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이 뻣뻣하게 굳은 라온은 왼손으로 붓을 어렵게 잡아 오른손에 넣어 손가락을 꾹꾹 똑딱단추 눌러 끼우듯이 억지로 눌러 잡게 하여 한 동안 적응을 한 후에야 붓글씨 쓰기 준비가 끝난다. 글은 고사하고 가늘게 긋기와 굵게 긋기도 어려우련만 그의 열정이 장애를 넘어서고 여유를 부리고 있었다. 주어진 서재를 받아쓰다 잠시 덮어두고 어머니, 형님, 동생 등 식구들을 몰래 써 보다가 내가 보면 멋쩍게 미소 지으며 슬며시 화선지를 감추던 숫기 없는 소년 같은 라온. 아마 멋지게 붓글씨를 써서 제일 먼저 자랑하고 싶은 이들이 가족이었지 않나 싶다."
라온의 미소 - 양재봉
“써~언!”
큰 외마디소리에 모든 시선이 소리 나는 쪽으로 향했다. 목발에 힘겹게 몸을 걸치고 벙긋거리며 나보고 와 달라는 손짓을 하고 있다. 다가간 내게 자랑스럽게 화선지를 내민다.
‘ㄹ’ 자음이 제법 반듯하게 쓰여 있다. 한 달 만에 써낸 자음 한 톨. 조용하던 서실이 왁자지껄하다. 절뚝거리며 힘겨운 걸음으로 다가와 축하해주는 찬돐, 힘든 몸을 일으켜 박수쳐 주는 샘밑, 글벗들 모두 라온 주위에 모여들었다. 좋아서 벌어진 입 때문에 균형이 더 안 맞는 라온의 볼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몇 년 전 봄, 동부지역 장애인 복지관에서 15명의 장애인들에게 서예지도를 해 달라는 전화를 받고 흔쾌히 수락을 하였다. 장애인들과 만남은 그렇게 시작됐다.
신체의 부자유스러움 때문에 일반인과는 다름이 있으리라고 예상했지만 난감한 상황은 하루에도 몇 번씩 벌어지곤 했다. 도우미가 잠시라도 자리를 비우면 안 되는 사람, 중증 하반신 마비로 부자유스럽다 못해 반쯤 누운 자세로 붓 끝에 온 정신을 쏟는 샘밑, 그들을 보면서 안타까운 마음 너머 무의식적으로 손에 힘을 주며 용을 쓰고 있는 나를 보기도 했다.
지금에야 생각해 보니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런 와중에서도 집중력이 좋아 실력이 급상승하는 이도 있지만, 어느 날 라온은 배우고자 하는 열성과 미소 띠던 얼굴은 서서히 굳어가기 시작하면서 도저히 안 된다며 붓을 던져버리기까지 했다.
누구나 처음에는 힘든 것이라며 진정시키기를 여러 번. 시간이 흐르면서 힘들어 포기하려는 사람들이 있을 즈음 “써~언~.”(선생님이란 발음이 잘 안 나와 나를 그렇게 불렀다) 하며 목소리 높여 그가 나를 부른 것이다. 웃음꽃 속에 서실은 기쁨이 넘쳐흘렀다.
복지관, 장애협회, 도서관의 따뜻한 보살핌에 힘을 얻으며, 이왕 시작한 것 열심히 연마하여 전시회도 열어 보자고 다독이며 찬돐, 해미, 갈모, 토리, 샘밑, 라온, 한울, 누리, 아람, 아름 등 본인에게 의미가 있는 아름다운 순 우리말을 찾아 호도 지어 주었다.
라온은 몇 년이 지난 지금도 내 기억에 생생하게 남아 있다. 자기도 추스르기 어려운 중증 장애의 몸이면서도 서예도구나 그에 필요한 집기 등을 동료가 편히 사용할 수 있도록 챙기고 배려하는 모습이 자주 보여 정감이 가는 친구였다. 나이는 40쯤 되었는데 뇌성마비 장애로 인해 신체의 부자유스러움은 물론 말도 잘 못했다.
홀로 서 있는 것조차도 어려워 항상 목발을 의지해야 하면서도 남의 도움을 꺼려하던 라온. 목발 한쪽만 놓쳐도 밑동 잘린 나무 등걸같이 온몸이 바닥에 나뒹굴기를 곧잘 했다. 걱정되어 달려가 일으켜 세워 주려하면 손사래 치며 거절하고 씨~익 한번 웃고는 혼자 힘으로 일어서곤 했다.
손이 뻣뻣하게 굳은 라온은 왼손으로 붓을 어렵게 잡아 오른손에 넣어 손가락을 꾹꾹 똑딱단추 눌러 끼우듯이 억지로 눌러 잡게 하여 한 동안 적응을 한 후에야 붓글씨 쓰기 준비가 끝난다. 글은 고사하고 가늘게 긋기와 굵게 긋기도 어려우련만 그의 열정이 장애를 넘어서고 여유를 부리고 있었다. 주어진 서재를 받아쓰다 잠시 덮어두고 어머니, 형님, 동생 등 식구들을 몰래 써 보다가 내가 보면 멋쩍게 미소 지으며 슬며시 화선지를 감추던 숫기 없는 소년 같은 라온. 아마 멋지게 붓글씨를 써서 제일 먼저 자랑하고 싶은 이들이 가족이었지 않나 싶다.
그해 겨울 도서관서예교실, 초등학교 서예반원들과 장애우와 도우미들이 함께하는, 꿈에 그리던 제1회 환경사랑서예전시회를 열게 됐다.
라온의 작품인 <섬 바라기> <풀숲 속엔 아름다운 소리>에선 혼신의 힘이 깃들어 있었고 같이했던 동료들은 물론 지켜보며 격려하던 이들의 가슴속에 ‘하면 된다.’는 생각을 심어줬다. 전시회 기간 동안 그는 자신이 쓴 작품을 감상하는 사람들을 보며 살며시 미소짓다 눈길에 목발 흔적을 남기며 돌아가곤 했다.
나는 그 웃음을 훔쳐보면서 한겨울 혹한에도 열정을 간직하고 피는 동백꽃을 떠올렸다. 세찬 눈보라 속 역경에도 피는 동백꽃, 불편한 몸으로 40여 년이란 세월을 감내하며 남다른 삶을 살고 있는 라온과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신문 방송에도 보도되고 기사화되자 인간 승리라 할 수 있는 라온의 작품과 장애인들의 작품을 보러 오는 관람객들로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전시회가 성황을 이룬 것. 전시장의 육십여 작품 한편 한편이 모두 소중했지만, 어떤 작품도 감히 그의 작품보다 앞서려 하거나 뽐내려는 작품은 없었다.
라온의 나무엔 한 송이 붉은 꽃이 고난을 삭히고 아름답게 피어오르고 있다.
양재봉 ----------------------------------------------
(현) 서예가(초대작가). 조천도서관, 제주시청, 조천교(서예, 한문교실 강사). (현) 환경운동가(환경교육지도자). 미생물 연구가. (전) 장애인 복지관, 지적장애인주간보호시설 서예지도.
당선소감
세상과 단절된 것 같은 지하 서실에서 습작을 하다가 당선소식을 들었습니다.
소년 시절부터 갈망해 오던 문학도의 길이 비로소 시작되나 봅니다. 꿈만 같습니다.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하는 철모르는 강아지처럼 기쁘기만 합니다.
많은 조언과 함께 저를 이끌어주신 문우님들 얼굴이 떠오릅니다. 짧았던 인연, 이제 가장 길게 이어가야할 머나먼 길을 같이 걸으며 문학이라는 깊은 인연으로 덕도 쌓고자 합니다.
심사위원님, 부끄럽고 부족한 글 뽑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 글을 써야 한다는 중압감도 있지만 ‘성숙한 마음을 담은 좋은 수필 창작에 노력 하겠습니다.’라는 약속으로 고마움을 대신합니다.
많은 글감을 만들어 주는 사랑하는 아내, 군 제대를 하고도 개구쟁이로 남아있는 아들, 다 컸는데도 너무 귀여워서 저를 바보로 만들어버리는 딸과 함께 이 기쁨을 같이 하고 싶습니다.
'월간 수필과 비평 > 수필과비평 신인상 수상작' 카테고리의 다른 글
[수필과비평 2013년 9월호, 143호 신인상당선작] 자연바람 - 지상은 (0) | 2013.09.23 |
---|---|
[수필과비평 2013년 9월호, 143호 신인상수상작] 슈퍼 달과 곰 인형 - 유정혜 (0) | 2013.09.23 |
[수필과비평 2013년 8월호, 제142호 신인상수상작] 그때는 그러했다-은빛 인어 - 황국자 (0) | 2013.08.07 |
[수필과비평 2013년 8월호, 제142호 신인상수상작] 둥지 - 양희용 (0) | 2013.08.07 |
[수필과비평 2013년 8월호, 제142호 신인상 수상작] 골목의 매력 - 고유진 (0) | 2013.08.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