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의 부활이라도 보러 나온 것처럼 관객들의 표정은 사뭇 숙연했다. 어쩌면 고통 받은 영혼에게서 위로받고 싶어 하는지 모른다. 각자 처한 고통은 어떠한 말로도 표현하기 어렵다. 아파본 사람만이 아픔을 안다는 말이 그냥 나온 말은 아닐테지. 광해도 고통 없는 세상을 꿈꾸었을 것이다. 그도 인간이었기에."
광해, 바다를 건너다 - 홍은자
죽은 사람이 살아 돌아오기라도 했나. 좌석 없는 사람은 나가달라는 안내방송이 쩌렁쩌렁 고막을 파고든다. 좌석번호를 받은 것이 복권에라도 당첨된 기분이다. 창작음악극 <광해, 빛의 바다로 가다>가 세상에 드러나는 순간이다. 대체 광해가 어쨌단 말인가.
제주 출신 성악가들이 꾸미는 무대다. 오케스트라 반주에 테너와 소프라노의 음률이 어울리며 관객을 사로잡는다. 광해, 개똥이, 인목왕후, 무녀, 왕궁의 지붕에서 조선왕조를 지켜보고 있는 상상의 존재 어처구니들까지 각자의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간간이 해금과 오북을 두드리는 소리는 영혼을 위로하는 듯하고 시대의상은 조화롭다.
음악과 안무와 대사가 어우러지는 가운데 나는 어느새 타임머신을 타고 광해시대로 들어가 있다. 광해는 임진왜란 때 난세를 극복하기 위해 격전장을 누비며 백성들과 함께 호흡하니 신망은 두터웠다. 사람들은 그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아마도 유교윤리에 저촉되는 폐모살제廢母殺弟의 약점으로 왕위에서 쫓겨난 임금이라는 정도로 알고 있을 것이다.
선조의 갑작스런 붕어로 왕위에 올라 명·청 사이에 실리외교를 펼치는 현명함을 보였던 광해. 그는 임진왜란을 거치며 전쟁의 쓰라림을 잘 아는 군주였다. 개혁을 실현하던 그가 죄인의 신분이 되어 귀양을 가게 될 줄이야. 권력을 가지려는 세력 사이에서 희생양이 되어버린 비운의 왕. 위협세력을 제거해야 된다고 몰아붙이는 반대세력에 의해 그의 추락은 이미 예고된 운명이었으리라.
여기가 어디냐고 사공에게 물었을 때에야 제주도에 닿았다는 것을 알고 절망하는 유배인 광해의 모습을 상상해 본다. 폭포수 같은 피눈물을 쏟아낸들 이미 정해진 운명처럼 다가온 현실을 어찌하겠는가. 이형상의 ≪남환박물≫을 통해 당시의 입도 상황을 알 수 있다. 구좌읍 평대리 어등포로 들어와 다음날 제주성안에 도착, 가시울타리를 두른 후 나인 두 명과 함께 가두어 자물쇠로 잠그고 속오군 삼십 명이 배치되었다. 유배인을 얼마나 엄격하게 다루었는지 안 봐도 뻔하다. 견디기 힘든 유배생활의 고통을 오로지 시 한 수로 풀어내고 있었나 보다.
風吹飛雨過成頭 바람이 불고 비가 날려서 성 앞을 스쳐가니
瘡氣薰陰百尺樓 창기는 음산하게 높은 다락 감싸도네
滄海怒濤來薄暮 창해의 성난 파도소리 어스름에 들려오니
碧山愁色帶淸秋 벽산의 수심은 맑은 가을을 물들였네
歸心壓見王孫草 귀심은 왕손초를 볼 적마다 괴로워지니
客夢頻驚帝子洲 귀양살이 꿈속에서도 서울을 보고 놀라네
故國存亡消息斷 고국의 존망소식도 알길 없으니
烟波江上臥孤舟 연파의 강물 위 외로운 배에서 쉬어나 볼까.*
-<濟州謫中> 광해군
조선 15대 임금 광해의 목숨은 푹푹 찌는 더운 여름날 가시울타리 안에서 끊어지고 말았다. 적소謫所를 십여 년 넘게 떠돌다 제주로 이배된 지 4년 만에 생을 내려놓은 것이다. 죽음을 알리는 나인의 통곡소리에 제주 삼읍의 수령이 모여 사흘을 의논한 후에야 잠겼던 문이 열렸다. 왕명을 받고 내려온 예조참의는 가시울타리를 치우고 호상을 입혀 빈소를 제주목관아 앞 관덕정으로 옮겼다.
광해에겐 주검이 되어 떠나는 뱃길조차 순탄치 않았다. 절해고도에서 속울음을 울었던 한은 혼령이 되어 변방을 지키고 싶었던지 출항했던 배가 돌아온 것이다. 사흘을 기다려 다시 떠난 것은 그가 죽은 지 오십 여 일 만이었다. 바닷길은 얼마나 먼가. 뜨거운 여름에 양주까지 걸어 가야하는 육지 길은 또 어떻고.
그가 어떤 군주였는지 되짚어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지 싶다. 백성을 전장으로 내몰지 않으려고 실리외교를 펼침은 물론 병으로부터도 구하고자 했던 것에서 왕의 위대함이 엿보인다. 과연 허준의 ≪동의보감≫은 그 증거라 할 만하다. 몇 백 년 전, 의료문제를 해결하여 ‘국민행복’ 시대를 열겠다는 군주가 있었으니 감탄할 일이 아닌가. 역사에서 배운다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을 두고 하는 말이겠다.
오랫동안 사경을 헤매는 중환자가 있어 파탄지경에 이르면 숨이 막힌다. 산더미처럼 쌓여가는 의료비가 가시울타리처럼 숨통을 조여 오는데 어찌 숨을 쉴 수 있으리. 어쩌면 광해도 병석에서 백성의 고통을 더욱 애통해하며 눈물을 흘렸을지 모른다. 지켜보는 자 없는 가운데 생을 내려놓던 마지막 순간까지.
새삼 그를 조명하기 위해 창작품이 나오고 사람들이 반응을 보이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왕의 부활이라도 보러 나온 것처럼 관객들의 표정은 사뭇 숙연했다. 어쩌면 고통 받은 영혼에게서 위로받고 싶어 하는지 모른다. 각자 처한 고통은 어떠한 말로도 표현하기 어렵다. 아파본 사람만이 아픔을 안다는 말이 그냥 나온 말은 아닐테지. 광해도 고통 없는 세상을 꿈꾸었을 것이다. 그도 인간이었기에.
* 김찬흡, 제주문화원, ≪濟州史人名事典≫, 2002년.
홍은자 -------------------------------------------
≪수필과비평≫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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