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난 그 할머니가 그 늦은 시간에 그 배들을 집으로 가져가게는 할 수 없었다. 피하듯 자리를 떠나는 할머니의 모습이 눈에 잡히지만 그래도 할머니께 좋은 일 했다는 생각엔 변함이 없다. 그래도 완전히 가시지 않는 마음 한 구석의 아쉬움은 또 뭘까."
그래도 / 최원현
밤 12시가 다 되었다. 전철에서 내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막 내리려는데 한 할머니가 내 발을 붙든다. “이거 떨이인데 다 가져 가요. 집에 들어가야 하는데 이게 남아서 못 가고 있어요.”
노인은 스무 개가 넘을 배를 에스컬레이터 옆 좁은 공간에 쌓아놓고 있는데 말처럼 남은 것을 집으로 가져간다는 것도 쉽지는 않을 것 같았다. 다행히 아내와 함께인 것을 믿고 좋은 일 한다는 셈치고 더럭 사주기로 해버렸다. 그런데 화장실에 간 아내가 오질 않는다. 아내가 오면 나눠 들고 갈 심산이다.
스무 개가 넘는 유난히 커다란 배를 비닐봉지에 나눠 담으니 네 봉지 가득이다. 할머니께 값을 지불하고 났을 때에야 아내가 왔는데 얼굴 표정이 심상치가 않다. 아니나 다를까 화가 잔뜩 나 어떻게 사람이 그럴 수 있느냐는 것이다. 요즘같이 험한 세상에 늦은 밤 아무도 없는 지하철 역 화장실에 아내가 들어갔는데 혼자 가버리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는 것이다. 내 딴엔 좋은 일 한다고 으스대며 아내를 기다리던 참인데 상황은 전혀 내 예상과는 달리 변해 버렸다.
그런 중에도 아내는 상황을 짐작한 듯 화풀이 감으로 잘 되었다 싶기라도 했던지 이걸 다 어쩌려는 것이냐고 눈에 불을 켰다. 나도 질세라 먹으면 되지 뭘 어떡하느냐고 했더니 요즘 같은 날엔 배는 하루도 못가 다 물러버릴 것인데 이 많은 것을 어떻게 할 것이냐고 윽박지른다. 거기다 이 무거운 것을 집까지 어떻게 들고 갈 것이냐고 했다. 자기는 뾰족구두를 신어서 들고 갈 수가 없다는 것이고 나는 요즘 손이 아파 매일 치료를 받고 있는 상황인데 참으로 난감했다.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눈치 챈 할머니는 돈은 받았겠다 서둘러 정리를 하고 그곳을 떠날 채비를 한다. 그러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고 내 딴엔 할머니 도와드린다고 한 것인데 뭐 그렇게까지 화를 내느냐고 따졌다.
아내는 자기도 여러 번 그렇게 해주었는데 나중에 보니 남은 것은 차가 와서 다 실어 가더라며 다 상술이라고 몰아붙였다. 그러고 보니 내가 장사 수완에 걸려든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내 생각은 순수하게 할머니를 돕고자 한 것이었고 그 마음만은 기특한 것 아니냐고 했다. 그러나 아내가 정작 화가 난 것은 아무래도 아까 지하철 화장실에 자기 혼자 남겨두고 올라와 버린 것에 대한 화풀이가 더 크게 작용하는 것 같다.
사실 나는 화장실에서 나오면 바로 에스컬레이터로 연결되기 때문에 별 문제가 없다고 생각을 했다. 그러나 여자 마음은 그렇지 않은가보다. 늦은 밤에 혼자 화장실에 들어간다는 것도 겁이 났을 법하다. 그런데 나와 보니 남편은 가버렸고 덩그마니 혼자가 되었다 생각하니 무서움증이 확 들었을 수도 있겠다. 그래 화가 나서 씩씩대며 올라왔는데 남편이란 사람이 또 일을 저질러 놓고 있었던 것이다. 아내도 몇 번을 그리 해 주었다는 아내의 말에는 나도 더 할 말을 잃었다.
그럼에도 마음 한 구석에선 이왕 그렇게 된 것이면 ‘그래 당신 마음이 곱소’ 하고 넘어가 주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기도 했다. 그러나 화가 나있는 아내에겐 역시 무리였다.
집에까지 배를 옮기면서 큰 곤욕을 치렀다. 평소에는 가깝던 거리가 이날따라 어찌나 먼지 거기다 배는 어찌 이리 커가지고 사람 힘들게 하나 싶었다. 화 난 아내에게 맡길 수도 없고 더구나 뾰족구두를 신은 채로는 들고 가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어서 아내에게 지키고 있으라 해놓고 한 번 갖다 놓고 와서 다시 가지러 왔다.
그 밤 내내 혼자 애를 먹었다. 아내는 문을 닫고 방으로 들어가 버렸으니 어쩠든 내가 이 배를 다 처리해야 하는 것이다. 배는 아이 머리통 만하게 큰데 가져온 것 중의 반은 아내의 말대로 벌써 만지면 물렁물렁 했다. 어떤 것은 손에 잡을 수도 없을 만큼 흐늘흐늘 한 것도 있다. 순간 속에서 은근히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아내 말처럼 내가 당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어쩌랴. 이걸 아내가 알면 더 난리일 텐데 차라리 내가 조용히 해결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우선 배를 1등급, 2등급, 3등급으로 분류했다. 3등급은 지금 먹지 않으면 버려야 할 것들이다. 배즙을 내던지 해야 할 것들이다. 깎아서 큰 그릇에 썰어 담아 냉장고에 넣었다. 그리고 1등급 2등급은 신문지로 하나씩 쌌다.
그것들을 딸네에다 먼저 인심을 쓰기로 했다. 두 봉지 가득 담았다. 손주를 위해 배 깍두기를 담으라 했고 맘껏 먹으라고 선심을 마구 썼다. 속았다는 생각과 생각잖게 돈도 들었지만 할머니께 좋은 일을 했다는 마음을 갖기로 했다. 어쩠든 이 일로 우리 집엔 배 풍년이 들었다. 아내도 먹는 건 잘 먹는다. 풍덩풍덩 경비실에도 나눠주고 음식에도 푹푹 깎아 넣고 냉장실에서 시원해진 배를 깎아 먹으니 입에 살살 녹는다. 워낙 배가 커서 신문지에 하나씩 싸서 넣어둔 것들도 냉장실 가득이다.
배 한 번 잘못 샀다 혼이 단단히 났다. 그래도 마음은 즐겁다. 설혹 사실이 그렇지 않더라도 모처럼 좋은 일 했다는 생각엔 변함이 없고 딸네에도 비싼 배를 넉넉히 나눠줄 수 있었으니 그만하면 장사치곤 괜찮은 장사가 아닌가. 아무리 장사라도 세상이 어찌 이리도 믿음이 없어져버렸는가 아쉽기는 했지만 좋은 쪽으로만 생각하기로 했다. 그런데도 마음 한 구석이 개운치 못 한 것은 아내의 말 한 마디 때문이다.
“나도 몇 번 그렇게 해 주었는데 나중에 보니 남은 것은 차가 와서 실어 가더라구요.”
그래도 난 그 할머니가 그 늦은 시간에 그 배들을 집으로 가져가게는 할 수 없었다. 피하듯 자리를 떠나는 할머니의 모습이 눈에 잡히지만 그래도 할머니께 좋은 일 했다는 생각엔 변함이 없다. 그래도 완전히 가시지 않는 마음 한 구석의 아쉬움은 또 뭘까.
최원현 -------------------------------------------
《한국수필》수필 천료.《조선문학》문학평론 등단. 한국수필문학상·현대수필문학상·동포문학상대상·구름카페문학상 수상. 한국수필창작문예원장. 한국문인협회 이사. 한국수필가협회 감사. 한국크리스천문학가협회 수필분과회장. 수필집《날마다 좋은 날》《자작나무 기억의 숲으로 떠나는 여행》등 13권
'계간 인간과 문학 > 인간과 문학 본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인간과문학 2013년 여름호, 특집 · 2013 신춘문예 당선시인 신작시: 부산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 그 남자의 이웃 외 1편 - 정와연 (0) | 2013.10.26 |
---|---|
[인간과문학 2013년 여름호, 수필] 백목련 한 그루 - 백승훈 (0) | 2013.10.24 |
[인간과문학 2013년 여름호, 수필] 꽃비 내리는 어느 봄날 - 서종남 (0) | 2013.10.24 |
[인간과문학 2013년 여름호, 특집 · 2013 신춘문예 당선시인 신작시: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 황금에 관한 주석들 외 1편 - 김재현 (0) | 2013.10.13 |
[인간과문학 2013년 여름호, 특집 · 2013 신춘문예 당선시인 신작시: 문화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 섭씨 알레르기 외 1편 - 정지우 (0) | 2013.10.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