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수가 빠져나간 두부가 순백을 유지하여 몸에 좋은 신선한 맛을 내듯이 나의 앞날에도 지난 세월의 묵은 찌꺼기가 빠져 나가야 새로운 삶의 세계가 열림을 자각한다. 그동안 직장생활에서 밴 사고와 타성을 지우는 일은 내게 당장 주어진 일이다. 이 일이 마무리되는 날 사회는 나를 안전식품처럼 신뢰하고 안아주리라 믿는다."
간수 - 서용태
“두부는 그냥 드시면 안 되고, 반드시 찬물에 삼십 분 이상 담가 두었다 먹어야 합니다. 보기에는 아무것도 나올 것 같지 않지만, 나중에 보면 노란 물빛이 보일 거예요. 그게 두부의 간숩니다. 이 간수를 빼지 않고 드시면 심혈관에 좋지 않습니다.”
어느 유명 인사의 강연 중, 이 대목에 오랫동안 생각이 머문다. 두부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간수가 필요하다. 콩의 단백질 성분을 엉키게 하는 유일한 물질이기 때문이다. 육안으로는 두부에 밴 간수를 식별해 낼 수 없다. 두부를 민물에 담가 두면 간수가 노란 빛을 띠면서 우러 나온다. 비로소 안전한 식품이 된다는 말이다.
직장에서 물러나 집에서 일 년간 사회적응 기간을 갖는 중이다. 어떻게 하는 것이 빠른 적응인지는 오로지 나의 몫이다. 누가 가르쳐주지도, 도와주지도 않는 일인 것이다. 사십 년 가까운 세월을 직장이라는 틀에 매여 살았다. 거기에는 직장 윤리가 있고, 질서가 있다. 내 몸이지만 내 뜻대로 할 수 없는 상황이 직장의 조직문화다. 겉보기에는 그럴 듯하지만 자유분방한 사고로는 감내하기 힘든 곳이다. 물에 불은 콩이 맷돌에 갈리 듯, 그렇게 몇 년을 지내다보면 어느새 하얀 두부 같은 직장인이 된다.
직장인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두부처럼 만들어지는 것이다. 몸속에는 두부의 간수 같은 조직 문화를 가득 머금은 채 말이다. 직장에는 상하의 위계질서가 있고, 공동으로 지향하는 목표가 있다. 그리고 자신에게 주어진 고유의 임무가 있다. 그 시기를 놓치지 않고 완수해야만 하기 때문에 긴장 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내야 한다. 어느 날, 문득 이런 생각도 드는 것이다. 내 자신이 일하는 기계로 전락한 것은 아닌지, 스스로 회의를 느낄 때가 많다. 이런 문화에 몸과 마음이 절여지고 익숙해지면 사무적인 사람으로 변해간다. 직위의 상승에 따라 권위도 배고, 제도와 지침, 지시에 익숙하다 보면 융통성이 약화되기도 한다. 그렇지만 자신은 그 변화를 모르고 산다.
오 년여 세월 동안 글쓰기 수련을 하면서 경험한 일이다. 문장 속에도, 표현력에도 그게 깊숙이 배어 있었던지, 같이 공부하는 문우들로부터 자주 충고를 받기도 했다. 그로부터 상당한 노력을 기울인 끝에 지금은 적어도 이 부분은 자신을 갖게 되었다. 하지만 결코 우려내는 데 쉽지 않은 간수가 내면에 크게 자리 잡고 있음을 안다.
현직에 있을 때나, 지금이나 별로 달라진 게 없다 싶은 것 한 가지가 있다. 상대가 가족이건 모임의 회원이건 가리지 않고 일어나는 본능과도 같은 조급증이 그것이다. 어떤 임무가 주어질 때, 신속하게 움직이지 않으면 심사가 틀리니 말이다. 여기에는 내 자신도 예외가 될 수 없다. 일처리를 미루거나 지체되기라도 하면 중요한 소지품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마음이 안정되지 못하고 흔들리는 것이다. 좀 더 느긋하게 생각하고, 한 발 물러나서 대상을 바라보는 여유가 필요하다는 것쯤은 알면서도 그게 생각처럼 되지 않는다. 신속한 업무처리는 남들로부터 인정받는 지름길이다. 이런 환경에서 오랜 세월, 차곡차곡 쌓인 조급한 행동이 습관으로 굳어버린 탓일 게다.
지난한 세월 동안 맷돌에 잘게 갈려 생긴 콩국은 가마솥에 들어가 또 끓여진다. 여기에 간수가 밴 사람이 내 자신인 것이다. 이제 그런 사람으로 살던 시절을 모두 털어내고 새로운 삶을 준비해야만 한다. 자연인으로 살아야 하는 내 앞길에 걸림돌이 되는 게 무엇일까. 바로 몸속의 그 간수를 모두 우려내는 일임을 느끼는 순간, 한줄기 빛이 보였다.
간수가 빠져나간 두부가 순백을 유지하여 몸에 좋은 신선한 맛을 내듯이 나의 앞날에도 지난 세월의 묵은 찌꺼기가 빠져 나가야 새로운 삶의 세계가 열림을 자각한다. 그동안 직장생활에서 밴 사고와 타성을 지우는 일은 내게 당장 주어진 일이다. 이 일이 마무리되는 날 사회는 나를 안전식품처럼 신뢰하고 안아주리라 믿는다.
서용태 -----------------------------------------
≪수필과비평≫ 등단. 수필집: ≪덧셈과 뺄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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