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이 구체화되는 계절. 갈색으로 말라버린 목수국 울타리가 그대로 풍경이 되는 반월호수. 그 집 하나만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가슴에 조용한 파도가 일렁거린다. 입 꼬리가 가만히 올라간다. 누군가 너무 비현실적인 몽상이라고 비웃기라도 한다면, 엄지와 가운뎃손가락을 딱 부딪쳐 기차의 기적소리를 불러내고, 나는 짐짓 딴청을 하리라. 기차가 등 뒤로 환상을 깨우듯 숨 가쁘게 달려간다. 아, 무산인가. 허공에서 분절되어 날아간 꿈. 아무렴 어떠랴. 꿈은 기차처럼 가고 또 올 것이다."
레이크 하우스 - 최영애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호수가 있다. 자동차를 몰고 가면 십여 분만에 달려갈 수 있는 거리, 가끔 반월호수를 즐겨 찾는다.
십여 년 전, 우연히 길가의 이정표를 따라 왔을 때는 호수 주위엔 토사가 흘러내린 채로 조금은 황량해 보였다. 지금은 호수 가장자리를 따라 산책로가 잘 다듬어져 있다. 고즈넉한 분위기. 호수 둘레를 따라 하얀 목수국이 주먹만 한 크기로 꽃울타리를 만들 때가 가장 절정에 이른다.
아침저녁으로 사람들이 슬리퍼를 끌며 산책을 한다. 산 쪽의 철책 너머 기차가 빠르게 지나간다. 비오는 날, 기차가 자갈을 밟으며 레일 위를 달리는 소리가 좋다. 빗물과 레일, 자갈이 달라붙는 듯한 소리가 적당히 버무려진 젖은 마찰음. KTX가 성질 급하게 달려오면 굵은 전선은 기차를 먼저 보내고 프로메테우스처럼 서서 양 줄을 매단 채 뒤따라가기 바쁘다. 기차 소리는 언제 들어도 정감이 가고 묘한 여운을 남긴다.
가끔 나타나는 빨간색, 노란색 ‘커피카’가 호수의 풍경에 한몫을 한다. 장난감처럼 굴러가는 앙증맞은 이동 카페. 자동차 안의 바리스타가 커피머신에서 원두커피를 내린다. 커피향이 호숫가에 퍼진다. 커피알갱이를 잘게 빻아 내린 드립커피는 어쩌다 누릴 수 있는 서비스이자 VIP의 행운이다. 포인트 티켓에 스탬프가 늘어간다. 바로 내린 커피는 뜨거워서 손을 번갈아 쥐다가 골판지 홀더를 덧씌워야 겨우 잡을 수 있다. 부드러운 우유거품을 먼저 맛보고 커피와 함께 마지막으로 느끼는 바닐라 시럽의 맛. ‘카라멜 마끼아또’의 달콤한 사치는 안개 낀 날에 꼭 즐겨야만 하는 호수의 필수 메뉴다.
호수를 한 바퀴 둘러보고 벤치에 앉는 시간. 산 그림자가 조용히 호수 가장자리 앞에 머물다 간다. 해동갑으로 상상나래를 펼치는 것도 오후의 산책이 즐거워지는 이유다. 눈을 감고 조용히 앉아 그 모습을 떠올리며 설계를 한다. 우선 나지막한 산은 그냥 배경으로 둔다. 호수 가운데 편평한 바지선을 앉힌다. 공법은 잘 모르더라도 눈으로 짓는 집이니 무슨 상관이랴. 기둥을 제외하고는 모든 벽은 유리로 만들 생각이다. 천장은 유리로 하되 돔의 형태는 어떨까. 비오는 날은 빗방울이 다닥다닥 유리벽에 달라붙어 시야를 흐릴 것이다. 서릿발이 그대로 눈꽃이 되는 겨울. 성에 낀 유리를 입김을 불어 긴 소매 깃으로 닦고, 동그랗게 번져가는 구멍에 눈을 대며 바깥세상을 처음 보는 것처럼 신기하게 볼지도 모른다. 낮에는 녹음이 진 주변 경치를 그대로 눈에 담고, 밤에는 천장에 별을 가득 들여놓아 북극성을 찾다가 국자를 닮은 별이 뒤집어져 은하수 가루를 하얗게 쏟아 낼 무렵이면 무슨 꿈을 꾸고 있을까.
나무수국이 담을 이룬 울타리에서 호수 가운데 떠있는 집으로 건너오는 다리는 통나무로 엮어 뗏목처럼 띄워야 한다. 나무 하나하나를 엮어 출렁이는 다리 하나를 조금은 부실해 보이게 만든다. 방문객이 당도하면 술에 취한 낭만객처럼 흔들거리며 줄을 잡고 건너오게 하고 싶다. 잘 웃지 않고 너무 근엄한 표정을 짓는 사람은 가차 없이 물에 빠뜨리는 상상과 그 즐거움을 생각한다. 평소 유쾌한 사람은 더욱 유열하게 부러 다리를 흔들어가며, 중심을 잃는 순간, 그는 노르웨이 고등어가 담긴 비닐주머니를 실수처럼 던질 것이다. 그 집의 주인은 아주 자연스럽게 그것을 받아들고 프라이팬에 즉석요리를 할 것이다.
빨간색 우체통도 하나 세울 것이다. 편지를 가지러 갈 때마다 어어! 짧은 비명과 함께 두 팔이 엇갈린 채로 팔랑개비처럼 돌다 중심을 잡고는, 누가 보았을까 휘익 한 번 둘러보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랩스커트 끝자락을 여미며 시치미를 뚝 뗄 것이다. 우체통 안을 확인하고 돌아올 때는 발레 하는 소녀가 걷듯이, 아니 오리처럼 뒤뚱뒤뚱 어색하고 빠른 걸음으로 종종거릴지도 모른다. 스마트폰으로 카톡과 메일을 주고받는 시대일지라도 손으로 꾹 눌러 쓴 편지를 고집하는 사람들과 아날로그 감성으로 손 편지를 주고받을 것이다. 밤이 되면, 가끔 제 모습을 비쳐보다 나르시시즘에 빠진 달의 몰락도 지켜보는 즐거움. 달의 정령이 조용히 올라올 수 있게 줄사다리 하나쯤 걸쳐놓는 여유도 나쁘지 않겠다.
꿈이 구체화되는 계절. 갈색으로 말라버린 목수국 울타리가 그대로 풍경이 되는 반월호수. 그 집 하나만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가슴에 조용한 파도가 일렁거린다. 입 꼬리가 가만히 올라간다. 누군가 너무 비현실적인 몽상이라고 비웃기라도 한다면, 엄지와 가운뎃손가락을 딱 부딪쳐 기차의 기적소리를 불러내고, 나는 짐짓 딴청을 하리라. 기차가 등 뒤로 환상을 깨우듯 숨 가쁘게 달려간다. 아, 무산인가. 허공에서 분절되어 날아간 꿈. 아무렴 어떠랴. 꿈은 기차처럼 가고 또 올 것이다. 그 집은 내가 짓고 나만이 볼 수 있지만 기둥이 세워지고, 유리벽과 천장을 잇는 사이 유쾌한 상상으로 짓는다. 가상의 집을 떠올리는 즐거움. 나 혼자 마음속에서 짓는 상상의 집은 건축 자재비가 들지 않고 언제나 무한공급이다. 이 정도면 대만족. 그 집에 멋진 이름 하나 선사하고 싶다.
호수 한가운데 그림처럼 떠 있는 집, ‘레이크 하우스.’
바람이 분다. 호수 앞에 있는 빨간 지붕의 풍차가 천천히 돈다. 잔디 위 민들레 홀씨를 형상화한 조각상도 바람을 타는 모양이다. 홀씨가 땅에 떨어지지 않고 계절과 상관없이 바람을 타는 건 꿈을 꾸기 때문일 것이다.
일요일 오후, 늦더위를 피해 호숫가에 앉아 있는 사람들과 아이들, 애완견을 안고 서서 호수를 바라보는 사람들은 좀처럼 일어설 줄을 모른다. 정지된 화면 같은 느린 오후의 시간, 이렇게 호숫가에 앉아 있으면 ‘쇠라’의 <그랑 자트섬의 일요일 오후>를 가만히 떠올리게 된다. 십구 세기의 어딘가쯤, 시간을 잊고 마치 그 속에 앉아 있는 착각이 든다. 나는 가끔 ‘빨간머리 앤’이 되곤 한다.
최영애 ----------------------------------------
≪에세이문학≫ 완료 추천. 신라문학대상 수상(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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