면 펼쳐지는 대평면 가득 표범을 피해 내닫던 누가 고꾸라지는 결말. 무릎을 꿇고 어버버, 오른쪽으로 감긴 나사가 물고 견디는 콘센트에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결코 들을 수 없는 비명.
모서리인 내가 목 꺾어 당신을 벽으로 깨닫는 10㎝
견디지 말아요, 우리를
다시는,
동감(同感)
짧은 코에 관한
어떤 질문도 금(禁)하기로 하지
규칙이니까, 기대어 들먹이는 것쯤은
이해해 줄게 (네 박자를 나도 함께 하기로 할까)
상황극의 시간
보이지? 벽, 완벽한 무대야
울먹이는 그림자가 있지? 다른 그림자가 다가와
어깨를 다독이네? 하나같이 짧은 코를 달고
어느 고도에도 닿지 않는 그림자들
고개 돌려 객석을 볼까?
끄덕끄덕 코 짧은 이들이 듣고 있지?
울 수 없음의 규칙은 지켜야 하므로
하염없지, 눈알이 다 녹아내린다 해도
어쩌면 우린 이미 다 아는
모르는 이야기들, 주인공들
큰소리로 깔깔거리다가, 코에 코를 물고
수액으로 쏟아질까 서로에게
아예 입원(入院) 하기로 할까?
네 이야길 들을 차례야
코가 짧지만 코끼리일 수밖에 없다고
죽기 살기로 말해줄래? 규칙이니까
임 재 정 ---------------------------------------------
충남 연기 출생, 2009 ‘진주신문가을문예’ 대상. 2011 ‘서울문화재단’ 문학창작활성화 지원기금 수혜.
'계간 계간문예 > 계간문예 본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계간문예 2013년 여름호, 시] 남루에 대하여 외 1편 - 이상국 (0) | 2013.12.08 |
---|---|
[계간문예 2013년 여름호, 특집 · 임재정] 서사의 계열화 혹은 방법적 서정으로써의 언어들 - 박성현 (0) | 2013.11.14 |
[계간문예 2013년 여름호, 수필] 세 개의 빈 칸 - 김이경 (0) | 2013.11.06 |
[계간문예 2013년 여름호, 수필] 신선이 될 뻔한 이야기 - 정태원 (0) | 2013.11.06 |
[계간문예 2013년 여름호, 수필] 칠보산을 오르며 - 정봉애 (0) | 2013.11.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