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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과비평 2013년 7월호, 다시 읽는 이달의 문제작 작품폰] 기억하기와 글쓰기 - 송명희

신아미디어 2013. 9. 3. 08:10

" 수필은 근본적으로 작가의 체험과 기억이 토대가 된 자전적 글쓰기의 양식이다. 그리고 글쓰기란 감정의 표출을 통한 카타르시스가 이루어지는 과정이며, 과거의 상처와 억압된 기억을 떠올려 의식화함으로써 상처를 치유하게 만드는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 작가의 자전적 글쓰기는 작가 자신의 과거의 상처와 억압된 기억의 재현이며, 의식화와 치유의 과정인 것이다."

 

 

 

 

 

 기억하기와 글쓰기    송명희


  1. 기억과 망각, 그리고 자전적 글쓰기


   인간은 기억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는 동시에 망각하는 기능도 가지고 있다. 어떤 기억은 너무나 고통스러워 잊게 되는가 하면 또 어떤 기억은 너무 고통스러워서 잊고 싶어도 잊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인간은 자신에게 불리한 기억이나 충격적인 과거의 일로부터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뇌의 깊은 곳으로 기억을 이동시키는 무의식적 망각이 일어나기도 한다. 그래서 인간을 망각의 동물이라 부르기도 하는 것이다. 따라서 기억과 망각은 서로 짝이 되는 개념이다.
   더구나 인간의 삶에서 자신과 관련된 자서전적 기억은 삶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인간은 자신이 경험한 사건을 겪은 그대로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 경험을 취사선택하면서 거기에다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 자신에 관한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박완서는 그의 자전적 소설인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의 서문에서 창작과정에서 기억의 취사선택이 불가피했거니와 단편적인 기억과 기억들 사이를 자연스럽게 이어주기 위해서는 상상력의 연결고리가 필요했다고 고백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기억의 불확실성에 대해서도 언급하면서, 기억이란 것도 결국 각자의 상상력일 따름이라고 말한다. 즉 아무리 자전적 글쓰기라고 하더라도 온전한 기억의 재현은 불가능하며, 상상적이고 허구적인 글쓰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는 뜻이다.
   ≪자서전의 규약≫을 쓴 필립 르죈(Philppe Lejeune)도 자서전이 기억의 문제, 인격 형성의 문제, 자기분석의 문제 등 광범위한 여러 문제와 연관되어 있다는 점에서 심리학적 연구가 가능할 것이라는 견해를 피력한 바 있다. 그는 자서전을 읽는 독자가 정신분석학에서 귀중한 도움을 얻을 수 있는 이유가, 그 이론이 한 개인을 그 역사와 유년기의 체험을 통해 설명해 주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보다는 정신분석학이 개인의 역사를 그의 담론(discours) 속에서 파악하며, 그때 언술행위가 바로 그의 탐구(또한 그 치료의) 자리가 되기 때문이라고 했다.
   수필은 근본적으로 작가의 체험과 기억이 토대가 된 자전적 글쓰기의 양식이다. 그리고 글쓰기란 감정의 표출을 통한 카타르시스가 이루어지는 과정이며, 과거의 상처와 억압된 기억을 떠올려 의식화함으로써 상처를 치유하게 만드는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 작가의 자전적 글쓰기는 작가 자신의 과거의 상처와 억압된 기억의 재현이며, 의식화와 치유의 과정인 것이다.


2. 가부장적 성차별의 기억, 그리고 화해-김광영의 <섬>


   김광영의 <섬>이라는 수필은 아버지의 가부장적 성차별주의로 인해 자신이 받았던 트라우마(trauma)를 다시 불러내는 회상의 글쓰기가 이루어지고 있다. 즉 능동적인 기억하기를 통해 작가는 상처가 되었던 과거의 기억을 지우며 새로운 자아로 거듭나기를 시도하고 있다.

 

   그녀의 유년을 돌이켜보면 노인으로부터 자상한 말 한마디, 따뜻한 손 한 번 잡혀 본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하지 마라, 안 된다, 나쁜 짓이다, 등등의 훈계만이 다 자랄 때까지 못이 박히도록 이어졌다. 철조망 같은 울타리에 갇혀 언제나 자유를 찾아 훨훨 날고 싶었고, 때론 노인의 굴레를 벗어나고 싶은 게 꿈이기도 했다. 바르게 키우려는 의도였겠지만 제재가 심하면 정이 떨어진다는 걸 노인은 몰랐다. 하물며 핏줄도 그러한데 타인이야 오죽했으랴.

 

   어릴 때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육친의 따뜻한 정이 그리웠던 딸에게 오로지 규제로 일관했던 아버지의 엄격한 훈육은 그녀에게 깊은 마음의 상처로 남아 있다. 뿐만 아니라 성장한 다음에도 이복 남동생들에게만 전답을 죄다 물려주고 그녀에게 아무런 상속을 하지 않은 아버지가 그녀는 그저 야속하기만 해 외면하고 싶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전략) 더더구나 어릴 때 어머니가 돌아가신 딸은 아버지에 대한 애틋한 정이 별로 없었다. 이복남동생 네 명에게 전답을 죄다 물려주고 그녀에겐 따비밭 한 자락도 물려주지 않는 게 못내 서운해서다. 스물아홉에 세상을 뜬 아내의 한 점 혈육에게 그렇게 냉정할 수 있을까 해서 친정걸음을 그만두려고 작심도 여러 번 했었다.
   언젠가 그녀가 아버지와 단둘이 있는 시간에 딸에게도 상속을 좀 달라고 헸더니 일언지하에 “나는, 출가외인에게  상속 주는 법은 인정 못하다.” 쐐기를 박으셨다.
   그럼 아들이 허방에 날린 전답은 아깝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애비가 번 돈을 자식이 좀 쓰면 어떻노.” 그런 대답이 돌아왔었다. 그런저런 차별대우로 노인께 굳이 보청기를 해드릴 마음이 딸에겐 내키지 않았다. 그녀의 작은 동생들 역시 상속을 큰형의 지분만큼 물려받지 못했다고 번갈아가며 투덜댔다.

 

   가부장적 성차별주의로 인해 딸 대신 아들, 아들 중에서도 장자 우선주의로 일관했던 아버지는 생전에 그로 인해 아들과 딸로부터 결국 외면을 당하게 된다. 귀가 들리지 않는 아버지에게 아들과 딸은 상속을 많이 받은 장남에게 보청기 사드리는 일을 미루고 사주지 않으며, 겨울철 한파가 기승을 부려도 아버지를 위해 털 점퍼를 사드리지 않는다. 그래서 찾아오는 자식도, 벗도 없이 노년을 섬처럼 외롭게 사셨던 아버지가 안타까워 딸은 결국 방한화와 깃털점퍼를 사드린다. 작품 속의 부자관계에서 제삼자가 객관적으로 보게 되는 또 다른 측면은 혈연관계마저 철저한 기브앤테이크(give & take)에 지배되어 받은 만큼만 주겠다는 요즘의 계산적인 세태이다. 아마 이 점에 대해 김광영은 가슴이 많이 아팠을 것이다.

 

   노인이 섬이 된 건 청각을 잃은 탓도 있지만 고루한 성품 탓이 더 크다. 서양문물은 모두 싫고 흘러간 조선시대의 관습만 고집하셨다. 그래서 늘 고독했다.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풍습과 관행은 아버지의 유산이기도 했다. 재물유산은 천수답 서마지기를 받았지만 정신적인 유산은 노적가리만큼 받은 분이었다.
   자식들에게 재산을 차별 없이 나누어주고, 변해가는 시대풍조를 받아들였더라면 저렇게 소외되진 않았을 텐데……. 그녀가 자랄 때도 조선시대 말기의 생활을 고집하다 보니 별나다고 호가 났었다. 보이지 않는 전파가 번개같이 날아다니는 소통만능 시대에 당신만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노인이 가엾고 딱하기 이를 데 없었다.

 

   김광영의 수필 <섬>에서 ‘섬’이란 일종의 상징이다. 섬은 혈육이라는 네트워크로부터도 소외된 존재인 아버지를 상징한다. 그 소외는 아버지의 고루하기 만한 가부장적 성차별주의와 장자 우선주의가 자초했다. 게다가 지나치게 엄격했던 개인적 성품으로 주위 사람들에게 곁을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자식들로부터 소외된 것은 물론이거니와 집안 친척들에게 여러 도움을 주었으면서도 정작 그 자신은 절해고도의 외로운 섬처럼 털복숭이 개 한 마리에 의지하여 고독하고 소외된 노년을 살다 세상을 떠났다.
   김광영은 아버지의 외로운 삶이 개인적 성품도 성품이려니와 새로운 시대풍조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선대의 풍습과 관행에 사로잡혀 자신만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데서 기인한 것으로 이해한다. 호미 바바(H. Bhabha)는 기억하기는 결코 자기반성이나 회고와 같은 정태적 행위가 아니다. 그것은 현재의 외상을 이해하기 위해 조각난 과거를 짜 맞추어 보는 것, 고통스러운 다시 떠올림이라고 했던 말을 상기시킨다. 김광영의 기억하기는 바로 현재 그녀를 지배하고 있는 트라우마를 이해하기 위한 고통스런 떠올림이라고 할 수 있다.
   어쨌든 김광영은 자전적 글쓰기의 주관성을 벗어나기 위해 실제작가인 그녀 자신을 ‘딸’이라는 객관적 호명으로, 그녀의 아버지는 ‘노인’으로 호명함으로써 보다 객관적인 공감대를 불러일으킨다. 그로 인해 가부장적 성차별주의로부터 상처를 받았던 세상의 모든 딸들에게 상처의 흔적을 지우는 능동적 망각을 통해 화해를 하라고 말을 걸고 있는 듯하다. 원망스러우면서도 육친이기에 미워할 수만은 없었던 애증의 복합감정과 이제는 미워할 대상마저 세상을 뜨고 말았으므로 다만 가엾고 딱하게 여기는 연민의 감정에 사로잡혀 있는 작가의 애틋한 마음이 독자에게 진솔하게 전해진다.


3. 후각과 기억-김상환의 <발효>


   인간은 다섯 가지의 감각, 즉 시각, 청각, 미각, 촉각, 후각 등 오감을 통해 세상을 감각적으로 인지하고 경험하며 살아간다. 우리는 쉴 새 없는 오감의 자극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눈으로, 귀로, 혀로, 손으로, 코로 정보를 받아들이고 느끼고 즐긴다.
   냄새는 경험하는 사람의 의지에 상관없이 무조건적으로 흡입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후각신경에서 뇌로 정보가 전달되는 방식은 다른 감각과 달리 독특하다고 한다. 다른 감각들은 모두 시상이라는 중간과정을 거쳐 대뇌의 전문 영역으로 전달되어 인지되는 반면, 후각은 그러한 중간단계 없이 정보가 뇌로 곧바로 전달된다는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후각은 감정과 기억을 담당하는 뇌에 바로 연결된다고 한다. 그래서 냄새는 감정과 기억에 직접 영향을 미치고, 무의식적으로 작용한다.
   ‘프루스트 현상’이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과거에 맡았던 특정한 냄새를 통해 과거를 기억해 내는 현상을 뜻한다. 이 말은 프랑스의 작가 마르셀 프루스트가 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주인공 마르셀이 홍차에 적신 마들렌 과자의 냄새를 맡고 어린 시절에 대한 기억을 회상한 데서 비롯되었다.
   이처럼 특정한 냄새는 시각이나 청각 등의 다른 감각보다 더 빠르고 확실하게 과거의 기억을 환기한다. 냄새는 의식적인 사고 과정을 거치지 않기 때문에 다른 감각으로는 불가능한 경험을 하게 만든다. 그래서 냄새는 보통 침범 당하듯 일방적으로 우리에게 찾아온다.
   김상환은 수필 <발효>에서 아내가 끓이는 청국장 냄새에서 까맣게 망각하고 있었던 농촌의 퇴비의 냄새로, 다시 어릴 적 어머니의 땀 냄새로 후각적 연상과 기억이 순식간에 이동한다. 그런데 이 과정은 모두 무의식적으로 일어난다.
   김상환에 의하면 청국장, 퇴비, 어머니의 땀 냄새에는 발효라는 공통분모가 존재한다. 작가는 발효와 부패를 구별하며, “몸에 이로운 성분을 생성하면 발효라 하고 효소에 의해 변해가는 것을 숙성이라고 한다. 우리 인생도 발효되는 삶을 살아가면 향기가 나고 부패된 삶을 살아가면 썩는 냄새가 날 것이다. 부패는 나를 지키지 못하는 것이고, 발효는 고초균처럼 본성을 유지하면서 제2, 제3의 물질을 탄생시키는 것이다.”라고 발효의 철학마저 내세운다.
   아마도 농촌에서 자랐을 것이 분명한 작가에게 고향은 청국장 냄새나 퇴비냄새, 그리고 어머니의 땀 냄새로 기억되는 후각적 감각을 환기하는 공간이다. 작가는 청국장 냄새가 ‘뜬금없이’ 고향의 기억을 환기했다고 적고 있다. 이-푸 투안(Yi-Fu Tuan)은 고향에 대한 인간의 “깊지만 잠재의식적인 애착은 단순히 친숙함과 편안함, 양육과 안전의 보장, 소리와 냄새에 대한 기억, 오랜 시간 동안 축적되어 온 공동의 활동과 편안한 즐거움에 대한 기억과 함께 온다.”라고 했다. 이-푸 투안이 ≪토포필리아≫에서 적었듯이 “냄새에는 생생하면서 정서적으로 충만한 과거의 사건과 장면들을 환기시키는 힘이 있다.

 

   누구네 집 담장을 넘어 왔을까. 오랜 도시생활에서 까맣게 잊고 있었던 냄새가 나를 깨웠다. 그 냄새를 따라가 보니 우리 집 부엌에서 아내가 청국장을 끓이고 있었다.
   상쾌한 아침 구수한 청국장 냄새를 맡으면서 뜬금없이 왜 퇴비냄새를 떠올렸는지 모르겠다. 이는 아마도 추억의 향기가 더해져 그랬으리라.

 

   하지만 김상환의 수필은 청국장 냄새에서 환기된 고향에 대한 향수나 어머니에 대한 충만한 회상에서 머무르지 않는다. 그가 말하고 싶은 것은 과거의 기억이 아니라 현재의 삶에 대해서이다. 즉 발효되고 숙성되는 시간을 기다리지 못하는 현대인의 인스턴트화 된 삶을 비판하며, 삶에도 발효되고 숙성되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어거스틴(Augustine)은 과거와 미래는 없다. 오직 현재만 있다. 과거는 현재의 기억 속에 있고, 미래는 현재의 기다림 속에 있다고 했던 말을 상기하게 되는 대목이다.


   그런데 현대인들에게는 발효되고 숙성될 시간이 부족하다. 고향이 없고 이웃이 없고 평생직장이 없어지고 오래 묵은 친구조차 드물어졌다. 살고 있는 집도 직장에서도 언제나 떠날 준비가 되어 있으니 정과 사랑이 오래 묵히고 숙성될 공간도 시간도 없다. 그러다보니 애경사에도 마음에 없는 인사치레로 현금 봉투만 오고간다. 그뿐만 아니라 젊은이들은 인스턴트식 사랑에 익숙해지고 매스컴에서는 날마다 부패한 사람들의 이야기로 세상이 시끄럽다.
   발효식품에는 과학과 철학이 담겨 있다. 알고 보면 발효란 크고 웅장한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도 않는 미생물의 증식에 의해 일어난다. 우리들의 삶 또한 아름답고 행복하게 하는 것들은 미생물처럼 눈에 보이지 않은 작고 하찮은 것들이 모여서 이뤄지지 않던가.
   내가 나이를 먹어가는 일도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숙성 발효되어 가도록 힘쓸 것이다. 그러면 미움도 원망도 가슴 아팠던 일까지도 곰삭아서 사랑이 되고 기쁨이 되어 아름다운 추억으로 승화하리라.

 

   곰삭아 원숙해진 삶의 경지, 미움도 원망도 발효시켜 사랑으로, 기쁨으로, 아름다운 추억으로 승화시키는 늙음이야말로 삶을 발효시켜 아름답고 행복하게 만드는 지혜인 것이다. 늙음을 단지 육체적 노화나 젊음의 반대개념으로만 받아들이는 현대인들이 경청할 만한 메시지라고 할 수 있다.


4. 장소에 대한 기억-조옥성의 <고향 가는 길>


   조옥성의 <고향 가는 길>은 장소에 대한 기억을 불러일으킨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고향은 낯선 공간이 아니라 친숙한 공간, 그의 주관적이고 구체적인 경험들과 가치들의 안식처이며, 안전과 애정을 느낄 수 있는 고요의 중심이다. 이-푸 투안(Yi-Fu Tuan)은 낯선 추상적 공간(abstract space)과 의미로 가득 찬 구체적 장소(concrete place)를 구분했는데, 고향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친밀한 장소이다.
   조옥성은 여수에서 약 40킬로 떨어진 초도를 고향으로 둔 사람이다. 고향 행사에 참석하러 가는 날 아침 일찍 일어나 일기예보를 들어본다든가, 배를 타서는 설레는 마음으로 배 안 여기저기를 둘러보는 심경에서 고향을 찾아가는 사람의 흥분된 마음이 잘 드러나고 있다. 그에게 고향에 도착했다는 것을 확실하게 일깨워 주는 것은 “짭짤한 갯냄새”이다. 즉 고향은 갯냄새의 후각적 자극을 통해서 그에게 구체적으로 경험된다. 하지만 고향의 변화된 풍경들은 그로 하여금 고향을 찾은 반가움이 아니라 낯선 감정과 허전함을 느끼게 만든다.

 

   내가 철없이 뛰어놀던 운동장이며 학교 뒤뜰의 자갈길 그리고 공부하던 교실 등 내 어린 시절에 정들었던 것들이 이젠 모두 오래되어 생소한 모습으로 다가와 내 마음을 허전하게 만들었다.
   행사를 시작하기 전 잠깐의 틈을 타서 나는 옛날 살던 집을 찾아가 보았다. 그 넓은 남새밭은 조그마한 텃밭으로 줄어들어 있었고, 내가 살던 집은 빈 집터만 남아 있었는데, 동네 사람들이 식수로 사용하던 깊은 샘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무더운 여름에 지게 짐을 지고 집으로 돌아올 때 가장 먼저 찾아가는 곳이 바로 이 샘이다. 우리는 이 샘가에서 등물을 하며 더위를 식히곤 했는데, 샘 속을 들여다보니 이끼가 파랗게 끼어 있었다.

 

   사람들은 자신의 기억 속의 고향이 현실에서도 그대로 보존되어 있기를 소망한다. 따라서 사람들이 그리워하고 사랑하는 것은 현실의 고향이 아니라 기억 속에 저장된 장소, 과거 고향에 대한 기억이다. 따라서 수필가 조옥성이 세월이 흐름에 따라 변화된 고향의 낯선 풍경에 실망감과 허전함과 아쉬움을 느끼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유일하게 변화되지 않고 남아 있는 고향 마을의 샘 속의 ‘파랗게 핀 이끼’는 세월의 이끼라고 할 수 있다. 마치 윤동주의 시 <참회록>의 한 구절인 “파란 녹이 낀 구리 거울 속에/내 얼굴이 남어 있는 것은/ 어느 왕조王朝의 유물遺物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까”처럼 고향 마을의 샘 속에서 작가가 깨닫는 것은 파란 이끼가 낄 정도로 세월이 많이 지났다는 자각일 것이다.
   그런데 허전함과 실망감에 사로잡혀 있는 그에게 수십 년 전 위아래에서 살던 동네 형수님이 건네준 냉동전복과 미역 그리고 톳이 들어 있는 검정 비닐보퉁이는 그에게 고향의 감동을 물씬 안겨준다. “이래서 고향인가 싶었다. 나는 어릴 적 우리들의 손때가 묻은 정과 구수한 고향의 맛을 그리워하면서 잠시 눈을 감는다. 고향 가는 길은 언제나 포근한 정을 안겨주는 길이었으면 하는 생각을 한다.”에서 드러나듯 그에게 고향은 단순한 풍경이 아니라 유년시절에 느꼈던 포근함, 따뜻한 인정, 구수한 해산물의 맛과 같은 것들이다.
   고향은 단지 출신지라는 지리적 개념이 아니라 푸근함, 따뜻함, 안정됨, 평화로움과 같은 정신적이고 내면적인 개념을 지님으로써 과거에 떠나 왔지만 언제든 돌아가고 싶은 추억의 장소이다. 인간은 자신의 존재와 삶의 뿌리인 고향으로부터 떠나 도시를 떠돌지만 언제든 다시 고향으로 회귀하고 싶은 욕망을 안고 살아간다. 그래서 고향은 인생의 출발지이면서 종착지라고 할 수 있다.

 

 

송명희  --------------------------------------------
   부경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한국문학이론과비평학회’ 6대 회장 역임, ‘한국언어문학교육학회’ 회장(현), 해운대포럼 회장 역임, 달맞이언덕축제 운영위원장 역임. 부경대학교 우수교수업적상, 부경대학교 학술상, 이주홍문학상, 봉생문화상, 한국비평문학상 수상. 저서: 수필이론서 ≪디지털시대의 수필 쓰기와 읽기≫, 에세이집 ≪여자의 가슴에 부는 바람≫, ≪미주지역한인문학의 어제와 오늘≫, ≪권력과 젠더 그리고 몸≫, ≪타자의 서사학≫, ≪시 읽기는 행복하다≫, ≪소설서사와 영상서사≫, ≪여성과 남성에 대해 생각한다≫ 외 저서 및 논문 다수.