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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과문학 2013년 여름호, 수필] 꽃비 내리는 어느 봄날 - 서종남

신아미디어 2013. 10. 24. 08:05

"그녀는 별이 빛나는 밤이면 자신도 별이 되어 고향의 하늘에서도 빛나고 싶다며 눈망울을 적셨다. 서녘에 걸친 해처럼 슬프도록 아름다운 그녀의 앞길을 바람이 막고 헤살을 부려도, 어둠이 고통스레 속살 부비다 여명을 맞이하듯 모든 시름을 잊고 높은 하늘을 우러러 볼 수 있는 날이 곧 올 수 있기를 바래본다."

 

 

 

 

 

 

 꽃비 내리는 어느 봄날    서종남

 

 

   고향을 떠나 낯선 땅에서 생면부지의 사람들과 어울려 살아간다는 것은 매우 불편하고 외로운 일이다. 특히 여성결혼이민자인 외국인 신부의 고향에 대한 향수는 때로 마음속에 애잔한 한 폭의 그림으로 남게 한다.
   더운 나라에서 와 지금의 남편과 결혼하여 아들 하나를 두고 있는 H는, 명절을 맞이하거나 가족들과 소원해질 때면 늘 갈 수 없는 고향생각에 가슴이 아리다고 했다. 그녀의 망향은 그리움의 또 다른 표현이자, 해가 뜨고 지는 일상에서 느끼는 외로움의 투사投射일 것이다.
   벚꽃이 비처럼 내리던 어느 봄날, 그녀는 남편과 함께 공원을 산책하였다. 누가 보기에도 다정한 부부이건만, 그녀의 마음 한편은 빈 자리로 남아 있었다. 벚꽃의 화사함이나 진달래의 분홍빛 정취도 그녀에겐 슬픈 몸짓에 불과하였다. 결혼 후, 지금은 자신의 아들이 되었지만 당시엔 다섯 살 난 K와 집에서 함께 지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오늘도 사랑과 미움 사이를 넘나들며 먼 고향을 바라보는 그녀는 이제 아픔의 기억을 지우고 대신 사랑을 담으려 애쓰고 있다. 그저 마음 하나로 전실 자식에게 정을 쏟으며 잘 키우려 했으나, 결혼하면서 그런 그녀의 꿈은 무참히 무너졌다. 그토록 함께 살기를 원했건만, 그녀의 시모는 손자를 데려가고 말았다. 게다가 “우리 집안의 상속자는 이 아이뿐이다”라며 그녀에게 아이를 낳지 말라는 요구도 했다.
   그런 그녀의 아픔이 가족애로 치유되기도 전에 어느 날 덜컥 임신을 하고 말았다. 그로 인해 시모로부터 많이 시달렸음에도 불구하고 모계중심 사회에서 자란 그녀는 아무리 힘들어도 아이만은 낳아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녀를 힘들게 한 것은, 자신의 남편이 아들 때문에 마음을 잡지 못하고 친가에서 자고 오는 날이 많아서였다. 그때마다 그녀는 누구와도 상의하지 못한 채 혼자 속앓이를 해야만 했다.
   새 엄마와 정이 들면 훗날 손자에게 어려운 상황이 생길 수도 있다는 시모의 불안감에 그녀와 남편은 이산가족 아닌 이산가족으로 살아갔다. 그녀는 그간 깊이 묻어두었던 눈물을 쏟아내며 자신의 인생이 풀잎처럼 밟히는 것 같아 너무나 고통스럽다고 소매로 눈물을 훔쳤다. 
   그녀의 눈빛은 그리움의 빛깔로 채색되었다. 그녀는 언제쯤 자신의 꿈을 펼칠지 알 수 없어 땅으로 꺼지는 듯한 고단함에서 벗어나려 안간힘을 썼다.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는 창백한 행복의 그림자만이 그녀의 짙은 상처를 쓰리게 할 뿐이었다. 황량한 바람의 언덕 위에 선 그녀의 쓸쓸함을 다 감싸줄 수는 없어 상담자로서 안타깝기 그지없었다. 
   그녀는 죽으려 약을 먹은 적이 있었다. 전에 몇 번 상담을 하러 날 찾아 왔던 그녀이지만 평소 연결 고리가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녀가 어느 날 병원 응급실로 실려 갔고 보호자를 찾던 병원에서는 수첩에 적힌 내 전화번호로 연락을 한 것이다.
   갑작스런 전화를 받고 병원으로 갔더니 다행히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그녀가 처음 내게 건넨 말이 너무나 나를 슬프게 했다.
   “교수님! 사는 것이 죽는 것 보다 힘들었어요….”
   핏기 가신 얼굴로 힘없이 말하는 그녀가 하도 가엾어 뭐라 위로할 거리를 찾지 못한 나는 그녀의 손만 꼬옥 쥐었다.
   그 후 얼마간 시간이 흘렀다. 그녀는 갖은 시련과 아픔을 딛고 딸을 낳았다. 그녀의 시모는 다행스러워 했고 그녀는 다시는 아이를 낳지 않기로 서약을 했다고 하였다. 아이를 갖고 안 갖고의 결정을 타의에 의존한다는 것이 무척 자괴감이 들어 한동안 마음을 추스르기가 힘겨웠다고 했다. 그러나 그녀는 이렇게 해서라도 가정이 평온해진 것에 조였던 마음이 풀렸다고 했다.  
   이제 그녀의 소망은 남편과 함께 남편의 전실 아들과 자신의 딸이 남매로서 서로 아껴가는 사랑 넘치는 가정을 가꾸어 가는 것이라고 한다. 정말 소박하기 짝이 없는 어찌 보면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그녀의 희망이지만 그녀에게는 멀고 먼 길을 돌고 돌아 이제 반환점에 선 것이다.
   쪽빛 바다로 들어간 깃털 같은 하늘처럼 마음을 감추고 살던 그녀는 아직도 미완의 가정이지만 그래도 가족은 소중하니 이렇게라도 지내게 된 것이 다행스럽다고 눈빛으로 전했다. 그동안 나와의 상담 외는 의지할 데 없이 칼바람 불 듯 신산했던 나날들을 마음의 갈피에 접고 살아왔으나 어느 날 바람에 몸을 낮추는 풀잎처럼 쓰러졌다 다시 일어난 것이다.
   말투는 어눌했지만 마음이 너무나 투명해서 끝을 알 수 없는 그녀는 그녀가 가슴앓이로 살아온 날들은 돌이켜 보기도 두렵다고 했다. 한숨마저도 마음 놓고 쉬지 못하는 그녀의 얼굴은 너무도 깊은 시름으로 갇혀있다.
   그녀의 비통은 스스로를 숨 막히게 한 것 같았다. 그래서 물안개처럼 어디론가 홀연히 떠나고 싶었을 그녀다. 하지만 그녀는 강인했다. 고향에 대한 향수도 시모와의 갈등도 남편의 부재 아닌 부재도 모두 견디어내었다. 이제는 온전한 가정을 만들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해 노력하고 있고 이제 그 꿈이 실현되기를 바라고 있다.
   지금 그녀는 마음을 건네며 가족과 사랑을 나누려 한다. 시모를 이해하려 하고 남편도 더욱 사랑한다. 전실 아들만 데려와 온 가족이 함께 정을 쏟고 살 수 있다면 그녀는 더 이상 바랄게 없다고 하였다.
   그녀는 별이 빛나는 밤이면 자신도 별이 되어 고향의 하늘에서도 빛나고 싶다며 눈망울을 적셨다. 서녘에 걸친 해처럼 슬프도록 아름다운 그녀의 앞길을 바람이 막고 헤살을 부려도, 어둠이 고통스레 속살 부비다 여명을 맞이하듯 모든 시름을 잊고 높은 하늘을 우러러 볼 수 있는 날이 곧 올 수 있기를 바래본다.

 

 

 

서종남  -----------------------------------------------------

   문학박사/교육학박사(미국 George Washington 대학교), 시인·수필가, 한국다문화교육·상담센터 센터장, 한국다문화교육학회 홍보조직위원회 위원장, 제4회 황진이(문학)상 수상, 제23회 한국수필문학상 수상, 헤르만 헤세 〈국제 문학교류 학술대상〉, 충청문학상 본상(2008), 저서《나일강의 꽃》, 《The Prevalence of the 'Active Learning' Teaching Methods in Education》, 《여성 우울증과 가족치료》, 《Teaching Methods in Active Learning》, 《가족치료와 우울증》, 《다문화교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