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수필과 비평/수필과비평 신인상 수상작

[수필과비평 2013년 9월호, 143호 신인상당선작] 자연바람 - 지상은

신아미디어 2013. 9. 23. 08:44

"추억은 아름답다고 했던가. 아파트 거실에 앉아서 어릴 적의 대문간에 앉아있다는 착각을 하며 자연바람을 맞이한다. 내 추억을 위하느라고 그러는지 일편단심으로 찾아 온 것 같은 자연바람의 숨소리가 나를 감동하게 한다. 많은 세월이 흘렀음에도 자연바람의 감미로움은 여전히 등과 이마를 시원하게 한다. 물질만능의 시간 속에 살지만 점점 힘들어지는 게 많다. 이상기후 변화에 적응되지 않아 힘들어하고, 자연적으로 해결될 것들에 돈으로 해결해야 옳은 것인 줄 아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져 힘들 때가 가끔 있다."

 

 

 

 


 자연바람     -  지상은


   여름은 유난히 시끄럽다. 폭염주의보에서 경보로 일기예보가 마음을 무겁게 한다. 퇴근 후 샤워하고 대자리에 앉아 있으면 더위를 잊게 되지만, 집을 떠나 생활하는 아들딸이 어떻게 이 여름을 견디는가 걱정된다.
   우리 집에는 베란다 창문만 열면 찾아오는 자연바람 덕에 에어컨도 선풍기도 필요하지 않다. 자연바람과 함께 놀고 있는 몇 그루 나뭇가지를 바라보면 어렸을 적 여름이 다가온다. 전기도 제대로 들어오지 않던 시절이다. 에어컨은 물론이지만, 선풍기도 없던 시절 부채바람으로 여름을 보냈다.
   해 질 무렵 시골 마당에는 모깃불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때마침 불어오는 자연 바람은 집 나갔다 돌아온 아들딸마냥 반갑고 고마웠다. 뜨거운 햇볕을 받으며 콩밭과 논에 김을 매던 어른들은 흘러내리는 땀을 말리려 평상에 털썩 주저앉는다. 아이들은 모깃불 주위를 뱅뱅 돌며 뛰놀고, 어른들은 창호지 바른 부채를 찾아들고 여름을 밀어낸다. 모깃불이 피다 꺼지는 순간이면 투정을 부리기도 하고 부채로 불을 피우려 애를 쓴다. 여름밤은 늘 시끄럽게 무르익어갔다.
   장식품처럼 거실 한 모퉁이에 세워두는 그 흔한 에어컨이 우리 집에는 없다. 선풍기도 자연의 바람에 모든 기를 빼앗기고 멀뚱하게 쉬고 있다. 여름이 다가오면 장식품일지라도 에어컨을 사야지 하다가 자연바람이 베란다를 타고 흔들어 대는 유혹을 즐기며 그럭저럭 십 년째 살고 있다.
   매년 시누님들이 모이는 집안행사 때는 에어컨이 절대적 필수품처럼 느껴졌다. 그럴 때마다 다음 해는 꼭 준비해 불편함을 줄이겠다고 다짐했었다. 그러나 솔솔 불어오는 자연바람에 묻혀 에어컨 생각은 또 지나가고 만다.
   그런데 집을 떠나 생활하는 아들딸이 번갈아 휴가를 받아오기도 하지만, 예전 같지 않은 여름 무더위에 에어컨을 꼭 사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전자마켓을 찾았다. 아우성이다. 연일 구매하려는 손님이 많아 설치하려면 보름을 기다려야 한다고 엄포를 놓듯이 말했다. 에어컨을 판매하기에 혈안일 뿐 친절은 뒷전이다. 물건이 없어 못 파니 사려면 사고, 가려면 가라는 투에 가까운 직원의 태도가 조금은 서운하게 느껴졌다. 보름 후에 설치된다는 에어컨은 별 의미가 없을 것 같았다. 여름이 시들해진 후 설치가 가능하다면 올해도 구매할 이유가 없다. 보름 후면 아이들 휴가도 끝나고 시누님들이 모이는 집안행사도 끝난다. 남편과 단둘이 살면서 에어컨을 켤 일이 전혀 없다. 고마운 자연 바람이 창문만 열면 음악처럼 솔솔 달콤하게 들어오지 않는가.
   직장에서 에어컨이나 선풍기를 유난히 켜려고 하는 사람이 있다. 조금만 움직여도 땀이 난다며 전기가 만드는 바람을 찾는다. 한 잔의 커피를 습관처럼 마시듯 에어컨이고 선풍기고 무조건 켠다. 집에 에어컨이 없다고 말하면 현대문명의 혜택을 외면하는 이방인처럼 바라보는 사람들이 많지만, 도심 속 아파트단지 안으로 시원한 골목바람이 지나간다는 것을 말하는 사람은 없다. 골목바람이 어떻게 생겼는지 그 맛을 알고 즐기는 사람도 그다지 흔하지 않다.
   어린 시절, 장마가 끝나고 무더운 여름날이면 뙤약볕이 내리쬐는 마당에 긴 덕석을 펴고 갓 수확한 보리를 말리는 게 일이었다. 고무래로 골고루 펴진 보리를 뒤적거릴 적에는 땀이 줄줄 흐른다. 맨발로 보리 사이를 돌며 타원형 보리이랑을 멍석 위에 지어 놓고 그늘을 찾아 들어서곤 했다. 주로 처마 밑 그늘이었지만 우리 집에는 대문간 그늘이 있어 좋았다. 여름밤이면 마당을 지키던 평상이 낮이면 대문간에서 손님을 맞이하고 있었다. 그 평상 위에는 늘 시원한 골바람이 지나갔다. 땀이 줄줄 흐르다가도 평상에만 앉으면 땀은 더위에 자취를 감추었다.
   학교에서는 담임선생님이 집에 라디오 있는 사람, 시계 있는 집, 목욕탕 있는 사람, 재봉틀 있는 집은 손을 들어보라고 했다. 가정환경 조사였다. 나도 손을 번쩍 들었다. 그러나 가장 오래 기억에 남은 것은 대문간에 수시로 찾아와 이마며 등을 시원하게 적시던 자연바람이었다.
   추억은 아름답다고 했던가. 아파트 거실에 앉아서 어릴 적의 대문간에 앉아있다는 착각을 하며 자연바람을 맞이한다. 내 추억을 위하느라고 그러는지 일편단심으로 찾아 온 것 같은 자연바람의 숨소리가 나를 감동하게 한다. 많은 세월이 흘렀음에도 자연바람의 감미로움은 여전히 등과 이마를 시원하게 한다.
   물질만능의 시간 속에 살지만 점점 힘들어지는 게 많다. 이상기후 변화에 적응되지 않아 힘들어하고, 자연적으로 해결될 것들에 돈으로 해결해야 옳은 것인 줄 아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져 힘들 때가 가끔 있다.
   밖에 나서면 지하철이든 버스 안이든 에어컨바람 세상이다. 에어컨바람에 젖어 살다보면 잠깐의 더위도 참지 못한다. 버스 안에 잠깐 에어컨이 멎는가 했더니 습관처럼 떠드는 소리가 에어컨을 켜라는 고함들이다. 잠깐이라도 에어컨이 꺼지면 무슨 일이 일어 난 것처럼 사람들은 입을 모아 아우성이다.
   여름은 여름답게 더워야 참다운 여름이다. 겨울은 또 어떻고. 겨울이 겨울답지 못하면 사람들은 금방 또 무슨 난리라도 터진 듯 마음으로 우왕좌왕할 것이다. 아파트 생활에서 시원한 자연바람과 함께 여름을 날 수 있다니 이 또한 큰 행운이다. 에어컨을 대신한 자연바람과 마주앉아 수박 한 덩이나마 쪼개고 싶다.

 

 

지상은  ------------------------------------------
   본명: 지순옥,  여성 ‘숲’ 동인. 요양복지원 근무.

 


당선소감


   백지위에 무심코 갈겨 둔 것이 뜻밖에 마음을 달래고 또 다독거려주는 형태로 자라는 것을 발견하고 뿌듯했던 지난날을 돌아봅니다. 때로는 꿈틀거리는 내용이지만, 글을 씀으로 예사롭게 보고 느끼던 사물의 감정을 다듬고 풀어내며 이해하려는 나를 돌아보곤 행복했습니다. 만나면 함께 웃어주고 꼬집어주는 동인들 덕분에 바람이 지나가는 소리를 듣고 고마워 할 줄 아는 지혜를 터득하게도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마음까지 배우고 익히게 되었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이 빛나고 고마운 날입니다. 내 자신과 마주하는 순간들을 좀 더 치밀하고 정답게 엮어 갈수 있는 길을 터득하게 해 주신 동아리 동료들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기쁜 마음과 고마운 맘을 가슴속 깊이 간직하며 더욱 더 노력하는 수필가로 살겠습니다. 수필과비평사에 깊은 감사드립니다. 또한 글을 가려주신 심사위원님께도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